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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112/121)

111화

카르만 헌터와 배가 부른 상태의 샤르헨은 아르헨 왕궁에 잡혀 들어왔다. 그들은 원래의 이름을 버리고, 헨리와 캐럿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었다.

아르헨까지 오면서 갖은 고초를 겪었던 터라, 두 사람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그나마 마지막으로 챙긴 돈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땅을 조금 사고, 집도 살 수 있었다. 어차피 다 버려진 곳이라서 굳이 사는 의미가 없었지만 말이다.

카르만은 용병 일을 하면서 생계를 책임졌다. 샤르헨은 점점 배가 불러 왔지만, 넉넉하지 않은 살림살이에 밭을 직접 가꾸었다.

남작과 남작 부인의 삶을 영원히 살리라고 생각했던 때는 멀어져 있었다. 그만큼 두 사람의 겉모습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둘 다 피부가 태양 빛에 그을려 있었고, 손은 거칠었다.

옷차림은 지나다니는 평민과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더 얇고 허름해 보이기도 했다. 마치 엘리아나 로즈가 처음 남작가에 왔을 때처럼 말이다.

샤르헨은 그때 창문 너머로 그녀를 보면서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던 자신을 비웃었다. 그녀가 모든 사달의 원인이 될 줄 알았다면……. 아니다. 오히려 그녀가 헌터 집안에 들어왔기에 단두대에서 목숨이 끊어지지 않고 이런 비루한 삶이라도 이어 갈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위안 삼으면서 살고 있었는데……. 그들이 찾아왔다. 아르헨의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곁에는 제데이아가 있었다.

“이자가 콘티노 왕국의 반역자 제리크 헌터의 아들 카르만 헌터가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존경하는 아르헨 국왕 폐하. 그리고 콘티노의 제데이아 테네브 경. 저를 벌하시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제 아내는 아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 아내를 부디 살려 주십시오.”

배가 불러서 무릎을 꿇고 앉기도 어려운 샤르헨은 서 있었다. 제데이아는 준비된 문서를 건네면서 말을 이었다.

“양국의 국왕께서 너른 아량을 베푸셨습니다. 헌터 가문은 이대로 모든 지위와 이름을 박탈당할 것이며, 다시는 헌터라는 성을 누구도 쓸 수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콘티노 안에서는 말입니다.”

“…….”

“당신은 아르헨 국왕께 새 이름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평생 작위를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용병의 일도 정해진 용병대에서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제약에 순응하여 조용히 살아간다면, 당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죄는 유예될 것입니다. 당신이 이것들을 어기는 순간까지. 죽을 때까지 지킨다면, 사면되는 것이지요. 단, 그전에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아내인 샤르헨은 이전부터 연인이었고, 이에 따라 가짜 부인들을 들였음을 명명백백히 밝히는 친필 문서를 써야 합니다. 당신으로 인해 나라의 공신인 로즈 가문이 더럽힘을 당하고 있으니까요.”

“로즈 가문이 더럽힘을 당하다니요?”

카르만이 물었다. 아르헨에서는 콘티노나 콘테르의 소식을 듣기가 어려웠다. 거리도 거리거니와 귀족들의 이야기가 평민에게까지 닿기는 어렵기 때문이었다.

제데이아는 자세한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대신 문서를 내밀었다.

“지은 죗값에 비한다면 깃털처럼 가벼운 일입니다. 아내와 자식을 살리고 싶다면 조용히 이에 따라 주십시오.”

“제데이아 경의 말에 따르라. 그러지 않으면 너는 이곳에서 추방이다. 추방되는 즉시 콘티노의 죄인 신분으로 돌아가며, 교수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카르만.”

“…….”

샤르헨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리자, 카르만은 물집과 잔상처로 얼룩진 손으로 펜을 잡았다. 그러고선 문서에 서명하고서 빈 곳에 유려한 글씨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샤르헨은 무릎을 꿇은 채 아주 낮은 자세로 글을 쓰는 그의 모습에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돌아가기를 택하지 않고 아이의 아버지로서, 자신의 남편으로서 사는 삶을 택한 것이 고맙기도 했다.

샤르헨의 삶은 내내 지옥이었다가 잠깐 반짝였으나, 그것은 겉뿐이었다. 진짜 행복은 현재에 있었다. 가난하고 남루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카르만도 그러할까? 샤르헨은 그 생각을 떨쳐 낼 수 없어서 불안했다. 불안은 마음을 좀먹고, 샤르헨은 매일 조금씩 말라 가고 있었다.

‘이것 또한 이 아기 때문에 의무감으로 선택한 것이겠지. 그는 엘리아나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을 거야. 얼마나 절망스러울까. 그의 웃는 얼굴을 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아.’

샤르헨은 훌쩍거렸다. 그가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이 좋기도 하면서, 마음의 불안을 완전히 떨쳐 낼 수 없었다.

이젠 수양딸이 아니고 정식으로 아내가 되었음에도 말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완전한 믿음이 없었고, 아슬아슬한 관계는 오로지 배 속에 있는 아이만으로 연결되었다.

카르만은 가문을 저버리고 아버지마저 죽게 두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면서 밤잠을 설치곤 했다. 그의 바로 옆에서 잠드는 샤르헨은 그가 새벽마다 혼자 콘티노국이 있는 남쪽을 바라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영원히 이 아르헨을 벗어날 수 없다는 문서에 서명하고, 자신의 수치라 할 수 있는 있는 결혼 생활에 대해서 명명백백히 밝히는 문서를 쓰고 있었다.

샤르헨은 폭발하듯이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카르만은 길게 쓰지 않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담백하게 적어 냈다. 그러고 나선 일어나 샤르헨을 안아 주었다.

“괜찮아?”

샤르헨은 대답도 하지 못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 괜찮아질 거야. 괜찮아.”

카르만이 그녀를 달래듯이 말했다. 그러나 샤르헨은 마음 편히 행복할 수 없었다. 마음속에 드는 의심 때문이었다. 카르만 역시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죄책감의 무게로 완전히 행복할 수 없었다.

두 사람에게 교수형보다 더 잔인하고, 오랫동안 남게 될 상처 같은 벌이었다.

제데이아는 문서를 챙기고 아르헨의 왕에게 예를 갖춰서 인사했다.

아르헨 왕은 그들에게 길버트라는 성을 주었다. 이제 그들은 헨리 길버트와 캐롯 길버트였다. 두 사람은 위조된 국적이 아닌 정식 국적을 갖게 되었으나, 동시에 영원히 평민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조건을 갖게 되었다. 대가 계속 이어지더라도 변하지 않을 제약이었다.

카르만은 ‘다시 헌터 가문을 일으켜 세우라’고 했던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비록 그 말은 영원히 지킬 수 없게 되었지만, 카르만은 이렇게밖에 선택할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이 지켜야 하는 건 한 여자와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아이였으니 말이다.

두 사람의 복잡한 심경이 뒤섞이는 것을 보며 제데이아는 아르헨 왕국을 벗어났다.

그의 손에 든 문서가 엘리아나의 억울함을 완전히 벗겨 내 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

엘리아나는 로즈 가문의 정원 가꾸기에 힘을 쓰고 있었다. 귀족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교 수단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소문을 피해 집에 처박혀서 나오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엘리아나는 바빴다.

모든 지식은 책에서 나온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집에 마련할 책들의 목록을 정리했다.

창피해서 바깥출입이 없다는 것은 낭설이었다. 그녀는 그저 때마침 잘 잡혔다 싶은 생각으로 집안을 대대적으로 뒤엎고 있었다.

콘테르에서는 자신의 출입까지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지고 있다고 했다. 아테르 가문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엘리아나는 율리시스가 잘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귀족 가문들은 문서들을 하나둘 올려서 엘리아나 로즈를 왕비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성명들을 냈다.

엘리아나는 그 명부가 나중에 율리시스가 진짜 옆에 둬야 하는 사람들을 가려낼 때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엘리아나가 가까이해야 할 가문들은 물론이거니와 말이다.

로즈 가문 사람들도 처음에는 어이없는 소문에 속상해했지만, 정작 담담하게 제 할 일을 잘 해 나가는 엘리아나의 모습을 보면서 모두 일상생활에 잘 적응했다.

기사인 조셰프는 크게 분노했지만, 그는 이미 주인을 따르기로 결심한 터였다. 그는 매일같이 화를 삭이면서 혹시나 엘리아나 주변을 공격하는 사람이 없도록 저택 경호를 더 철저히 하였다.

가문 전체를 마치 요새처럼 아무나 출입할 수 없도록 만드니, 소문은 로즈 가문 내로 들어올 수 없었다. 들어오더라도 엘리아나가 직접 처리했다. 예를 들어 엘리아나를 비방하는 쪽지나 문서가 책들 틈바구니에 껴서 오면, 그녀는 그 자리에서 웃으면서 낭독하고선 찢어 버렸다.

어린 동생들은 그런 그녀의 당당한 모습을 따라 하려고 애썼다. 어떤 일에도 의연하게 행동할 수 있는 면모를 닮고 싶은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동생들을 모아 놓고선 자신이 모은 책을 차례로 읽게 했다. 그녀가 어디론가 재가하더라도, 각자가 ‘장미의 이름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빛날 수 있도록 말이다.

특히나 아버지를 따라서 테르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는 남동생들은 학구열이 넘쳤다. 철통 방어로 인해 로즈 가문 내의 분위기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 집에 생기가 없고, 매일 싸움이 일어난다고 떠들어 댔다. 그러나 로즈 가문은 한동안 사교계에 활발히 나가면서 다지지 못한 내실을 더 탄탄하게 다질 뿐이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콘테르에서 먼저 외교단이 찾아왔다. 죄인인 의사를 데리고서 말이다. 그는 사실을 왜곡하는 대가로 받은 수많은 돈들을 들고 다른 나라로 달아나려다가 현장에서 잡혔다고 했다. 그는 자기 돈이라고 우겼지만, 아테르 가문의 표식이 찍힌 어음이 발견되면서 상황은 뒤집혔다. 전세가 완전히 역전된 것이었다.

그런데도 로즈 가문의 문은 더 굳게 닫혔다. 사람들은 콘테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엘리아나 로즈와 연관된 소문은 무엇이 진실인지를 궁금해했다.

사람들의 관심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무렵, 아르헨에서 제데이아와 그의 수행원들이 도착했다. 손에 이 상황을 완벽히 해결할 수 있는 해답을 든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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