114화
“경의 우매한 선택이 어떤 외교적 피해를 낳았는지 아는가? 게다가 콘테르 전체의 위신이 떨어졌네. 어떻게 율리시스와 결혼할 영애에 대해 그런 터무니 없는 소문을 만들어 낼 수가 있나! 이에 대한 사과도 차일피일 미루더니, 이제는 살인 공모라니!”
콘테르의 국왕은 격앙된 목소리로 아테르 공작을 꾸짖었다. 아테르 공작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히아신스가 기어코 자신 몰래 일을 꾸민 것이었다.
‘몰래 꾸밀 것이면 들키지나 말 것이지, 하필이면 율리시스 왕자에게 모든 게 들통나다니!’
아테르 공작은 여식의 바보 같은 모습 때문에 화가 났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왕이 말한 대로 그들은 아직 로즈 가문에 정식으로 사과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용병을 고용해서 엘리아나를 죽이려고 한 정황까지 모두 까발려졌다. 히아신스 아테르는 심지어 감옥에 구금된 상태였다.
“폐하, 소신의 아둔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당장 로즈 가문을 찾아가 무릎이라도 꿇겠습니다. 또한, 율리시스 왕자를 너무 사모한 제 자식의 잘못된 선택을 부디 너그러이 보아 주십시오. 정말로 사람을 죽이고자 한 것이 아니오라, 너무도 분한 나머지 자신이 잘 모르는 시장에 발을 들였던 것입니다. 폐하, 넓은 아량으로 제발 용서하여 주옵소서.”
율리시스는 헛웃음을 지은 다음에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공작의 말은 틀렸습니다. 히아신스 영애는 죽이는 방법까지 자세하게 요청할 정도였고, 착수금까지 지급했습니다. 또한, 로즈 가문에 수많은 콘테르 귀족들이 사과와 함께 선물을 보냈지만, 아테르 가문의 이름은 없었지요. 공작이 정말로 사과할 의지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왕자의 말이 옳네. 아테르 가문에서는 내 말을 어기고, 모르쇠로 일관하지 않았나. 의사가 모든 것을 실토하고 아테르 가문의 어음이 나왔어도 발뺌하였었지. 이는 필시 그대들의 넓은 영지를 믿고 왕권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폐하. 추호도 그런 생각은 한 적이 없습니다. 아테르 가문은 언제나 왕실에 우호적이고, 왕실을 위해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왕자비 후보에게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경의 말에는 조금의 진정성도 없네!”
콘테르 국왕은 소리쳤다. 말 그대로 진노한 것이었다. 아테르 공작의 위세가 워낙 강력하다 보니 늘 견제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던 참이었다. 왕은 제대로 된 기회를 잡자, 놓아 주지 않았다.
“소신의 충성을 무엇으로든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으로 증명할지, 폐하께 아뢰어 주시지요. 그런 두루뭉술한 말은 이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습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저희 아테르는 무엇이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흠.”
콘테르 국왕이 고민하자, 율리시스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영지의 절반.”
“네?”
“그 정도가 사라져야 다른 귀족들과 영지 규모가 비슷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이렇게 함부로 왕권에 도전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폐하.”
“절반이라니요! 그것은 너무… 광활합니다.”
“광활한 만큼 건방지셨던 것 아닙니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은 정말로 거짓이었군요. 어찌하여 폐하의 앞에서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말을 바꿀 수 있단 말입니까?”
“폐하. 그, 그렇지 않습니다. 당치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경의 충심을 왕자의 말대로 증명해 보게.”
아테르 공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들이 바랐던 것이 이것이었다면, 성공이었다. 영지 절반이 사라진다면, 아테르 가문은 말 그대로 다른 귀족과 다를 바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딸을 데리고 나올 수 있다면……. 그것 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으리라. 율리시스는 분명 그걸 알고 그러는 것이었다.
‘이 아테르 가문을 일어설 수 없게 만들려는 것이구나!’
그제야 아테르 공작은 율리시스를 보았다. 사랑하는 여인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나 감정적 동요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욱 차갑고 이성적인 모습이었다.
“…왕자님. 설마 히아신스가 이럴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까?”
모든 것이 수상했다. 착수금을 받고 일이 들어가기 전에 발각된 것도 수상했고, 그 범인들이 처벌받았다는 이야기도 들려오지 않는 게 수상했다. 그들이 만든 덫이었다면……. 아테르 가문은 덫에 두 번이나 빠진 것이었다.
율리시스는 한참 동안 아테르 공작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바람 빠지듯 맥없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것이야말로 허무맹랑한 추측 아니겠습니까? 제가 히아신스 영애의 마음을 어찌 알고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
“경은 화제를 돌리려고 하지 말고, 폐하의 말씀에 답하세요. 영지의 절반을 내놓겠습니까? 아니면 이대로 영애가 처벌받는 것을 보겠습니까?”
아테르 공작은 율리시스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걸 확신했다. 하지만 증거는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명백히 잘못을 저지른 건 자신의 여식이었고, 자신은 죄를 추궁받는 중이었다.
이대로라면 히아신스는 왕비가 되긴커녕 괜찮은 가문과 혼인도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아니, 목숨을 보장받기도 어려웠다. 그 정도로 큰 죄였으니 말이다.
“…영지를 반납하겠습니다.”
아테르 공작은 절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영지의 반납이 모든 일을 해결할 면죄부라고는 생각하지 말게. 반드시 로즈 가문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받아야 할 것이야. 이것은 콘티노 왕국에서도 강력하게 요구한 바이네. 그들은 콘티노 왕국의 공신이라는 것을 잊지 말도록.”
“네. 명심하겠습니다.”
아테르 공작은 어깨를 좁히면서 대답했다. 영지의 반을 빼앗기고, 모든 콘테르 국민의 조롱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그 엘리아나 로즈에게 직접 찾아가서 용서를 빌어야 하기도 했다.
이 모든 걸 하느니 혀를 깨물고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아테르 공작은 자신의 명예가 땅바닥으로 떨어져서 수많은 군중에게 짓밟히는 상상을 했다.
그것이 곧 현실이었다.
***
“정말 괘씸하기는. 엘리아나를 죽이면 자기가 왕비가 될 거라고 생각했나 보죠? 히아신스 영애도 얼굴만 허여멀겋지, 속은 시꺼먼 사람이었더라고요.”
시무스 부인이 입을 떼자, 부인들이 모두 달려들 듯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율리시스 왕자님이 잡아서 얼마나 다행이에요. 영지는 반이나 빼앗기고, 아테르 공작은 집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온대요.”
“히아신스 영애가 아직 석방되지 않아서 그러겠죠. 그리고 뭐 얼굴 들고 다닐 수야 있겠어요. 귀족들도 전부 외면한다면서요.”
부인들의 우정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엘리아나가 임신했었다는 소문이 돌 때도 모두들 진짜냐고 묻기보다는, 그런 소문을 누가 낸 것이냐며 수소문해 보자고 머리를 맞대었다. 물론 이미 샤르헨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도 있었지만, 무조건 엘리아나의 편이 되려는 마음이 더 컸다.
엘리아나는 그에 대한 고마움을 느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을 대신해 아테르 가문을 신나게 욕하는 모습이 귀여워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었다.
“혼인은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요. 누가 그 집안과 맺어지고 싶겠어요. 이제는 그 유명한 아테르 가문도 아닌데.”
“우리 남편이 그러는데……. 소속 기사들도 그만두고 싶어 하는데, 받아 주는 데가 없어서 그만두지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사용인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지 뭐예요.”
아테르 가문의 가세가 기욺으로 인해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모두 구제할 수는 없었지만, 율리시스 나름대로 애를 쓰는 모양이었다. 다행인 건 원래도 평민들에게 인식이 안 좋았던지라, 오히려 그들의 치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좋아하는 영지민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일전에 율리시스가 상황을 빼곡하게 적어 보낸 서신을 보고선 웃고 말았다. 마치 연극 대본처럼 콘테르 국왕과 자신, 아테르 공작 사이에 있었던 상황을 전부 표현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큼큼, 근데 이제 소식이 들려올 때가 아닌가요?”
“무슨 소식이요?”
“엘리아나의 재혼 소식 말이에요! 당연히 율리시스 왕자겠죠?”
“제데이아 경도 만만치 않다고요. 그 먼 데까지 가서 카르만 헌터에게 친필 서신을 받아 왔잖아요.”
“질리언 경은 포기한 모양이던데요. 에이린 테네브 양의 데이트 요청을 받아들였대요.”
부인들은 엘리아나의 남편 후보로 세 사람을 정해 두고선 말을 이어 갔다. 모두들 왜 자신들에게 빨리 얘기해 주지 않냐고 닦달하는 것 같았다. 엘리아나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안타깝게도 저에게 청혼해 온 사람이 아무도 없네요.”
“이럴 수가! 다들 바보들 아니에요? 콘티노와 콘테르 두 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에서도 얼마나 많은 남자가 엘리아나의 남편 자리를 노리고 있는데요!”
“콘테르 국민 사이에서도 소문이 났는지, 빨리 국혼이 정해졌으면 한다더라고요. 신나게 욕해 댈 때는 언제고. 사람 마음이 정말 손바닥 뒤집듯 해요.”
“저는 콘티노 남자와 결혼하셨으면 해요. 그래야 우리가 더 오래오래 볼 거 아니에요. 콘테르가 바로 옆 나라긴 하지만…….”
수아르 부인이 슬픈 말투로 말하자, 그건 그렇다는 듯이 부인들이 말을 보탰다.
“요즘 제데이아 경이 유독 잘생겨진 것 같기도 하고요.”
“맞아요. 최연소 재상으로 가장 유력하기도 하잖아요.”
“엘리아나가 재상의 부인이라니……. 콘티노는 왕국이 아니라 제국이 될지도 몰라요.”
“어머나, 세상에. 너무 좋겠어요.”
부인들은 벌써 제데이아의 편이 된 듯이 말을 이었다. 시무스 부인은 엘리아나를 어떻게든 오래 보고 싶어 하는 부인들의 마음이니 이해하라며 엘리아나에게 말했다. 엘리아나 역시 처음엔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그들이 얼마나 변했는지 알기에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무렵,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나타난 남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아름다운 콘티노의 부인들. 잠시 제가 사랑하는 여인과 산책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어요?”
율리시스의 장난기 어린 말에 부인들이 입을 가리면서 소곤거렸다. 오늘이 그 날인 모양이라면서 말이다.
그 날. 바로 청혼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