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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106/121)

105화

엘리아나의 말에 연회장은 정적이 맴돌았다. 작게 울려 퍼지던 연주도 멈췄다. 엘리아나는 화가 나서 빨개진 아테르 공작의 얼굴을 보다가 히아신스에게로 고개를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이해를 못 하신 것 같으니 설명해 드리죠. 첫째, 저는 반역자 카르만 헌터 남작의 전 부인인 엘리아나 로즈 헌터가 아니라, 공신인 로즈 가문의 엘리아나 로즈로 이곳에 참석했습니다. 콘티노 국왕께선 저희 가문에 자작의 작위를 하사하셨고, 콘테르 국왕께선 직접 서신을 보내 저를 초대해 주셨죠.”

“…….”

“그러나 영애는 제게 반역자의 가문을 언급했습니다. 그것은 두 왕국이 인정한 로즈 가문의 공적을 비하하는 것이 아닌가요?”

“영애, 그것은…….”

“둘째. 공작께선 그런 영애의 말을 듣고 제게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콘테르 왕국의 명문 가문인 아테르의 생각이 영애의 생각과 같다는 뜻이겠지요. 그것에 많은 가문이 동조했습니다.”

“…….”

“저는 이 연회장의 한가운데에서 비웃음을 받았고요. 제게 날 선 말을 내뱉었던 분들은 제가 한 분 한 분 인사드렸던 분들입니다. 제가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으시겠죠? 저는 그렇게 멍청한 편이 아닙니다.”

엘리아나 로즈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우아했다. 하지만 그 말에는 칼이 담겨있었다. 자신을 향해 순간 쏟아졌던 칼날들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셋째, 율리시스 왕자님의 의상 제작을 맡은 것은 로즈 가문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의복의 디자인과 색이 비슷한 것은 같은 디자이너의 손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묻지 않고, 저를 왕자비 흉내나 내는 외국인으로 취급하신 것은 아주 성급하신 판단이었습니다.”

“영애, 그만하시오. 지금 여기는 싸움터가 아니오.”

아테르 공작은 그녀가 말을 내뱉을수록 수세에 몰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점잖은 척 중재하려고 했다. 하지만 엘리아나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넷째. 방금 아테르 공작님의 말은 틀렸습니다. 영애들과 부인들에게 사교계는 전쟁터. 그야말로 살고 죽고가 결정되죠. 듣자 하니 콘테르의 귀족 부인들 사이에서 저를 ‘헌것’이라고 표현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더군요.”

“어머나.”

“어떻게 그걸…….”

“그렇게 닫힌 마음을 가진 분들께도 제가 열린 마음으로 다가간 것은 콘티노 왕국의 대표단으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교는 여자들에게는 외교니까요. 그러나 오늘 저는.”

엘리아나는 연회장을 다시 한 바퀴 돌아보았다. 그러고선 잠시 치마를 들어서 인사를 해 보이고선 말을 이었다.

“이 콘테르 왕국의 무례에 상처를 입고 돌아갑니다. 오늘 주신 상처는 콘티노 왕국까지 잘 가지고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절대.”

“…….”

“잊지 않을게요.”

엘리아나 로즈는 우아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아테르 공작을 지나쳐서 연회장 출구가 위치한 계단으로 향했다. 연회가 시작되기도 전이었다. 그것을 모두 지켜보던 율리시스가 천천히 다가가 엘리아나를 불렀다.

“엘리아나 로즈 영애.”

“네, 왕자님.”

“콘테르의 무례를 내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이 자리를 함께해 주지 않겠습니까?”

율리시스의 말에 사람들은 모두 얼어붙었다. 오늘 정식 후계자가 된 율리시스가 엘리아나의 말이 모두 옳다고 인정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제대로 짜고 쇼를 하는군. 율리시스 왕자가 붙잡았으니 이제 못 이기는 척 돌아서겠지. 그래 놓고 연회를 실컷 즐길 거야. 그래. 어디 그래 보라고. 아테르 가문에 침을 뱉은 것을 후회하게 해 줄 테니까.’

히아신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엘리아나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아뇨, 왕자님. 저는 이제 사과는 필요 없어졌습니다. 제가 네 가지의 실수를 말하며 장광설을 늘어놓을 동안, 저는 그만하라는 말 외에는 제게 실수한 이들에게 사과를 듣지 못했습니다.”

“나의 첫 춤은 그대에게만 허락하는 걸 알고 있지 않습니까.”

율리시스가 다정하게 말했다. 그것은 외교적인 문제를 우려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가 상처받은 것을 우려하는 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엘리아나는 미소 지은 채로 다른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무리에서 한 사람이 움직였다. 다름 아닌 비비안 공주였다.

“올랜도의 얼굴을 봐서 참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겠군요. 친애하는 왕자님, 그리고 콘테르의 귀한 분들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저희 콘티노 대표단은 오늘 연회를 떠나겠습니다. 엘리아나 영애가 이렇게까지 노력했건만, 이렇게도 저희를 욕보이시다니…….”

“…….”

“실례를 용서하세요, 왕자님.”

왕실끼리의 담화를 위해 보우턴 왕자가 참석하지 않은 연회에서 콘티노 대표단의 가장 큰 결정권은 비비안 공주에게 있었다. 그녀가 움직이자, 시무스 부인을 필두로 모든 콘티노인들이 굳은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모두들 이전까지는 화사하게 웃으면서 친교를 나누고 있던 이들이었다.

‘아니야. 이게 뭔데, 이건……. 이건 아니라고!’

히아신스의 용기 있는 지적은 외교적인 문제로 번지고 말았다. 엘리아나는 비비안 공주가 곁으로 오자 고개를 숙여 말을 이었다.

“공주님, 죄송합니다. 제가 대표단에 오는 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영애,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폐하께서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비비안 공주는 엘리아나의 팔을 붙잡고선 계단을 올랐다. 누구도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율리시스는 자신이 선물한 구두를 신고 나가는 엘리아나의 뒷모습을 보았다. 애틋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사실은 그는 웃음을 참기 위해서 필사의 노력을 하고 있었다.

‘아테르 가문의 입지를 줄여 달라는 폐하의 요청을 이렇게 손쉽게 해내다니…….’

율리시스는 콘티노 대표단이 모두 나간 뒤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표정 관리를 하면서 몸을 돌렸다.

“이 문제는 어떻게든 잘 해결해 보겠습니다. 일단 저는 폐하를 뵙고 올 테니, 여러분은 준비된 연회를 즐기도록 하세요.”

“…….”

“노튼 공작.”

“네, 전하.”

“연회장을 부탁합니다. 폐하께 이 상황을 미리 전달해 드려야겠어요. 콘티노 대표단이 모두 사라진 걸 아시면…….”

“…….”

“몹시 불쾌해하실 테니까요.”

율리시스의 말에 아테르 공작은 침묵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이 모든 죄를 아테르 가문이 뒤집어쓰게 될지도 몰랐다.

“전하.”

“…….”

“아직 어린 히아신스가 나라를 생각하여 내뱉은 한마디를 이렇게까지 곡해하여 외교 문제로 만들다니요. 이것은 엘리아나 로즈 영애의 큰 잘못입니다.”

“공작.”

“네.”

“엘리아나 영애가 히아신스 영애에게 헨리우스 형님의 파혼녀라고 얘기했다면…….”

“……!!”

“공작이 아니라, 저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콘테르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

“아테르에서는 그 발언을 엘리아나 로즈 영애에게 한 것입니다. 콘티노를 비롯한 수많은 타국 대표단이 참석해 있는 이곳에서. 여기 계신 많은 명문 가문과 함께 말입니다.”

율리시스는 단단히 화가 났다는 어조로 말을 하고선 홱 연회장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애덤 노튼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주위를 살피다가 악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연주를 다시 시작하시오. 연회가 취소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왕자님의 책봉식 기념 연회이니, 최대한 문제가 커지지 않게 해결하고 오실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노튼 공작은 주변 귀족들에게 그렇게 말하고선 다급하게 율리시스를 따라나섰다. 음악이 다시 시작되었지만, 누구도 몸을 움직이지도, 수다를 시작하지도 않았다.

연회장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살얼음판과 같았다.

***

“크크큭… 아하하!”

시무스 부인이 마차에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선 배를 잡고 웃었다. 히아신스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선했기 때문이었다. 엘리아나는 물 한잔을 깔끔하게 비우고 후, 하고 숨을 내뱉고선 비비안 공주를 보았다.

“이 정도면 콘테르 국왕의 요청을 충실히 들어준 셈이겠죠?”

“네. 어떻게 아테르 가문을 몰고 갈까 싶었는데, 역시 엘리아나 양은 대단하군요.”

“히아신스 영애가 뭣도 모르고 엘리아나 영애를 잘도 건든 거죠. 그런데 준비라도 한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유창하게 말을 내뱉을 수 있어요?”

엘리아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열받게 하잖아요.”

“하하하!”

시무스 부인은 엘리아나의 짧고 굵은 문장에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엘리아나가 감정에 의해서만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자신을 어떻게든 모욕하리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히아신스가 실수하기만을 기다리면서 어떤 말을 내뱉어야 할지도 이미 준비해 둔 상태였다.

이것을 외교 문제까지 부풀리게 된 데는 아테르 공작의 오만이 큰 도움이 되었다. 아무리 엘리아나 로즈라도 이 땅, 콘테르에서만큼은 면박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아무것도 아닌 허수아비 남작 부인일 때도 연회장을 휘어잡았던 여인이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콘티노인들이었다면 오늘 같은 반응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운이 좋았어요. 그렇게 대놓고 제게 적대적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그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비비안 공주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하면서 엘리아나의 손을 잡았다.

“나는 엘리아나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엘리아나는 단단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비비안 공주와 눈을 마주쳤다.

“이 정도의 말에 상처받았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그리고 오늘은 콘티노 왕족께서 저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주셨잖아요. 상처를 받았더라도 흔적 없이 나을 정도였어요.”

엘리아나는 말 한마디로 사람을 들었다가 놓을 수 있는 여자였다. 웃음이 멎은 시무스 부인은 눈물을 닦으면서 말을 이었다.

“하여간 엘리아나가 우리 편이어서 다행이에요.”

“얼른 숙소로 돌아가서 어리둥절하고 있는 남자들에게 이 일을 설명해 주죠.”

“그래요. 질리언 경은 아까 아테르 공작을 한 대 칠 것 같은 분위기였다고요. 무서워라.”

세 여인은 평화롭게 미소 지으면서 콘테르 대표단의 숙소로 향했다. 정적이 흐르는 연회장과는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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