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히아신스 아테르.
그녀는 율리시스의 약혼녀가 될 뻔했던 여자였다.
그녀는 일찍이 율리시스가 후계자가 되리란 걸 알아보았다. 그녀는 똑똑한 편에 속했고, 도미누스와 헨리우스의 한계를 알았다. 그리고 율리시스가 자신의 재능을 조금밖에 보여 주지 않는다는 것도 말이다.
그는 왕실에서 개최하는 모든 경기에 지루해하는 편이었다. 그는 정식 경기가 시작되면 늘 부러 한 손만 사용했다. 그렇게 해도 안 될 때면 실수를 가장해서라도 졌다. 절대 1등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보 같은 형들은 그것을 모르고 제 아버지인 콘테르 국왕에게 각자의 순위를 뽐낼 뿐이었다. 콘테르 국왕은 바보가 아닌지라, 제 아들 중 누가 제일 뛰어난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히아신스는 그런 것들을 파악하는 눈치가 있었다. 그녀는 왕비가 되고 싶었다. 아테르는 콘테르의 귀족 가문 중 가장 막강한 세를 가진 가문으로서, 왕실과 어떻게든 연을 맺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집안의 분위기가 이러하니, 히아신스 역시 왕실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야망을 어린 시절부터 키워 온 게 당연했다.
히아신스는 즉위하지 못하는 왕자는 싫었다. 그래서 율리시스와 약혼하려 했건만, 아테르 집안에선 율리시스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헨리우스와의 약혼을 강행했다.
결국 그녀는 율리시스가 아닌 헨리우스의 약혼녀가 되었지만, 그것으로 집안과 크게 다퉜다는 것은 이미 귀족들 사이에 소문이 파다하게 난 뒤였다.
그 뒤부터 율리시스의 연인 이야기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히아신스 얘기가 나왔다. 서로가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히아신스는 율리시스 이야기가 나오면 긴 속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잃어버린 첫사랑을 떠올리듯 가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날이 갈수록 확신하고 있었다. 헨리우스가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다른 영애에게 막대한 금화를 쥐여 주고 그를 작정하고 꼬시게 해서 파혼에 이르게 했다.
그렇게 하면 율리시스와 다시 이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율리시스는 왕실에서 상대자를 정해 준 정략결혼을 거부했다. 히아신스는 필사적으로 그의 눈에 들려고 노력했다. 그의 하루 일정을 모조리 미리 알아 내고선 우연을 가장해 부딪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매번 정해진 일정대로 살지 않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엄격한 법도에 얽매어 온 히아신스에게는 더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그녀는 율리시스가 갖고 싶었다. 눈부신 금발과 아름다운 얼굴, 다부진 몸과 뛰어난 재능…….
그리고 이제는 정식 후계자까지 되었다. 콘테르국의 귀족 영애 중 자신만큼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히아신스는 그 이름의 꽃처럼 하얗고, 가녀린 여자였다. 백금발에 가까운 머리카락은 그녀를 더 신비롭게 보이게 했다.
히아신스는 자신이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율리시스를 제대로 꼬실 자신이 말이다. 그런데 복병이 나타났다.
웬 이혼녀였다.
“이름이 뭐라고?”
히아신스는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나이가 지긋한 시녀장인 베버라 부인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엘리아나 로즈라고 합니다. 콘티노국 사교계에서는 유명한 여자라고 하더군요. 난잡한 소문이 많은데, 그 자리에서 홀리지 못하는 남자가 없다고 합니다. 이번 콘티노 왕국 연회에서 왕자님이 처음 춤을 춘 상대이고, 그때 유리 꽃 구두를 신고 있었다고 합니다.”
히아신스는 율리시스가 심혈을 기울여 주문하고 여러 번 수정 요청을 하여서 만든 구두의 주인을 궁금해했다. 그가 여성을 위한 선물을 그렇게 공들여 준비하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이미 결혼을 한 번 한 적 있는, 난잡한 여인이라니…….
“승산이 있겠어. 그녀와 나의 매력은 분명 다르니까. 적어도 국왕께서는 알아보시겠지. 누가 콘테르의 왕실에 더 잘 어울리는지.”
“…….”
베버라 부인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보기에 이미 승기는 엘리아나 로즈에게 기울었다. 그녀는 안 좋은 소문이 많았지만, 그만큼 좋은 소문도 많았다. 똑똑하기가 웬만한 왕실 관료보다 나았고, 아름다운 외모와 육감적인 몸매는 말할 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여자 보기를 길가의 풀꽃 보듯이 하던 율리시스 밀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던가.
그런 생각을 알 리 없는 히아신스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면서 이리저리 얼굴을 돌려 보았다.
아름다웠다. 너무도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이 얼굴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청초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전형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어려서부터 왕실의 일가가 되기 위해서 공부해 왔고, 지적인 부분에서는 모자라지 않았다.
히아신스는 엘리아나 로즈를 잘 몰랐다. 그저 어떻게 처세술을 잘 부려서 한몫을 단단히 당긴 졸부 귀족의 느낌밖에는 없었다. 200년이 넘는 전통의 아테르 집안과는 다르다. 자신들은 명문이었다.
“책봉식 이후에 연회가 열리면, 단단히 기선 제압해야겠어.”
“다른 영애분들께 미리 연락을 드릴까요?”
“응. 다과회에 초대해 줘. 모두 내 편이겠지만, 미리 한 번씩 점검해 두는 게 좋겠어. 선물로 줄 귀걸이도 각자의 취향에 맞게 준비해 줘.”
“네, 알겠습니다.”
히아신스는 늘 예비 왕비처럼 행동했다. 우아하고 격조 있게, 뭘 하든 먼저 제 편을 확보하고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면서 살살 꼬드겼다. 그렇게 해 놓으면 자기들끼리 알아서 히아신스의 적이 되는 사람을 물어뜯고 밟아 놓곤 했다.
그녀는 자기 손에 더러운 흙을 묻히지 않는 방법을 잘 알았다. 그것이 왕실의 가족이 되는 법이라고 배워 왔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그럴 생각이었다.
유리 꽃 구두의 주인은 당연히 자신이 되어야 했다. 이 콘테르 왕국의 왕비도, 눈부시게 아름답고 늠름한 율리시스의 아내도 말이다.
히아신스의 갈색 눈동자가 붉게 반짝였다. 야욕이 그녀를 집어삼킬 듯이 활활 타오르는 느낌이었다.
***
엘리아나 역시 히아신스의 존재를 미리 알고 있었다. 책봉식에 참여하는 가문에 대해서 꼼꼼히 살펴보았기 때문이었다. 가장 신경 쓰이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러나 엘리아나에게는 히아신스가 아닌 아테르 가문 자체가 문제였다. 가장 비옥하고 넓은 영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높은 세금으로 영지민들을 착취하고, 그것으로 배를 불리는 못된 귀족이었다. 그러나 대대로 왕실과 연을 맺어 왔기 때문에 제재의 강도가 약했다.
그런 가문이 이번에는 누구와도 인연을 맺지 못했다. 히아신스 아테르가 헨리우스 밀과 파혼했기 때문이었다. 파혼 사유는 헨리우스에게 있었지만, 세간에선 그녀가 율리시스에게 계속 마음이 있었기에 일을 꾸민 것이라는 소리도 있었다.
엘리아나는 세간의 말을 잘 믿지 않았다. 없는 것도 부풀려지고 꾸며지기 마련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에 대한 소문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히아신스의 야망은 느껴졌다. 그녀의 행동 궤적 때문이었다. 그녀는 율리시스가 방랑하거나, 여행하는 곳을 미리 알아채고 그곳에 이삼일 먼저 가 있거나, 우연히 부딪치는 등의 행동을 자주 하였다고 했다.
율리시스의 오른팔, 왼팔인 투리스와 멜번이 알려 준 정보이니 정확한 것이었다. 그리고 어찌나 율리시스의 얼굴을 좋아하는지, 시선을 떼지 못하고 항상 그만을 좇았다고 한다. 헨리우스의 약혼자일 때도 말이다.
‘헨리우스가 즉위하지 못할 거란 걸 느꼈던 거겠지. 그래서 더 노골적으로 굴었을 테고…….’
이번 책봉식과 이어지는 연회에서 히아신스가 가장 경계할 대상은 아마도 엘리아나 자신일 것이었다. 엘리아나에 대한 소문을 모르지 않을뿐더러, 율리시스는 자신에 대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 행보를 보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엘리아나는 그녀에 대해서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보나마나 영애들을 소집해서 연회에서 자신을 깎아 내릴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그때 자신에게 하는 수위에 따라서 대응해 줄 생각이었다. 질투로 인한 싸움이라면 샤르헨과 이골이 날 정도로 해 봤으니 말이다.
‘결혼을 한 번 해 봐서 좋은 건 이것뿐이군.’
엘리아나는 짧았던 결혼 생활을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사람들의 예상대로 아르헨에서 카르만과 샤르헨, 두 사람의 모습이 발견되었다. 아르헨의 도시 중에서도 아주 작은 시골 도시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가진 돈을 모두 털어 땅을 사서 농사를 짓는다는 소문도 있었고, 그마저도 남의 땅을 빌려서 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신들의 정체를 숨긴 채 평민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건 분명했다. 콘티노 왕은 마지막으로 온정을 베풀어 그들을 더 이상 추적하지 않았다. 엘리아나는 더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과거의 사람에 불과했으니까.
앞으로 자신이 만날 사람들, 관계를 맺고 살아갈 사람들이 중요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사람이 율리시스가 될 수도 있었다. 아니, 될 확률이 높았다.
엘리아나는 자신의 앞으로 매일같이 도착하는 편지를 열었다.
「친애하는 엘리아나 로즈 양에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오늘은 누구를 만났는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전하는 이 귀여운 왕자님이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채울 것이라면…….
엘리아나는 콘테르국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 게 많았다. 그래야 구체적인 삶을 꿈꿀 수 있었다. 카르만과 결혼을 한 후에 뒤늦게 했던 것들을, 엘리아나는 이제 미리 하고 싶었다. 굳이 율리시스와 이어지지 않더라도 콘테르 왕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두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엘리아나는 두꺼운 역사서를 다시 한번 읽고, 시무스 부인을 통해 얻은 문서들을 살펴보았다. 최근 귀족 가문 간의 사이라든지, 사교계 소식은 이런 문서들이 훨씬 빨랐다. 그녀는 아무런 대비 없이 책봉식에 참가할 마음이 없었다.
그녀에겐 이미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콘티노의 안정된 사교계와는 또 다른, 새로운 곳이었다. 어떤 인상으로,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
엘리아나는 펜을 들고서 히아신스 아테르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 여인이 아마도 콘테르의 사교계에 뜨거운 감자를 던질 것임을 예감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