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연회는 말 그대로 어지럽게 끝이 났다. 예비 왕자비에게 무례를 저지른 가문에 대한 처벌은 이후에 콘티노국의 반응에 따른다고 했다.
예비 왕자비.
그 말에 연회장은 정말로 혼돈에 빠졌다.
엘리아나 로즈가 예비 왕자비였다니……. 그렇게 보면 그녀의 행동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이곳에서 가문 하나하나를 맞이한 것은 예비 왕자비로서 그녀가 해야 할 일을 한 것이었다. 그녀로서는 마땅히 자신의 본분을 다했으나 아테르 가문을 필두로 연회장에 있던 귀족들은 전부 한마디씩 얹어 가며 그녀를 모욕했다.
그때는 그녀가 예비 왕자비라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다들 발등에 불똥이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콘티노국에서 아량을 베풀 리 없었다. 국빈 대우를 이렇게 참혹하게 했으니, 마땅히 화를 내는 것이 외교상으로도 알맞은 대처였다.
연회가 끝나자마자 각 가문은 시무스 부인에게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엘리아나에게 서신을 보내는 것은 너무 노골적이었다. 그러니 그녀와 절친한 시무스 부인을 살살 달래서 어떻게든 자신들에게 미칠 여파를 줄여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콘티노 대표단은 이런 상황을 먼저 예상해 둔 터였다. 시무스 부인은 일찌감치 숙소의 문을 걸어 잠그고선 잠이 들었다. 서신도 모두 돌려보내졌고, 연회에 참석했던 귀족 가문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엘리아나는 잠들지 않고 오늘 참석했던 콘테르 귀족 중 아테르 가문에게 휩쓸리지 않았던 이들을 정리했다.
노튼 가문과 블랙 가문 외에도 네 군데 정도 되는 가문들이 엘리아나를 욕보이는 데 동참하지 않았다. 외려 엘리아나를 욕하는 데 동조하는 주변 사람들에 대해 불쾌함을 드러내기도 했었다.
이들은 콘티노에도 우호적일 가능성이 컸으며, 핵심 교역의 대상으로 삼아도 될 법한 명문가들이기도 했다. 물론, 율리시스에게도 든든한 편이 되어 줄 것이었다.
엘리아나가 정리한 가문들의 정보를 문서로 조금 더 살피는데 창문에서 ‘똑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아나는 화들짝 놀랐다. 창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릴 리가 없었다. 엘리아나의 숙소는 3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겉옷을 한 겹 더 걸치고선 커튼을 열었다. 테라스에는 율리시스가 앉아 있었다. 엘리아나는 깜짝 놀라선 양문형 창문을 활짝 열었다.
“율리시스!”
“쉬이.”
율리시스는 얼굴에 약간의 흙이 묻어 있었다. 발치에 있는 밧줄을 보니 여기에 올라오려고 줄을 탄 모양이었다. 여러 번 넘어지기도 한 듯했으나, 집중하고 있던 엘리아나는 듣지 못했던 터였다.
“이게 무슨 꼴이에요.”
“그러니까요. 누가 엘리아나의 숙소를 3층으로 잡은 건지… 잡아서 혼내야겠어요.”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엘리아나는 책상 위에 있던 손수건을 가지러 가면서 말했다. 율리시스는 밖에 대고 손을 탈탈 털고선 안으로 들어왔다.
“몇 번 구르긴 했지만, 멀쩡해요. 스승님이 낙법 하나는 제대로 가르쳐 주셨거든요.”
“자랑할 정신이 있다니 놀랍네요.”
엘리아나는 피식 웃으면서 율리시스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묻은 지 얼마 안 된 흙들은 금세 닦였고, 말간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연회장은 어떻게 정리됐어요?”
“예상한 대로에요.”
“우리 쪽도 예상한 대로였어요. 시무스 부인에게 서신이 열 통이 넘게 도착했었어요. 모두 돌려보냈고요.”
“얄팍한 사람들. 집에 도착하자마자 편지부터 썼나 보군요.”
“그중에 아테르 가문은 아쉽게도 없었지만요.”
“아테르의 콧대는 정말 높거든요. 상황을 점점 몰아가야죠. 오늘 엘리아나가 잘해 준 덕분에 우리한테는 유리한 상황이에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에요. 하나 그것 때문에 이 밤에 여기까지 몰래 올라오시진 않았을 테고요?”
엘리아나는 흙이 묻은 손수건을 접어서 책상 위에 툭 올려 두었다. 그러고선 비스듬히 고개를 꺾어 율리시스를 보았다. 율리시스는 입을 삐죽 내밀더니 말을 이었다.
“시무스 부인이 나 몰래 엘리아나에게 다른 사람을 소개해 줄까 봐요. 콘테르 남자의 매력을 아직 다 보여 주지도 못했는데 말이에요.”
“소개해 주면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모르는 거죠. 난 아직 엘리아나에게 답을 받지 못했으니까요. 점수도 못 챙긴 것 같고…….”
율리시스는 불쌍하지 않냐는 듯이 눈썹을 아래로 내리고선 말을 이었다. 그러나 엘리아나의 눈에는 오히려 영리한 여우 같아 보일 뿐이었다. 그래도 밉지 않은 건, 그의 옷에 남아 있는 흙 자국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제 막 이 왕국을 이어받을 후계자가 된 사람이었다. 어떤 영애에게 청혼하더라도 답을 망설이는 사람이 없을 것이었다.
“왜 말이 없어요?”
율리시스는 한껏 애처로운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엘리아나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제 갓 왕국의 후계자가 된 사람이 하는 말이라서 그런지 애석하게도 불쌍함은 못 느끼겠는데요.”
“한 남자의 애절한 마음으로 헤아려 달라고요.”
“그러기엔 우리는 다소 정치적인 관계에요.”
이 일이 끝나고 엘리아나는 어떤 행보를 보여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히아신스 아테르의 말은 틀린 점이 없었다. 율리시스와 잘되더라도 자신의 전 결혼 생활에 관한 이야기가 구설에 오르내릴 것이었다. 귀족 가문들이야 오늘의 사건을 빌미로 망신을 주면 되지만, 더 중요한 건 평민들이었다.
율리시스는 다수의 지지를 얻는 왕이 되어야 했다. 민심은 곧 왕의 권력과도 같았다. 그것이 불안정하면 왕은 어떤 것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외국 출신의, 반역 가문에 시집을 갔었던, 문란한 여성이 왕비가 된다.
그것만으로도 율리시스의 명성에 흠집이 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그 자리에서 곧장 반격했었던 것처럼, 엘리아나는 자신을 헌터 가문에 소속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숙하지 못한 소문들을 일부러 퍼뜨렸던 과거를 후회하지도 않았다.
그건 그때 자신이 할 수 있었던 제일 나은 선택들이었고, 그것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선택의 기회가 온다고 해도 엘리아나는 망설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 무엇보다도 로즈 가문을 일으키는 것이 그녀에게는 우선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제 그 꿈을 이룬 뒤, 엘리아나 로즈 개인의 삶으로 돌아오니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있었다.
제가 가장 관심이 있는 율리시스 밀과의 교제부터 말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혹시 히아신스 아테르가 한 말을 마음에 담은 건 아니죠? 그건 다 헛소리니까 무시해요.”
율리시스는 엘리아나가 그 자리에서 상처받지 못하도록 해야 하지 않았냐는 두 남자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모욕적인 상황을 정치적으로 사용하기로 결정 내린 것은 그녀였지만, 율리시스는 책임을 느꼈다.
자신이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 여자였다.
그렇다면 최소한 더 적극적으로 굴었어도 되는 게 아닌가. 아테르 가문의 기를 누르는 건 그다음이었어도 되는 게 아닐까. 율리시스는 그 상황에서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콘테르 국왕이 만족하고, 애덤 노튼은 쌤통이라면서 낄낄대고, 모두가 좋아하는 와중에도 말이다. 여기서 자신이 고려하지 않은 건 ‘엘리아나 로즈’ 한 명뿐이었다.
장난스럽게 말을 주고받다가 약간 생각에 잠긴 듯한 엘리아나의 얼굴을 보자마자, 율리시스는 감정이 울컥 치고 올라왔다.
“다음에는 절대 그대를 상처받게 두지 않을게요.”
“글쎄요. 아테르 가문에 다음 기회라는 게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콘티노는 생각보다 강하게 반응하려고 하고 있어요. 국가 차원에서 외국인을 배척하고 보는 아테르 가문은 곤란한 존재니까요.”
엘리아나는 율리시스가 떠난 후에 나눴던 얘기들을 전해 주었다. 율리시스 역시 강경한 반응을 원했다. 그러나 그런 정치적인 얘기 뒤에 숨어서 받은 상처를 숨기려는 엘리아나를 원하진 않았다.
율리시스는 엘리아나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그런 얘기가 아니에요. 이제부터는 그대의 올리버로서, 절대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뜻이에요. 그것이 설사 정치적으로 옳지 않은 판단일지라도.”
“후계자로서 적절하지 못한 말이네요.”
“그대의 남자로서는요?”
엘리아나가 가만히 미소만 짓자, 율리시스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어떤가요?”
율리시스의 구애는 늘 그렇듯이 직설적이었다. 뜨거운 마음을 감출 생각이 없다는 듯이 말이다. 엘리아나는 부드럽게 율리시스의 뺨을 감싸 쥐었다.
“나와 함께한다면 생각보다 많은 걸 잃게 될지도 몰라요.”
“하지만 내가 갖게 된 모든 것은 그대 없이 얻지 못했을 것들이죠. 왕좌도, 이 나라도.”
율리시스가 고개를 돌려서 그녀의 손바닥에 짧게 입을 맞췄다. 엘리아나는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황금색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자신이 걱정했던 게 무색할 만큼 이 남자는 사랑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제 마음을 샅샅이 내비치고, 보여 주면서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와 다름이 없었다.
사랑스러워.
엘리아나는 자신의 마음속에 드는 감정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 자신이 이룬 업적도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해낸 일이었다. 모든 것을 걸고.
그렇다면 앞으로도 해낼 수 있는 게 아닐까.
정치와 외교, 학문과 사교 그리고 민심.
그 모든 것을 가장 제대로 해 볼 수 있는 자리에 있는 남자가 제게 닿아 있었다. 엘리아나 로즈는 손가락을 구부려 그의 날카로운 턱 끝을 간지럽혔다.
사자 같기도 하고, 고양이 같기도 한 노란 눈동자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은 길고 짙었다.
“엘리아나.”
“네.”
“키스해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