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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113/121)

112화

“아니, 그것 들었어요? 헌터 가문에서 정부를 양녀로 숨겨 놓고 있었다는 사실이요!”

“그래서 그렇게 줄기차게 이혼했던 거였어요?”

“그렇다나 봐요. 전 부인들이 초야도 치르지 않았다고 했대요.”

거리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콘티노 왕실에서는 반역자인 헌터 가문의 카르만 남작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으며, 그를 소환하여 마땅한 벌을 내리고자 했다고 공표했다.

그러나 그가 그동안 세운 공적과 제리크 헌터의 계획을 알지 못했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그를 영구 추방하는 선에서 조치하겠다고 했다.

그런 결정에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제리크 헌터가 저지른 죄는 매우 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왕실에서 추가로 밝힌 사실에 사람들은 이해했다.

그가 수양딸이던 샤르헨 헌터와 사이에서 자식을 낳을 예정이며, 샤르헨이 이미 만삭이라는 사실이었다.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특히 생명이 막 태어나기 직전의 상태에서 교수형에 처하는 건 아닌 것 같다며 왕의 너그러움을 이해하려고 했다.

카르만 헌터는 그 먼 곳에서부터 친필로 샤르헨과 원래부터 정인 사이였음을 밝혔다. 그에 맞춰서 그의 전 부인들이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이혼했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초야도 치르지 못하고 허수아비처럼 살았던 결혼 생활.

그 엄청난 가십에 사람들은 매일같이 헌터 가문의 이야기를 했다. 평민이고 귀족이고 가릴 것 없이 모두 헌터 가문에서 있었던 치정에 거대한 관심을 보였다.

“카르만의 전 부인들도 입을 모아 용기 내어서 말했다잖아요. 그 둘이 얼마나 끔찍하게 사랑하는 커플이었는지, 여전히 치가 떨린다나 봐요.”

“그럼 그 소문의 임신부가 양녀였던 거네요?”

“그러니까요! 애꿎은 엘리아나 양만 욕먹은 거죠.”

“그것도 누가 누명을 씌우려고 했다면서요?”

“콘테르국에서 그 소문을 낸 의사가 엄청난 양의 황금을 가지고 도망가려는 걸 잡았대요. 이제 진실이 밝혀지겠죠.”

“그 의사를 사주한 게 아테르 가문이라는 소문이 있던데요?”

“세상에. 히아신스 아테르가 있는 그 가문 말이에요?”

“왕비 자리가 탐이 났던 거겠죠!”

시장에 모인 사람들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엘리아나의 소문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자리를 잡고 그에 대해 이것이 맞네, 저것이 맞네 이야기할 정도였다.

친한 부하들과 맥주를 마시러 나왔던 질리언은 그 얘기를 듣고 큰 잔으로 맥주를 연거푸 비워 내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참! 다들 남의 일에 왜들 이렇게 관심이 많아!”

맥줏집 안에서도 이어지던 엘리아나의 이야기는 질리언의 호통에 끊어졌다.

“자작님……!”

“너희들끼리 알아서 먹고 가라. 술맛이 다 떨어졌다.”

그는 부하들이 술을 맘껏 마시고도 남을 만큼의 금화를 올려 두고선 술집을 빠져나왔다. 속이 답답했다. 자세한 건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율리시스를 도와주려다가 엘리아나가 곤란해진 것일 터였다.

“그놈의 율리시스!”

질리언의 입장에서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었다. 사내자식이 남자답게 모든 일을 혼자 해결해야지, 뭐든 엘리아나의 손을 빌리지 않고서는 할 수 없다니. 그런 녀석은 엘리아나를 가질 자격이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해서 그 자리를 빼앗고 싶었다. 하지만 엘리아나가 그 녀석의 곁에서 얼마나 행복하게 웃었는지를 보았기에, 질리언은 그런 비겁한 짓은 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여자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라.’

돌아가신 질리언의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언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위해서 그렇게 살았다는 걸 알았기에, 질리언은 그 말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번에 그가 해야 하는 노력은 ‘포기’였다.

“그렇지만 이렇게 자꾸 시원찮게 군다면 뺏고 말 거라고.”

그게 사랑하는 여자의 행복을 위한 길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니 말이다. 질리언은 신경질을 내면서 말에 올라탔다. 실컷 달려야지 아무래도 이 답답한 속이 풀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질리언은 그대로 평야를 향해서 말을 거세게 몰았다. 시원한 바람에 복잡한 마음을 털어 내고 싶었다.

***

“엘리, 이제 바깥을 슬슬 나가도 되지 않겠어?”

베니는 계속해서 집 안에서만 생활하는 엘리아나가 걱정된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엘리아나는 고개를 젓고선 명랑하게 말했다.

“이제 사람들이 대놓고 떠들기 시작했을 텐데, 내가 쉽게 나서면 곤란하지. 그 사람들에게 먹잇감을 던져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아테르 집안이 정당한 처벌을 받고, 소문에 대한 정정이 양국에서 정식으로 이뤄진 후에 움직일 거야. 그리고 나는 나를 집에 스스로 가둔 게 아니라 밀린 집안일을 하는 거라고.”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네가 있으니까 집안에 일이 너무 많아져서 그런 거라는 생각은 왜 못 하는 거야? 너는 너무 꼼꼼해.”

“꼼꼼하게 해야지. 이제 계절이 지나면 정원도 화려해질 테고, 5월이 되면 담장에 장미가 가득 피어날 거야. 정말 로즈 가문다워지겠지.”

엘리아나는 열심히 구상한 정원의 모습을 상상하며 웃었다. 정말로 엘리아나가 집안에서 일을 보는 동안 로즈 가문의 모습은 이전보다 배로 탄탄해진 터였다.

모든 것은 엘리아나의 지도 아래서 이뤄졌다. 도서관엔 장서들이 가득 찼고, 동생들의 학습 수준도 월등히 좋아졌다.

그러면서 내부 실내 장식도 신경 쓴 덕분에 이제 저택은 제법 자작 가문다운 귀한 티가 났다.

엘리아나는 주변 지인들에게 그간 많은 선물을 받았다. 고미술품 수집이 취미인 오델리 백작에게는 커다란 그림을 선물 받았고, 비비안 공주는 귀여운 아기 천사 모양의 조각상을 선물해 주었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샹들리에는 시무스 부인이 특별히 외국에서 주문하여 선물해 준 것이었다. 정원을 꾸미는 것들은 헬렌이 모두 도와 주었다.

엘리아나는 그밖에도 독특한 매력을 가진 소품들이 서로 잘 어우러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엘리아나가 마지막으로 애를 쓰고 있는 곳은 응접실의 벽이었다. 엘리아나는 벽 한쪽을 로즈 가문이 출간했던 책들로 꾸미고 있었다. 복간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아버지가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격하는 걸 보며 엘리아나 역시 가슴이 뭉클했다. 책들은 모두 표지가 보이도록 정렬되었는데, 멀리서 보아도 장관이었다.

“누나! 언젠간 내가 쓴 책을 저기, 저기 가운데에 놔 줘야 해?”

“그럼, 당연하지.”

엘리아나의 동생들은 각자 자기 책으로 빈 곳을 장식할 생각에 들떠 있었다. 지금은 작은 소품들이 놓여 있어서 조화를 이루는 곳이었다.

“이걸 우리만 보는 게 아쉬울 정도야. 너무 아까워.”

“응. 그래서 우리만 보게 하진 않을 거야.”

“응?”

베니가 묻자, 엘리아나는 어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을 이었다.

“시무스 부인이 여는 모임의 다음 장소를 우리 집으로 하기로 했어.”

엘리아나는 누군가의 연회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기 집으로 사람들이 방문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동안 계속해서 집 안 꾸미기에 열을 올렸던 것은 내실을 다지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런 목적도 있었다.

“그다음에는 작은 파티를 열려고 해. 자작의 작위를 받은 다음에 사람들을 초대한 적이 없으니까.”

“엘리, 너는 정말 다 생각이 있구나.”

베니가 정말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엘리아나는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으면서 삐뚤어진 책 한 권을 바로잡았다.

“나는 내 할 일을 할 뿐이야. 상대가 안 되는 적수에게 시간 낭비를 하는 게 아니라.”

“히아신스 영애가 눈앞에 있었으면 부들부들 떨며 울었을 거야.”

엘리아나는 푸흐흐 웃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입힌 상처에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는 듯이 말이다. 베니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그대로인 엘리아나의 모습에 따라 웃었다.

“그럼 이제부턴 파티 준비를 하면 되겠네?”

“조금 분주해질 거야.”

“미안해하지 마. 이곳이 언제든 마음껏 북적거리게 하는 게 시녀장으로서 내 일이니까.”

베니는 시원시원하게 웃으면서 응접실을 나섰다. 해야 할 일이 많다는 듯이 분주해 보이는 그녀의 뒤를 어린 동생들이 따라갔다. 맛있는 것을 해 달라고 보채면서 말이다.

그 모습을 보다가 엘리아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율리시스의 서신이 며칠째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잘하고 있는 거겠지.”

온전히 율리시스가 해내야 하는 일이었지만, 엘리아나는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내 부드럽게 시선을 떼어 냈다. 이 일을 해내지 못하면, 율리시스는 엘리아나의 선택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적어도 엘리아나의 마음 안에 정해 둔 기준은 그러했다.

그렇기에 엘리아나는 율리시스가 누구보다 멋지게 이 문제를 해결하고 나타나기를 바랐다. 그를 향한 자신의 끌림과 애정을 보여 줄 수 있도록, 당당하게 말이다.

그리고 그가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

아테르 가문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모두가 허둥지둥했다. 의사는 적발되었고, 콘티노에서는 카르만 헌터의 자필 문서까지 받아 온 참이었다.

“그렇게까지 할 만한 여인이란 말인가? 엘리아나 로즈가 뭐길래?”

아테르 공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히아신스 역시 일이 이렇게까지 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늘 그랬듯이 물 흐르듯 자신들에게로 여론이 흐를 거라고 생각했다.

초반엔 그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누군가 기름을 부어 주는 것처럼 콘테르의 시골 구석구석까지 소문이 퍼졌다. 엘리아나는 이제 왕비의 자리는 꿈꿀 수도 없는 이혼녀였다. 그런데 한순간에 반전이 되었다.

“멍청한 의사 때문이에요. 적당한 시기에 죽여 버리셨어야죠!”

히아신스는 표독스럽게 말했다. 아테르 공작은 독기 어린 히아신스의 얼굴에 말을 잃었다. 왕비가 아닌 자리에는 욕심을 내지 못하도록 키운 것은 맞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사람을 죽인다는 소리를 아무렇게나 내뱉고, 분해서 부들부들 떠는 모습은 자신이 바라던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것일까.

아테르 공작이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히아신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당할 수만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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