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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104/121)

103화

책봉식이 끝난 후, 콘티노 대표단은 함께 모여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뿔뿔이 흩어졌다. 엘리아나는 미리 도착해 있던 시무스 부인의 거처로 향했다. 그녀에게 연회장에서 입을 드레스를 맡겨 뒀던 탓이었다.

“엘리아나! 벌써 소문이 쫙 났어요. 책봉식에서 그 히아신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줬다면서요?!”

“히아신스에겐 접근하지도 않았어요. 율리시스가 맡겨 둔 것을 제때 돌려줬을 뿐이에요.”

“그게 더 통쾌한 거죠! 아우,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에요. 연회장에서는 어떤 옷을 입을 거예요?! 또 베일을 쓸 건 아니죠?!”

“네, 이번엔 대표단과 색을 맞추지 않아도 되니까요. 제 스타일대로 베니와 함께 만들었어요. 초록색 드레스에요.”

“어머나, 엘리아나의 눈 색깔처럼 아름답겠군요.”

“시무스 부인에게 이런 칭찬을 받을 수 있다니, 오델리 백작의 연회 이후로 제가 시간을 제대로 보내긴 한 모양이네요. 기뻐요. 진심으로.”

“그때 얘기는 영원한 내 흑역사가 될 거예요.”

“푸흐흐.”

“나는 일전에 엘리아나가 추천해 준 그 디자이너 샵에서 했어요. 솜씨가 제법 좋더라고요. 아, 그리고 히아신스의 드레스 디자인을 몰래 빼돌렸죠. 한번 볼래요?!”

엘리아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뭐예요. 얼마나 어렵게 입수한 자료인데요!”

“그녀가 무슨 옷을 입든 나를 이길 수는 없어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번에도 또 펜던트 같은 게 나오는 거예요?”

“아뇨.”

“그럼요?”

“그보다 더 잔악무도한 짓을 저질러 버렸죠. 그 엘리아나 로즈가 말이에요.”

엘리아나가 과장되게 말하자, 시무스 부인은 기대가 된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아, 지금 말해 주지 말아요. 나도 연회장에서 같이 놀라고 싶으니까. 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건지 너무 궁금하단 말이죠.”

사실, 엘리아나는 콘테르 왕에게 서신을 하나 받았었다. 이번 대표단에 엘리아나가 오게 되어서 매우 기쁘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편지에는 그것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아테르 가문이 율리시스의 옆자리를 노리고 있으며, 점점 세를 키워 가고 있어 고민이라는 근황도 담겨있었다. 암묵적으로 이들을 눌러 줄 수 있겠냐는 콘테르 왕의 요청이었다. 엘리아나는 그것을 눈치채고선 곧장 율리시스에게 서신을 보냈다.

펜던트에 관한 건이 왕실로부터 허락을 받은 것도 그 이유였다. 견제해야 할 가문은 많았다. 특히나 헨리우스를 지지했던 아테르 가문 같은 경우는 율리시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집안이 아니었다. 국혼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세가 워낙 큰 가문인 만큼 왕실에서 직접적으로 표현을 하는 것은 조심스러웠다. 콘테르 왕실은 몇 년간 계속된 전쟁으로 민심을 잃어 왔고, 이제야 조금씩 신뢰를 되찾는 중이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커다란 명문 가문과의 싸움은 없어야 했다.

이는 콘테르 왕권과 연관된 일임과 동시에 엘리아나 개인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자신을 아무렇게나 씹고 뜯으며 평판을 깎아내리는 이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줘야지 이 사교계에서 자신을 함부로 건드는 자가 없을 것이었다. 과거 시무스 부인의 사건처럼 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엘리아나는 이후에도 히아신스 아테르와 친해질 마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타입은 저도 딱 질색이었다.

엘리아나는 시무스 부인과 통하는 점이 많았지만, 히아신스와는 아니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왕비를 꿈꾸며 자라온 여자인 만큼, 남다른 오만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는 부인도 무시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줄게요.”

“나 좀 신이 나는 것 같은데요?”

시무스 부인은 일어나서 춤이라도 출 기세였다. 엘리아나는 빙긋 웃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계모 엘리아나로 변신하고 올게요.”

“아마 그 모습을 보면 콘테르 왕께서도 뒤집어지실지도 몰라요.”

“시무스 부인도 이번에는 뒤로 안 넘어지도록 조심해야 할 거예요. 단단히 준비했거든요.”

“같은 편이라서 다행이라니까.”

시무스 부인의 말에 엘리아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반은 농담이었지만, 반은 진담이었다. 시무스 부인은 커다란 가방을 꺼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조셰프가 대신 받아 들었다.

“드레스 챙겨와 줘서 고마워요.”

“상단의 짐에 하나 더 얹었을 뿐이에요. 이따, 기대할게요.”

“저도요, 시무스 부인. 그때 봐요.”

짧은 인사를 한 뒤, 엘리아나는 자신이 묵을 곳을 향해 떠났다. 그 가방 안에는 율리시스가 선물한 유리 꽃 구두도 있었다. 이번 연회에서 그때보다 더 빛나게 될.

***

이번 연회에서 율리시스는 의상을 따로 의뢰하지 않았다. 콘테르와 콘티노, 양국을 통틀어 가장 훌륭한 의복사가 자기 옷을 맞춰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름은 엘리아나 로즈였다.

엘리아나 로즈는 서신을 보내 아테르 가문을 누를 방법으로 자신을 이용할 것이라고 했다. 국왕의 요청 때문이었다. 그러나 율리시스의 마음을 흔든 것은 그다음부터였다.

「제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시겠죠?

거짓은 말하지 않을게요.

다만, 저 자신도 몰랐던 감정이라는 걸 알려 드리며,

다분한 사심을 담아…….

―엘리아나 로즈」

율리시스는 그 말에 손끝이 저릿할 정도로 짜릿했다. 하늘로 튀어 오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매일매일, 그녀를 보건 보지 않건 그녀에게 반하고 있었다. 편지로 토해 내고 또 토해 내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꾸만 쌓이는 이 감정을 말이다.

그녀가 자신을 좋아할 수도 있다면…….

그런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없는 게 없었다. 그는 왕의 자리보다 그녀의 남편 자리가 더 탐이 났다. 멍청한 카르만 헌터는 놓쳐 버린 그 자리 말이다.

아테르가 왕실에 위협적인 가문인 것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히아신스가 보이는 자신에 대한 집착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형인 헨리우스를 다른 영애를 시켜 꼬드긴 다음, 파혼을 유도한 것도……. 모두 자신과 이어지기 위함이었다.

자신에게 반했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율리시스가 왕이 될 거라는 어떤 확신이 그녀에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졌으니, 이제 그 욕심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날 것이었다.

아테르 가문은 어떻게든 왕비를 배출하고 싶어 했으니 말이다.

현재의 국왕은 율리시스가 엘리아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으므로, 큰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국왕은 이번을 계기로 엘리아나 로즈의 실력을 눈으로 보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 같았다. 일단은 책봉식에서 보통 여자가 아니라는 건 알게 된 듯했다. 왕비는 흡족해했으나, 왕은 조금 더 그녀의 실력을 보고 싶어 했다. 사교계를 잡고 흔들어서 전쟁의 판도를 뒤집어엎은 여인의 진가를 말이다.

이쯤 되면 순수한 궁금증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율리시스는 이번까지만 두고 볼 생각이었다. 엘리아나에게 제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고, 응답까지 받고 난 이후에는 이런 궁금증은 제 쪽에서 미리 차단할 것이었다.

하나 율리시스도 보여 주고 싶었다. 자신이 사랑에 빠지게 된 여인이 얼마나 영특하고, 뛰어나며 또한 아름다운지…….

“못 알아채면 뭐 바보나 다름없지.”

율리시스는 미소를 얼굴 가득 지은 채로 그녀를 만나게 될 연회를 고대했다. 시간이 자꾸만 더디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

“영애, 정말 아름다우세요.”

엘리아나가 옷 입는 것을 도와주던 왕실의 하녀는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코르셋을 조이면서도 이렇게 힘을 안 준 적은 처음이라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엘리아나와 베니가 실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한 초록색 드레스는 환상에 가까웠다.

마치 요정의 숲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아름다웠다. 네모난 목둘레선을 반투명한 프릴을 수없이 덧붙여서 감싸고, 가슴골이 시작되는 곳에는 단정한 리본으로 마무리 지었다.

머리는 그렇게 높지 않게 올렸지만, 일부를 오른쪽으로 내려서 긴 목선이 도드라지도록 했다. 머리엔 리본을 겹쳐서 흰 장미 모양으로 만든 장식품이 올라갔다. 머리띠를 대신하여 늘어뜨린 넝쿨 모양의 장식물은 그녀 자체를 꽃처럼 표현한 것이었다.

목에는 초록색 레이스로 꾸민 리본을 묶고 끝이 뒤로 짧지 않게 떨어지도록 했다. 발목에는 에메랄드로 만든 긴 팔찌를 감았다. 발목이 워낙 가는 탓에 줄이 긴 팔찌는 발목에도 잘 맞았다.

책봉식과 달리 드레스의 겹은 셀 수 없을 만큼 많고, 풍성했다. 그러나 엘리아나에게선 화려함보다는 성스러움이 느껴졌다.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이 모든 차림의 정점을 찍는 것만 같았다.

신비로운 아름다움.

엘리아나가 걷는 걸음마다 풀이 새로 돋아날 것 같았다. 하녀는 이제 칭찬을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엘리아나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떤 영애가 어떤 드레스를 입건 그녀를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

히아신스 아테르는 책봉식이 끝나자마자 드레스 디자인을 바꿨다. 청초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연분홍 드레스에서 조금 더 화려한 것으로 말이다. 이미 서른 벌이 넘는 드레스를 맞춰 놨기 때문에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가 바꾼 드레스는 한 떨기 장미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드레스였다. 붉은 실크 원단 위로 테두리마다 금으로 만든 꽃들이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엘리아나가 유행시킨, 가는 허리와 볼륨감 있는 몸매를 부각시키는 드레스라서 보자마자 치워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만한 무기가 없었다. 그녀는 분명 책봉식과 다른 분위기의 옷을 입을 것이었다,

질 수 없었다.

히아신스는 오자마자 아버지와 말다툼을 했다.

―도대체 뭘 하는 거야! 이대로 왕비 자리를 빼앗길 셈이냐!

―아버지께서 처음부터 제 말만 잘 들어 주셨어도 이런 일은 없었어요!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어. 이제라도 바로잡아야지! 겨우 콘티노 왕국의 별 볼 일 없는 이혼녀에게 그 자리를 빼앗긴다면 우리 아테르의 명성이 어떻게 되겠니!

―제 탓은 이제 그만하세요!

―뭐야?

―아버지는 여태껏 귀가 닳도록 말씀하셨어요. 전 왕비가 될 운명이라고. 그럼 그 약속을 지켜 주세요.

―히아신스!

―죽여서라도 제 자리가 되게 해 달라고요!

히아신스의 외침에 타란은 굳어 버렸다. 그녀는 광기에 휩싸인 것처럼 타란을 노려보았다. 그러곤 서재를 나섰다.

그녀는 진심이었다. 이번에도 이길 수 없다면, 세상에서 없애 버리고 말 것이었다. 왕비가 되기 위해서라면 히아신스는 못 할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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