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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114/121)

113화

“히아신스, 그게 무슨 말이니.”

“어차피 우리 집안이 꾸민 일인 게 모두 들통나고, 콘티노에서는 정식으로 사과를 요청하겠죠. 우린 그 굴욕스러운 요청을 들어줘야 하고요.”

“더 큰 벌을 받지 않는다면 다행일 정도지.”

“하지만 우린 이렇게 당할 집안이 아니에요. 엘리아나 로즈가 뭐라고요? 그딴 졸부가 뭐라고!”

“히아신스. 진정해라. 우리는 더 이상 나가선 안 돼.”

“아버지는 너무 약해요! 그래서 우리가 왕실에 아직 들어가지 못한 거라고요! 저는 왕비가 될 몸이에요!”

“…….”

“절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전 엘리아나 로즈를 죽여서라도 그 자리를 갖고야 말겠어요.”

“히아신스!!”

“원래 제 자리였어야 했다고요. 헨리우스가 아니라 율리시스의 약혼자가 되어야 했어요! 제 말을 들어주지 않은 건, 이 집안이라고요!”

히아신스는 모든 게 싫다는 듯이 아테르 공작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아테르 공작은 한숨을 쉬면서 머리를 짚었다. 문밖까지 쩌렁쩌렁 울렸던 히아신스의 목소리를 율리시스가 심어 둔 하녀가 들었다는 사실은 알지도 못한 채였다.

***

“정말 위험한 여자군.”

아테르 가문에 심어 둔 하녀로부터 서신을 받은 애덤 노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테르 공작과 히아신스 사이에서도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히아신스는 마치 율리시스의 옆자리에 올랐다가 쫓겨난 듯이 억울해하고, 분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헨리우스의 약혼자가 되지 않았더라도 율리시스는 그녀와 약혼할 마음이 없었을 것이었다.

자신은 친우의 마음을 잘 알았다. 그는 자기 가슴을 뛰게 하는 사람과 결혼할 생각이었으니까. 도미누스와 헨리우스의 싸움이 거칠어지지만 않았어도 왕좌에는 관심도 없었을 터였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어 버렸을 뿐.

“같은 꽃이라고 한들, 향기가 같을 수야 없지.”

“꼭 네 일이 아닌 것처럼 얘기하네, 율리시스. 이건 심각한 문제라고. 히아신스가 용병이라도 구해서 로즈 가문을 공격하면 어쩌려고 그래? 우리라고 다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애덤은 오랜만에 진지한 목소리로 충고했다. 사교계에서 바람둥이로 유명한 애덤은 여자의 마음을 잘 알았다. 특히나 이렇게 독해진 여자의 마음은 정말 무섭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았다. 그도 약혼자가 정해지는 과정에서 칼부림이 날 뻔했기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콘티노에서 서신이 오기도 했고, 소문이 워낙 커져서 아테르 가문의 사과만으로는 어림도 없을 거야. 히아신스의 말을 들어 주려는 사람들도 없을걸.”

“아테르 가문의 문제야 상관없지만, 여자의 분노는 생각보다 맹렬하다고?”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율리시스는 킥킥 웃고선 사과를 베어 물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위협받고 있다기엔 지나치게 차분한 태도였다.

“애덤, 그거 알아?”

“뭘?”

“엘리아나가 노예 시장이나 용병단 사람들과도 안면이 있다는 거?”

“뭐? 그 거친 사람들이랑? 귀족 영애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애덤은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 본다는 듯이 반응했다. 율리시스는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여유롭게 말을 이어 갔다.

“킬러들이 웬만하면 로즈 가문에 관한 건은 받지 않으려고 한다나 봐. 아마 그 세계에서 꽤 오래된 친분이 있는 듯해. 정보원으로도 쓰고, 서로서로 도우면서 지냈겠지.”

“그게 가능한 일이야?”

“내가 선택한 그녀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어.”

율리시스는 애덤과 눈을 마주치면서 말했다. 그 눈동자는 신이 난 소년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애덤은 그 눈을 보자마자 팔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아 벅벅 긁었다.

‘지금도 이런데, 이 녀석 결혼하면 장난이 아니겠군. 완전히 푹 빠졌어.’

율리시스는 애덤의 그런 반응이 재밌다는 듯이 소리 내 웃었다. 그러다가 웃음기를 거두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그림자로 쓰는 용병단 몇 명을 그쪽에 꽂아 놓으려고 해. 아주 큰 금액을 요구할 거야. 그래도 하려고 든다면.”

“그땐 끝인 거지.”

“영지 반납까지 생각하고 있어.”

“그냥 가문 하나를 끝장내려고 하는구나?”

“어차피 영지민들을 착취하다 못해 쥐어짜는 가문이니까.”

“그것 때문만은 아닌 거 같은데? 사랑꾼 씨.”

율리시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이 정도로 몰아붙이면 알아서 나가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엘리아나를 해치려고까지 하다니……. 이성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적수가 이성을 잃었다는 것은 이쪽에서는 환호해야 할 일이었다.

아테르 가문은 평민들이 싫어하는 귀족 중 단언컨대 1순위로 뽑히는 가문이었다. 율리시스는 이를 이용해서 민심을 휘어잡을 계획까지 하고 있었다.

자신들을 착취하고, 비겁하게 굴던 명문 가문을 깔끔하게 처리하면 대중들의 지지는 자연히 따라올 것이다. 율리시스는 그 후 바로 엘리아나에게 달려가 청혼할 예정이었다.

율리시스는 품 안에 넣어 두었던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붉은 벨벳으로 둘러싸인 반지 케이스 안에는 그녀를 위해서 콘테르 최고의 장인이 세공한 장미 모양의 루비 반지가 있었다.

자신이 처음 선물했던 그 머리핀과 비슷한 디자인이었다. 물론 그것은 주물도 엉망이었고, 색도 벗겨졌지만 두 사람에게는 의미가 있는 물건이었다.

어떤 자리에서건 그 머리핀을 꼭 착용하고 있던 엘리아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율리시스는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이 반지를 들고 콘티노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히아신스 아테르.

율리시스는 그녀가 엘리아나 로즈를 위협할 수 있는 마지막 인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에는 엘리아나 로즈 밀이 될 테니까.

그때부터 그녀에게 가해지는 공격은 곧 왕실에 대한 공격과 같았다. 그것을 알고서도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있다고 해도 엘리아나가 눈치채기도 전에 숨통을 끊어 버리리라. 그렇게 다짐하면서 율리시스는 반지 케이스를 꼭 쥐었다.

***

엘리아나 로즈에 관한 소문이 헛소문이었다는 사실이 퍼지자, 모자는 이전보다 더 비싼 가격에 미친 듯이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콘테르 사람들은 미안함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고 싶기 때문인지 모자를 수십 개씩 주문했다.

엘리아나는 자신이 헌터 가문에서 데리고 나온 하녀들이 함께 모자 가게를 차릴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콘티노의 수도에서 목이 가장 좋은 자리였다. 그리고 모자 사업에 관한 일들을 점점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일정 부분의 수수료를 제외하고선 그들이 다 가져가는 게 바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녀들은 이제 각자 가정을 꾸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해졌다. 모자 공방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엘리아나의 드레스를 흉내 낸 의상 가게도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엘리아나는 사교계의 빛나는 별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과 교류를 자주 하는 부인들을 초대해서 다과회를 한다거나, 왕립 대학의 교수 내외를 초청하여 연회를 여는 등의 일까지 주최하니 모두들 그녀의 측근이 되고 싶어 했다.

게다가 엘리아나를 모욕했던 아테르 가문은 사실상 수세에 몰린 터라, 빨리 노선을 갈아타고자 하는 콘테르의 귀족들도 그녀에게 대놓고 선물 공세를 하기도 했다. 모두 돌려보내졌지만 말이다.

엘리아나는 불필요한 교류에는 선을 긋는 사람이었다. 특히나 콘테르 왕실 연회에서 아테르 가문이 자신을 욕보였을 때, 거기에 한마디씩 얹었던 가문의 명단을 이미 갖고 있었다. 그들은 박쥐 같은 속성을 가졌을 가능성이 컸다. 엘리아나는 그들과는 거리를 두고, 그 외의 가문들과 적절히 교류하면서 로즈 가문을 사교계에 잘 자리 잡도록 하였다.

그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도, 엘리아나는 율리시스의 서신이 오지 않는 것이 걱정되었다. 일이 잘 해결되고 있는 것인지 연락을 줄 법도 한데, 그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엘리아나는 걱정이 되었지만, 먼저 연락을 넣지는 않았다. 아직 자신에 대한 소문이 완벽히 정리된 것은 아니었기에 조심스러웠다.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엘리아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 부분에서는 율리시스와 의견이 맞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엘리아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각 분야의 저명한 귀족들을 초청하고, 만남을 이어 갔다. 살롱들을 돌아다니면서 재능 있는 예술가를 후원하고, 작품을 사 모으기도 했다.

로즈 가문은 먹고살기가 바빴기에 귀족들이라면 으레 소유하고 있는 미술품들이 부족했다. 엘리아나는 저택을 값비싼 것들로 채우기보다는 전도유망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구매했다.

그녀가 구매하면 무조건 따라 사는 사람들도 꽤 생겨날 정도로 안목이 좋았기에, 그녀의 눈에 든 예술가들도 금세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소문이 잠잠해지기가 무섭게 사교계와 문화계 전반에 모든 인맥을 장악했다.

그렇게 로즈 가문의 입지를 완벽하게 다지고 있던 와중, 기다리고 있던 율리시스의 편지가 도착했다.

“…….”

“엘리, 왜 그래? 기다렸던 편지잖아. 내용이 좋지 않아?”

엘리아나는 베니의 물음에 숨을 길게 내쉬고선 답했다.

“좋은 소식도, 나쁜 소식도 아니야.”

“그게 뭔데?”

“히아신스 아테르가 나를 죽이려고 용병을 고용하려 했대. 그걸 미리 알아챈 율리시스가 사람을 심어 두었고, 거기에 히아신스가 걸린 모양이야. 그래서 아테르 가문을 살인 공모죄로 처벌하기로 했대.”

“정말 웃기는 계집애네. 너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내는 것도 모자라, 죽이려고 했다고?”

“일부러 내게 알리지 않았나 봐.”

“걱정할까 봐?”

엘리아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편지를 보여 주었다.

“율리시스 본인이 뭘 하기도 전에 내가 히아신스를 혼내 줘 버릴까 봐 그랬대.”

“뭐?”

베니는 그 말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도 맞았다. 엘리아나가 알게 되었다면 먼저 손을 썼을 테니 말이다.

율리시스는 장난스럽게 말을 이어 가다가 서신의 끝에 달콤한 한마디를 적어 놓았다.

이 일이 끝나면 그대에게 당장 달려가겠노라고.

엘리아나는 그 부분의 문장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기다렸던 편지는 생각보다 더 달콤하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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