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그런 말을 내게 해 줘서 고마워요. 제데이아. 하지만 난 누구의 보호도 필요하지 않아요. 구설은 두렵지 않고요.”
“엘리아나.”
“그대의 마음을 받을 수 있어서 한 명의 영애로서 영광이에요. 하지만 저는 이미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었답니다.”
“…율리시스 왕자인가요?”
“아직 밝힐 수 없어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죠.”
엘리아나는 모호하게 말하면서 미소 지었다. 제데이아는 한숨을 몰아쉬고선 말을 이었다.
“만약 그 사람이 나와 같이 아둔한 눈을 가져서 그대의 가치를 몰라본다면…….”
“…….”
“그땐 내게도 기회가 있을까요?”
“그런 불행한 일이 없길 바라겠지만……. 그런다면 제일 먼저 당신을 떠올리죠, 용감한 제데이아 경.”
엘리아나가 부드럽게 손을 내밀었다. 제데이아는 무릎을 약간 굽히고선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엘리아나는 자신의 손등에 입을 맞추느라 숙인 고개를 보았다. 제데이아 테네브가 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를 굴복시키겠다고 다짐한 적은 없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짜릿한 감정이 느껴졌다. 엘리아나는 그런 호승심을 마음속 깊이 숨기면서 손을 거둬 냈다.
제데이아의 얼굴에는 손등 키스에 대한 설렘과 짧은 접촉에 대한 아쉬움이 뒤섞여 남아 있었다.
***
콘테르 왕국에서는 예상했던 대로 엘리아나가 카르만 헌터의 아이를 유산했던 여자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소문의 근원지는 알 수 없다고들 했지만, 누구의 수작인지는 확실해 보였다.
샤르헨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던 콘티노 귀족들은 누가 그런 비겁한 짓을 하냐고 했지만, 평민들은 알 도리가 없었다. 양국은 모두 엘리아나에 대한 가십으로 술렁거렸다.
순수한 민심을 가지고 노는 데에는 아테르 공작만큼 뛰어난 사람이 없었다. 그는 소문을 만들고, 부풀리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조종했다.
그는 자신이 퍼뜨린 듯 퍼뜨리지 않은 듯, 말을 흘리고 다니는 데는 선수였다. 그리고 그것을 대리할 다른 방패 같은 사람도 항상 세워 두었다. 이번에는 헌터 남작가를 드나든 의사였다.
평생 갖지 못할 큰돈을 주고 매수하자, 의사는 샤르헨의 일을 엘리아나로 바꿔서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거되었지만, 돈을 얼마나 많이 받은 것인지 그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율리시스는 자신 때문에 엘리아나가 모욕적인 말을 매일같이 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그녀는 괜찮다고 했지만, 이것은 자신을 향한 공격이나 다름이 없었다. 자기 아내가 될 사람이라고 이미 공표하기 직전인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콘티노 왕국에서는 아르헨에 사람을 보내서 카르만 헌터에 대한 소환을 요청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담당관은 제데이아 경입니다.”
“남이 해결해 주는 것만 기다릴 순 없지.”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해결되리란 걸 알았다. 그러나 그동안 엘리아나가 모욕당하게끔 두고 싶지 않았다. 더불어 제데이아 테네브가 그녀에게 더 가까워지거나 점수를 따는 일을 손 놓고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로즈 가문을 모욕한 죗값을 받아야 해. 분명 아테르 가문에서 시작한 걸 거야. 큰 자금이라면 분명 현금이나 값비싼 광물이었겠지. 양이 엄청났을 거야. 그 움직임이 포착된 장소를 찾아봐. 의사에게서 돈더미를 찾아내고 나면 조작된 소문을 만든 자를 찾아서 엄벌할 수 있으니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냥 의사 놈의 대가리를 부숴 버리는 게 어떻습니까? 대갈통이 박살 나기 싫으면 입을 열겠죠.”
투리스는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듯이 말했다. 율리시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마저도 상대가 원하는 걸 거야. 우리가 흥분해서 그를 고문하고, 거짓 자백을 받아 냈다고 하겠지. 의사는 풀어 줄 거야.”
“네? 왕자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래야 돈이 있는 장소를 찾기가 쉽겠지.”
사실 멜번은 어떻게 금전 경로를 추적할지를 고민하던 중이었다. 이때 들려온 율리시스의 의견은 분명 탁월했다.
“분명 의사는 우리가 풀어 주면 그 돈을 들고 이 나라를 튀려고 할 거야. 그때를 잘 잡아야 해. 단 한 번뿐일 테니까.”
“분명 배를 이용해야 할 겁니다.”
“바다에 나가기 전에 잡아야 해. 바다에는 질리언이 있다고.”
여기도 연적, 저기도 연적이었다. 율리시스는 이번에는 자신의 힘만으로 그녀를 구하고 싶었다. 자신 때문에 위기에 처한 것이었으니까.
“아테르…….”
율리시스는 그 이름을 입으로 내뱉기만 해도 화가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머릿속에는 아테르 가문의 얼굴들이 떠올렸다. 아무것도 모르고 낄낄대고 있는 귀족들의 한심한 얼굴들도 말이다.
그녀가 콘테르를 위해 나서서 해 준 일에 대한 보답은 이런 것이면 안 되었다. 게다가 사랑을 얻고 싶은 여자에게 할 짓은 더더욱 아니었다.
율리시스는 무심결에 자기 입술을 만져 보았다. 그녀와 잠깐 닿았던 순간의 숨결이 여전히 남아 있는 듯했다. 보드랍고, 따뜻했던 순간. 그것이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덜컥 겁이 났다. 이제껏 율리시스는 그다지 두려운 것들이 없었다. 잃을까 봐 불안한 것도 없었고, 딱히 크게 갖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엘리아나 로즈라는 존재가 있었다. 잃을까 두렵고, 갖고 싶어서 미쳐 버릴 것만 같은 사람이 말이다.
“멜번, 투리스. 두 사람이 함께 이 일을 맡아 줘. 아르헨으로 향한 무리보다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
“네, 알겠습니다.”
“네!”
율리시스는 우렁찬 대답을 듣고선 초조하게 입술을 뜯었다. 결국 엘리아나에게 보내는 서신을 마저 적지 못했다.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엘리아나에게 당당히 다가갈 수 있을 것이었다.
멜번과 투리스가 방을 나서기 무섭게 시종장 미네가 편지를 들고 왔다.
“엘리아나 로즈 영애에게서 온 서신입니다.”
“엘리아나가?”
율리시스는 자리에서 번쩍 일어났다. 그러고선 편지를 빠르게 뜯어 보았다.
「친애하는 율리시스 왕자님께.
율리시스. 엘리아나에요. 제데이아가 아르헨으로 간다는 건 이미 들었겠죠. 테네브 부인의 도움으로 카르만의 전 부인들이 모두 카르만과 샤르헨, 두 사람의 사이를 증언해 주기로 했어요. 이곳 콘티노국에서 잘 해결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오늘 이 편지를 쓴 건 다름 아닌 부탁을 하기 위해서예요.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콘테르에서 최대한 이 소문이 멀리, 넓게 퍼지도록 해 주세요.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이 문제의 시작점에 있는 사람들이 콘테르의 어느 곳에 가서도 고개를 들 수 없도록 철저하게요. 오히려 그들이 날뛸 수 있도록 하면 더 좋아요.
저는 저에게 승부를 걸어온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는답니다. 철저히 이겨 주겠어요.
저의 편이 되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며…….
―엘리아나 로즈」
엘리아나의 어조는 매우 강경했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서신에서도 느껴졌다. 그녀는 위축되거나 작아지지 않았다. 그것보단 자신에게 비겁하게 시비를 건 이들에게 이 모욕감을 배로 되갚아 주겠다는 열의가 있을 뿐이었다.
“하…….”
율리시스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런 여자였기에, 사랑에 빠지고야 만 것이었다. 나약함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듯이 단단하고 강하면서도 유연하고 똑똑한 그녀의 모습에 말이다.
율리시스는 곧장 깃펜을 들고선 답장을 써 내려갔다.
「친애하는 엘리아나 양에게.
콘테르에서는 헌터 남작가에서 근무했다던 의사를 검거했습니다. 그자가 아테르에서 받은 거액의 돈을 찾고 있고요. 그것을 찾는 대로 아테르 가문을 처단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과는 별개로, 그대의 뜻대로 그 질 낮은 소문을 콘테르의 개미 한 마리까지도 알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진실이 밝혀졌을 때, 그들이 입에 소문을 한 번이라도 올렸다는 사실을 수치스러워할 수 있도록 할게요.
나를 믿고 저버리지 않아 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대의 자비로움에 존경과 신의를 느끼며.
―율리시스 밀」
율리시스는 짧게 답신을 써서 보냈다. 그러고선 곳곳에 숨겨 둔 그림자 같은 기사들에게 자신의 명을 전했다. 엘리아나의 말을 그대로 따를 생각이었다. 다만, 자신도 아테르 가문이 얼굴조차 들고 다닐 수 없도록 나름의 최선을 다할 것이었다.
머리도 맞대면 낫다고 했다. 여러 사람들이 긴밀히 협력하면, 분명 아테르 가문의 위세를 더욱 꺾을 수 있을 것이었다. 다신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엘리아나 로즈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율리시스는 그 누구보다 그녀의 능력을 믿었다.
‘잠깐이라도 그녀가 슬퍼하고, 좌절하고 있을까 봐 걱정했던 내가 우스워. 그녀는 엘리아나야. 엘리아나 로즈라고!’
율리시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사랑하고 존경할 수밖에 없는 강인한 여자였다. 콘테르의 심장이 될 남자의 마음을 온통 가져가 버린 단 한 명의 여인이었다.
율리시스는 수많은 영애의 유혹을 받았지만, 단 한 번도 이처럼 강렬한 끌림과 사랑스러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건 비단 그녀가 아름답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혜롭고, 강인한 승리의 여신이었다. 수세에 몰리거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닥쳐도 또 다른 전략을 짜내어서 어떻게든 역전극을 펼치는 전술의 대가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강렬하게, 더 강렬하게 그녀를 원했다.
제데이아도, 질리언도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율리시스는 완전히 그녀를 제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휩싸였다.
보고 싶고, 안고 싶고, 또다시 입을 맞추고 싶었다. 지금 당장 달려갈까 싶다가도, 이 모든 문제를 해결조차 하지 못한 채로 나타나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참을 계획이었다. 그러고선 꼭 가장 먼저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으리라.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 강한 여자가 잠시라도 제 품 안에서 숨 쉬게 하리라. 그렇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