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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105/121)

104화

히아신스는 엘리아나가 뒤늦게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주인공처럼 등장하여 자신과 영애들이 먼저 자리 잡고 있는 곳을 헤치고 다니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콘테르에서 열린 오델리 백작의 연회에서 그렇게 등장하여 모두를 사로잡았다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어림없지.’

히아신스는 무조건 자신이 마지막에 입장해야 한다고 압력을 넣었다. 아테르 집안에서는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아무리 왕실 연회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엘리아나 로즈가 시무스 부인과 함께 가장 먼저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히아신스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초조해했다. 안에 연락을 넣어 볼 사람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율리시스까지 일찍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파티의 주최자나 다름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이 모든 게 짜놓은 것처럼 맞아떨어지니 짜증이 났다.

아니다. 그렇더라도 자신은 마지막 주인공처럼 등장할 것이었다. 히아신스는 자신이 입은 붉은 드레스를 만지작거렸다. 살면서 이렇게 강렬한 빛의 드레스를 입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드레스가 아니라면 엘리아나를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작부 같아 보이진 않나?’

히아신스는 걱정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옷이 어디 있으리. 그리 생각했다.

히아신스는 참고 또 참았다. 모든 초청자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마차에서 내려왔다. 하녀 두 명이 달라붙어서 그녀의 드레스를 만져 주었다. 폭이 넓은 드레스는 히아신스가 좀처럼 입지 않던 스타일이었다.

“드레스가 좀……. 천박한 거 아니니?”

“좀 천박하든, 많이 천박하든 뭐가 중요해요.”

“…….”

“왕비가 되면 그만 아닌가요?”

그녀의 공격적인 대꾸에 타란은 입을 다물었다. 저런 괴물 같은 부분도 자신이 만든 것이었다. 그녀는 당당히 연회장의 문 앞에 섰다. 그러자 문지기가 문을 열고선 안내했다.

“아테르 가문의 타란 아테르 공작과 히아신스 영애입니다!”

크게 퍼진 소리와 함께 히아신스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미소는 곧 일그러졌다. 마치 안주인처럼 중앙에 서서 자신을 맞이하는 엘리아나와 율리시스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옷을 맞춰 입은 부부처럼 보였다.

***

입장 순서를 앞당기자고 했던 것은 시무스 부인의 의견이었다.

―외국인이 안주인 행세를 하는 걸 보여 줘야죠. 입도 뻥끗하지 못하게 해야 해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아마도 지난 연회에서 자신의 행보를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자신이 늦게 도착하리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뒤늦게, 주인공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먼저 터를 잡고 있는다면? 마치 연회의 주최자들처럼 한 명 한 명을 맞이해 준다면?

―난 또 이렇게 재밌는 제안은 못 참아요.

엘리아나의 얼굴에 미소가 퍼지자, 시무스 부인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내가 그래서 엘리아나를 좋아하잖아요?

두 사람은 웃으면서 파티의 시작 시간에 맞춰 연회장에 도착했다. 그러고선 영애들이나 귀족들이 도착하는 족족 먼저 인사를 건넸다.

“토비 자작님, 약혼을 축하드립니다.”

“앗, 벌써 소식이 콘티노에까지 닿았군요. 감사합니다, 엘리아나 영애.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저야말로 뵙고 싶었습니다. 꼭 결혼식 자리가 아닐지라도 언제 한번 초청해 주신다면 기쁜 마음으로 찾아뵐게요.”

“저희 결혼식에도 오실 수 있는 건가요? 어머나, 그럼 너무 기쁠 거예요.”

토비 자작은 약혼녀인 로잘린 영애가 기뻐하는 것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엘리아나는 그렇게 한 명 한 명의 마음을 샀다. 자신이 미리 조사한 귀족들의 근황과 시무스 부인이 전달해 준 정보를 통해서 말이다.

자신을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영애들에게도 밝게 웃으면서 다가가 인사를 건네자, 그녀들도 면전에 대고 침을 뱉진 못했다.

영애들은 웃는 낯으로 엘리아나와 안부를 주고 받았다. 속으로는 히아신스 영애가 언제 올지 가늠하며 눈치를 보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율리시스가 엘리아나가 만들어 준 옷을 입고 나타났을 때였다.

두 사람이 입은 옷은 완전히 같은 원단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컬러와 디자인이 흡사했다. 멀리서 보면 커플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특히나 율리시스가 도착하자마자 엘리아나에게로 향하고, 그녀가 부드럽게 그의 옷깃을 정리해 주자 연회장엔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히아신스가 도착하기도 전에 승패가 결정되어 버린 것 같았다. 물론 엘리아나는 그 이후로 곧장 질리언 자작과 대화하거나, 다른 영애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바빴다. 율리시스도 자신이 만나야 할, 나이가 지긋한 원로들 쪽으로 향해 한 명 한 명 인사를 다녔다.

그러나 그건 마치 부부가 서로 다른 쪽으로 갈라져서 파티에 온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때문에 히아신스가 좀처럼 입지 않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등장했을 때도, 사람들은 환호를 보내기보다는 눈치를 보기 바빴다.

그녀와 친한 영애들은 이미 판도가 뒤집혔다는 걸 어떻게 알려 줘야 하나 싶었고, 다른 귀족들은 갑작스러운 히아신스 영애의 ‘엘리아나 따라 하기’에 약간의 의아함을 보였다. 두 사람의 생김새가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고, 전체적으로 선이 뚜렷한 엘리아나에 비해서 히아신스는 여리여리한 얼굴선을 지니고 있었다. 아무리 화장으로 감추려고 한들 그 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새빨간 드레스는 그녀의 매력을 완전히 삼켜 버린 것만 같았다.

엘리아나는 이제껏 모든 영애에게 그랬듯이 가까이 다가가서 인사를 건넸다.

“아테르 공작님, 히아신스 영애. 반가워요. 콘티노 왕국에서 온 엘리아나 로즈입니다.”

“그 유명한 엘리아나 로즈 양이시로군요.”

아테르 공작은 짐짓 친절한 척 말을 이었다. 엘리아나는 치마를 살짝 들어 인사를 하며 미소로 화답했다. 히아신스의 예상대로 엘리아나의 드레스는 책봉식 때보다 훨씬 화려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왜 율리시스와 옷이 비슷한 거야? 같은 디자이너를 어떻게 찾아낸 거지? 어떻게 저렇게까지 입을 생각을 한 거야? 불경스러워! 악독하고 계략적이야!’

“히아신스 영애는 빨간색이 무척 잘 어울리는군요. 저희 가문에서 하는 모자 사업에도 붉은 장미와 관련된 것들이 많은데, 연회가 끝나고 돌아가면 하나 선물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하지만 너무 요란하진 않게 부탁드려요. 영애를 환영하는 마음에 이렇게까지 입어 보긴 했는데……. 역시나 제 취향은 아닌 것 같아서요.”

아테르 공작은 히아신스와 팔짱을 끼고 있는 팔에 약간 힘을 주었다. 너무 공격적인 말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엘리아나는 조금의 상처도 받지 않았다는 듯이 굴었다.

“각자의 몸에 맞는 옷의 크기가 있듯이, 서로에게 어울리는 옷도 따로 있는 법이니까요. 영애는 오늘 저를 위해서 많은 걸 포기하신 셈이군요. 영광입니다.”

엘리아나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말하고선 물러섰다. 히아신스는 돌아서는 엘리아나의 등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하면 자신이 지는 것이 되었다. 히아신스는 승부욕이 강했고, 율리시스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단 것을 알았다.

‘그녀의 이런 면이 율리시스 왕자를 현혹했다면, 나도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 줄 거야.’

히아신스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서 말을 이었다.

“엘리아나 영애. 아무리 각자의 취향이 있다고 해도, 그 옷차림은 너무한 것 아닌가요? 율리시스 왕자님의 입장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차림 같은데요.”

“…….”

“얼마 전까지 반역자의 가문에 속해 있던 여인과 같은 옷차림이라니……. 콘테르 왕국을 무시하시는 건가요?”

히아신스답지 않은, 공격적인 말투였다. 원래라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입으로 떠들게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엘리아나가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는 호전적인 타입이라면, 자신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스타일을 똑같이 따라한 빨간 드레스처럼 말이다.

엘리아나는 빙글 돌더니 미소를 싹 거뒀다. 아테르 공작은 히아신스를 자신의 뒤로 보내면서 말을 이었다.

“제 여식이 말이 조금 지나쳤습니다만, 틀린 부분은 없기에 따로 사과드리진 않겠습니다.”

아테르 공작이 편을 들어 준 이상 콘테르의 귀족들은 모두 히아신스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콘테르 왕국이었고, 아테르 가문은 큰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마치 이제껏 참아 왔다는 듯이 말을 한마디씩 보탰다.

“하긴 오늘 파티에 제일 일찍 도착해서 마치 이미 왕자비라도 된 듯이 굴었잖아요.”

“외국인이면서 말이에요.”

“오죽하면 저 얌전한 히아신스 영애가 지적했겠어요?”

“그래요. 히아신스 영애가 얼마나 정숙한데요. 너무 건방졌다면 아테르 공작이 분명 바로 잡으셨을 텐데……. 아테르 공작도 이건 아니다 싶으신 거였겠죠.”

엘리아나는 부채로 입을 가린 채로 모두에게 들리게끔 한 소리를 내뱉는 부인들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입가에는 미소를 걸친 채였다.

“이렇게.”

엘리아나 로즈는 아주 느리게 발음하였다.

“저열한 수준인가요, 콘테르에서 이웃 나라의 공신을 대하는 태도는?”

엘리아나의 발음은 우아했다. 하지만 콘테르의 귀족이라면 모두가 발끈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엘리아나는 천천히 그들 모두의 모습을 담겠다는 듯이 한 바퀴를 둘러보고선 아테르 공작과 눈을 마주쳤다.

“아테르 공작님.”

“네, 영애.”

“아무래도 저에게 사과를 해 주셔야겠네요.”

엘리아나의 말에 아테르 공작의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태도였다. 엘리아나는 더 밝게 웃으면서 말을 이어 갔다.

“아니면 히아신스 영애가 해 주실 건가요?”

“영애, 그게 지금 무슨…….”

“그게 아니라면, 저 엘리아나 로즈에 대한 이 콘테르의 무례를.”

“…….”

“누가 대표로 사과해 주실 건가요?”

엘리아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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