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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107/121)

106화

“같은 편끼리는 정보 공유가 생명인 거 모르오?”

엘리아나의 설명을 들은 질리언은 불같이 화를 냈다. 정말로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무시하던 그 시선들과 목소리에 질리언은 아테르 공작은 물론이거니와, 콘테르 왕국의 후계자인 율리시스도 진탕 팰 뻔했다. 엘리아나는 부채를 접으면서 말을 이었다.

“나도 그쪽에서 그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어요. 이때다 싶어서 쫙 당긴 거지. 원래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이 없었다고요.”

“하지만 엘리아나 영애가 잘못한 건 맞습니다.”

제데이아도 굳은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엘리아나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두 분이 제게 화를 내 주는 게 나쁘지만은 않군요. 거기서 받았던 상처들이 다 낫는 기분이에요.”

“엘리아나.”

“역시 남자는 콘티노 남자가 아니겠어요, 엘리아나?”

시무스 부인이 익살스럽게 말하자, 엘리아나가 웃었다.

“그럴지도요.”

엘리아나가 그렇게 대답하자, 문이 열렸다. 율리시스는 서운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다가왔다.

“국적으로 사람을 나누는 건 비겁한 일입니다. 비비안 공주께서는 분명 의견이 다를 겁니다.”

율리시스였다. 그는 콘테르 왕국의 귀족 가문과 약혼한 비비안 공주의 힘을 빌리려는 모양이었다. 비비안 공주는 웃으면서 말을 아꼈지만 말이다.

“쳇, 아까는 제대로 돕지도 못했던 양반이 등장하셨군.”

질리언이 투덜거렸다. 율리시스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을 이었다.

“저도 이 입을 놀리지 못해서 얼마나 아쉬웠는지 몰라요. 하지만 엘리아나의 계획을 방해할 수는 없으니까요. 폐하께서 엘리아나의 실력을 제대로 보고 싶어 하시기도 했고요.”

“콘테르 왕국에 개인적으로는 실망이 큽니다. 여인의 마음에 상처를 줘 가면서까지 국정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시다니요. 이것은 상황이 정리된 후에 반드시 사과하셔야 할 문제입니다.”

제데이아는 단단히 성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율리시스의 눈은 가늘어졌다. 두 남자가 화가 난 모습이 그리 기분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제데이아는 웬만하면 말을 얹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건 앞으로도 계속해서 엘리아나와 관련된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겠다는 선전 포고 같았다.

정작 엘리아나는 그 상황이 재밌다는 듯이 관전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잠시 적막이 찾아오자, 엘리아나가 말을 이었다.

“아테르 가문의 위세가 줄어들면, 콘티노에도 적지 않은 영향이 갈 거예요. 처음엔 조금 눈치를 보겠지만 시무스 부인을 무시했던 사람들의 태도도 달라질 것이고요. 교역에 조금 더 원활함을 주고, 콘티노의 위상을 높일 수 있다면……. 오늘은 의미 있는 날이 되겠죠.”

“아마 그렇게 될 겁니다. 여태껏 엘리아나가 한 말 중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제데이아 경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짜릿한 거 알아요? 영 내 편이 아닐 것 같은 사람이 내 편이 된 것 같달까.”

엘리아나가 푸흐흐 웃자, 시무스 부인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처음엔 우리도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었죠. 제데이아 경은 더 살벌했잖아요. 테네브 부인도 접근하지 말라고 했다가, 이제는 남편감으로 고려해 봐 달라고도 하고 말이에요.”

율리시스의 얼굴이 천천히 굳었다. 남편감? 매우 불쾌한 말이었다. 심지어 제데이아는 딱히 부정하지도 않았다. 엘리아나는 못다 한 파티를 즐기는 이 자리에서 샴페인을 마시면서 웃고 있었고 말이다.

“그런가 하면 처음부터 우호적이었던 사람도 있지 않겠어요? 그런 사람이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죠.”

율리시스는 화를 억누르면서 말했다. 그러자 시무스 부인이 맞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맞아요. 질리언 경은 처음부터 엘리아나의 편이 되어 주었죠. 둘이 가깝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전 질리언 경과 엘리아나 양이 열렬한 사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엘리아나는 못 말린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나 질리언도 입술을 움찔거릴 뿐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 두 남자는 꼭 엘리아나를 향한 자신들의 마음을 뱉을 듯 뱉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율리시스는 화가 났다. 자신이 견제하고 있던 남자들이 엘리아나에게 노골적인 애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엘리아나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냥 넘어가고 있었다. 마치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율리시스는 시계를 보았다. 이제 돌아가 봐야 할 시간이었다. 노튼이 혼자 시간을 끄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도저히 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여기 있는 콘티노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적 같았다.

특히나 시무스 부인과 비비안 공주는 엘리아나를 설득해서 다른 사람과 데이트라도 하게 할 것 같았다. 취기가 살짝 돌고 있는 밤이었다. 엘리아나와 누군가 입을 맞춘다고 해도 자신이 알 수 없다면? 그것은 끔찍했다.

율리시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엘리아나에게 다가갔다. 그러고선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오늘의 악몽 같았던 이야기들이 그대의 귀에서 스치는 바람처럼 흘러 나가 버렸기를.”

“왕자님의 바람처럼 흐르기를 바랄게요.”

엘리아나의 말에 율리시스는 작게 웃고선 결국 자리를 떴다.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율리시스가 떠나자, 질리언이 먼저 투덜거렸다.

“애덤 노튼 녀석도 그렇더니, 콘테르국에서는 느끼한 말 강습이라도 따로 하는 모양이오. 영 느글거려서 참을 수가 없군.”

“확실히 사람들이 솔직하고 담백한 부분은 없어 보입니다.”

“어머, 웬일이야. 두 사람이 마음이 맞을 때가 다 있어요?”

시무스 부인이 깔깔거리면서 웃자, 질리언과 제데이아의 뺨이 붉어졌다. 엘리아나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엘리아나 로즈 영애는 국빈이었소. 그것도 콘티노에서 우리의 테르어를 전파하고 있는 학자의 가문이오. 영애는 우리의 초대에 응했을 때, 이곳에 참석할 모든 귀족들에 대해 속속들이 공부하고 왔다고 들었소. 그것은 여기서 영애의 환대를 받았던 모든 가문이 알 것이라고 생각하오.”

“…….”

“그러나 경들의 태도가 영애의 우아함에 걸맞았는지는 의심스럽구려. 오늘 일이 외교상의 큰 문제가 되었을 때,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 가문이 있을 것임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오.”

연회를 개회하기 위해서 도착한 콘테르 국왕은 언짢은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아테르 공작은 그 책임이 자신들의 것이 될 것임을 알았다.

‘아뿔싸, 덫에 걸렸어. 덫에 걸린 거야.’

콘테르 국왕의 성정상 웬만하면 주요 가문만 불러서 따로 상황의 긴급함을 논의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선포하듯이 말하는 것은 앞으로 아테르 가문의 위세를 대대적으로 줄이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아테르 공작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가서 말을 이었다.

“폐하. 제 여식의 발언이 지나쳤다고는 하나, 영애께서 마치 율리시스 전하의 아내가 된 것처럼 이곳을 누볐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에 대한 지적이 없었다면 어느 가문이든지 오해할 소지가 분명했습니다. 이는 외국인으로서 먼저 예를 어긴 것입니다. 국빈이라고 할지라도 왕실에 누가 되는 행태는 지엄하게 다스려야 하는 법입니다.”

아테르 공작의 뱀 같은 혀는 이 위기를 빠져나갈 구멍을 향해서 잽싸게 움직였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동의할 만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나오자마자, 율리시스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폐하, 제가 그 사실을 밝혀도 될는지요.”

“그리하라.”

‘그 사실’이라는 말에 아테르 공작이 눈치를 보았다. 율리시스는 참담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진정으로 오늘 영애께서 먼저 연회장에 와 각 가문을 차례대로 맞이하신 이유를 모르시겠습니까? 저와 비슷한 의복을 입은 이유도요?”

“…….”

“오늘 저는 이 자리에서 콘테르 왕국의 정식 후계자로서 청혼할 예정이었습니다.”

율리시스의 말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율리시스는 참담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히아신스 영애께서 내뱉으신 말들은 제게 청혼받기 위해서 이곳까지 오신 엘리아나 로즈 영애에 대한 더없는 모욕이었습니다. 그것도 이전의 불행했던 결혼 생활과 반역자의 가문이라는 오명까지 들먹이셨지요.”

“아니. 그런, 그런 것은 미리 말씀을 해 주셨어야…….”

“그런 것이 아니라면 누가 후계자의 증표를 책봉식에서 전달해 준단 말입니까. 저는 굳이 말로 전하지 않아도 행동으로 보여 준 것들을 현명하게 이해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오늘 보인 무례는.”

“…….”

“앞으로 외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저의 혼인을 장담할 수 없게 한,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율리시스는 매우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실제로 프러포즈에 대한 계획은 없었다. 하지만 아테르 가문에서 이러한 점들을 걸고넘어졌을 때, 외교적으로 더 큰 사안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와 같은 얘기를 지어 내자고는 이미 논의가 끝난 상태였다. 콘티노 왕실에서도 알고 있는 얘기였다.

율리시스 입장에서는 손해 볼 일이 아니었다. 이후에 엘리아나의 마음을 얻어서 결혼하게 된다면, 이 난관을 뚫고 결혼에 성공한 커플이 되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아테르 가문과 여타 가문의 방해로 국혼이 어그러진 것으로 처리하면 되었다. 엘리아나 역시 재밌는 발상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율리시스 역시 연기력이라면 엘리아나에 못지않을 정도로 좋았다. 지켜보던 애덤 노튼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어쭈? 눈물이라도 흘리시겠는걸? 아주 아테르 가문을 짓뭉개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은 게로군.’

노튼 가문으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재상의 가문으로서 세금 문제로 번번이 아테르 가문과 마찰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테르 가문은 나라 살림에는 도움이 되지 않고 매사 자신들의 배만 불리려는 사람들이었다.

‘이번 기회에 아주 뿌리 뽑아 보라고, 율리시스.’

노튼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애덤 노튼 또한 사교계에서 유명한 연기자였다. 그는 한숨을 길게 내뱉으면서 마른세수하였다. 장내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더 이상 누구도 변명을 내뱉지 못할 만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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