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적당히 오른 술기운에 엘리아나 로즈는 연회장을 자연스럽게 빠져나왔다. 왕궁의 장미 정원은 화려하기로 유명했고, 그 꽃향기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밤공기는 엘리아나의 마음을 한층 더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엘리아나는 몇 걸음 걷지 않아서 멈춰 섰다. 자신을 따라 걷는 장난스러운 발걸음 때문이었다.
자신이 한 걸음을 걸으면, 딱 한 걸음을 따라왔다. 두 걸음을 빠르게 걸으면, 딱 두 걸음을 같은 속도로 따라왔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엘리아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율리시스.”
“나인 걸 어떻게 알았어요?”
“내 주변에 이런 깜찍한 짓을 할 사람은 율리시스 왕자님밖엔 없거든요. 연회장을 비워도 되는 거예요? 율리시스를 궁금해할 사람이 많을 텐데…….”
“그거야말로 내가 엘리아나에게 하고 싶은 말인데요.”
“잠시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주면서 감질나게 해야 하는 법이거든요. 사람의 호감을 살 때는 적당히 밀고 적당히 당겨야 한다고 하잖아요?”
“어쩌죠. 나는 그대에게 밀리진 않고 자꾸 당겨지기만 하는데.”
율리시스는 정말 무언가 자신을 떠민다는 듯이 우스꽝스럽게 다가오더니 엘리아나의 구두코와 자신의 가죽구두 코를 맞댔다.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율리시스는 엘리아나의 두 손을 잡아 올려서는 입을 맞췄다.
그러고서는 말을 이었다.
“곧 있으면 공식 후계자 선언식이 있을 거예요. 그 자리에 누구보다도 그대를 제일 먼저 초대하고 싶어요.”
“콘테르의 새로운 시대를 짊어지고 갈 율리시스 왕자님의 말씀이라면 기꺼이 따라야지요.”
엘리아나의 호쾌한 수락에 율리시스는 소리를 내 웃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맞잡은 채로 말을 이었다.
“아, 이번에 콘티노를 온 이유가 이 연회에 참석하기 위한 것만이 아닌 건 알고 있죠?”
엘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르디언 상단이 신뢰를 잃고 붕괴하면서, 콘테르와 콘티노의 교역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상인마다 부르는 게 값인 데다가 그 차이가 커서 어리숙한 사람들은 큰 손해를 보곤 했다. 거기에는 생활에 꼭 필요한 물자들도 함께 연관되어 있었다.
“엘리아나 생각은 어때요? 어떤 해결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정직한 상단이 중요 물자 몇 개를 독점하는 게 필요하겠죠. 이전처럼 모든 물품을 쥐고 있진 않아도 돼요. 약간의 경쟁은 시장을 더 활발하게 하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지금처럼 엉망은 안 돼요. 조르디언 상단에게 다시 일을 주는 것도 안 될 일이고요.”
“소개해 줄 좋은 상단이 있나요?”
엘리아나는 준비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존 조르디언보다 현명하고, 대범한 사람이 있죠.”
“그게 누군데요?”
율리시스의 질문에 엘리아나는 환한 달처럼 밝은 미소를 지었다.
***
시무스 상단이 창단된 후, 첫 공식 교역 의뢰가 들어왔다. 콘테르 왕국 사람들이 꼭 필요로 하는 나무와 석탄, 육포와 같은 저장 식품이 주 품목이었다. 시무스 부인은 자신의 인맥을 사용하여 빠르게 유통 제품 공급처를 확정했다.
데이지 시무스의 강단 있으면서도 화통한 면모는 사업가 기질에 잘 어울렸다. 콘테르국에서는 비비안 공주와 약혼을 맺은 올랜도 가문에서 상단을 꾸렸다. 재무부의 시드 블랙 경이 추천했고, 시무스 부인과도 소통이 원활하게 되는 상대였다.
각 상단은 국경 지대에 새로 신설된 교역 창고에서 물자를 거래했다.
헨리우스 왕자의 부대가 점령했던 콘티노 지역에는 원래 거주했던 원주민들과 이주민, 각 상단의 사람들이 터를 잡았다.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었다. 콘테르에서도 그 근방의 땅을 다져 이주민이나 이제 막 노예에서 벗어난 평민들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마을로 만들었다.
두 나라의 중간 지대였다. 콘티노의 국왕과 콘테르의 국왕이 전쟁에 관한 협정을 맺으면서 만든 지역이었다.
이곳은 두 나라가 하나의 국가나 다름없다는 의미를 지닌 지역이었다. 국경은 중간 지대에서만큼은 그 경계가 희미해졌다.
시무스 부인은 그 어느 때보다 활기가 가득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주로 입던 드레스보다 더 가벼운 차림으로 상단의 첫 공식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었다.
“아무래도 그 사건 이후로 잭슨이 소심해진 면이 있었는데, 이 거래를 준비하면서 많이 밝아졌어요. 예전의 그이 모습을 되찾은 거 같아서 기뻐요. 율리시스 왕자에게 잘 얘기해 줘서 고마워요, 엘리아나.”
“결정을 내린 건 폐하이신걸요. 모두 시무스 부인이 그동안 관계를 돈독하게 해 오셨기 때문이에요. 테르어를 할 줄 아는 유능한 남편도 있으시고요.”
시무스 부인은 겸손을 표하는 엘리아나에도 고마운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칼을 들지 않은 전쟁 영웅’으로 유명한 엘리아나의 한마디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율리시스 밀 왕자를 꽉 잡고 있다는 소문은 사교계에 파다했다. 시무스 부인은 그녀를 팔꿈치로 쿡 찌르면서 말을 이었다.
“근데, 율리시스 왕자님과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저번에 왕실 장미 정원에서 단둘이 걷는 걸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던데?”
“왕위 계승자 책봉식에 초대받았을 뿐이에요. 아직, 별다른 관계는…….”
“예비 왕비로서 초대받은 게 아니고요?”
“시무스 부인. 전 아직 재혼 생각은 없어요.”
“엘리아나야 없겠지만, 율리시스 왕자는 가득해 보이던데요?”
“…….”
“누구에게건 친절한 한량 같지만, 의외로 특정 영애에게 관심을 보이거나 접근을 하진 않았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콘테르 귀족들도 엘리아나를 얼마나 궁금해하고 있는데요.”
시무스 부인의 사교계 소식은 정확할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예상하지 못한 관심이 약간은 부담스러웠지만, 마냥 싫은 것은 아니었다.
율리시스는 적어도 제게 보이는 호감에 있어서는 꾸밈이 없었다. 진심으로 다가오고,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그의 올곧은 표현은 카르만에게 처음부터 거절당했던 엘리아나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수많은 귀족 가문에서 청혼이 쏟아지고 있음에도, 엘리아나가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정중했고, 엘리아나를 칭송했다.
하지만 이전의 아무것도 아닌 엘리아나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엘리아나는 콘테르 왕국에 며칠 머물기로 결정된 이후로 장미꽃 머리핀을 자주 만지작거렸다. 그녀에게 이 값싼 머리핀은 각별했다. 많은 사람에게서 값비싼 선물들이 매일같이 쏟아졌지만, 이 머리핀만큼 엘리아나가 아끼는 것은 없었다.
질리언에게 받은 첫 보석 목걸이보다 엘리아나에게는 이 머리핀이 더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어떤 동질감과 사소함, 서로에 대한 본능적인 끌림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난잡한 소문의 중심에 있던 계모 남작 부인과 이름조차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고 왕명을 수행하던 떠돌이 왕자가 맞닿았을 때 생겨난, 그런 무언가가 이 핀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번에 만나면 체스를 꼭 한판 겨뤄야겠어.”
엘리아나는 혼잣말로 속삭였다. 이전에 말장난으로 서로를 체스판의 킹과 퀸으로 말했던 적이 있었다.
‘정말로 그와 내가 왕과 왕비가 된다면……. 부부라는 것이 된다면…….’
엘리아나는 한 번의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부라는 관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결혼 생활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고, 아내로서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다시 실패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엘리아나는 두렵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했다. 율리시스와 함께라면 아마도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게 다를 테니 말이다.
사실상 초야도 치르지 않았기에, 그녀는 남녀 간의 깊은 사랑에 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키스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문란한 소문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이런 자신에게 율리시스는 실망하지 않을까?
엘리아나는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머리를 쓰는 것이나 공부를 하는 것에 있어서는 어디서도 지지 않았지만, ‘그’ 분야만큼은 헛똑똑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아나는 턱을 괴고선 눈앞에 펼쳐진 넓은 정원을 바라보았다.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위축될 마음은 없었다. 거짓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엘리아나 역시 그만큼 솔직하게 다가갈 것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내비치면서 말이다.
어떤 두꺼운 화장도, 가면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엘리아나 로즈.
적어도 제가 아는 율리시스는 그런 엘리아나의 진짜 모습을 사랑해 줄 수 있는 남자였으니 말이다.
***
시무스 상단과 올랜도 상단은 첫 거래를 성공적으로 끝냈다. 그동안 원활하지 않았던 공급 상황을 뻥 뚫어 줄 만큼 막대한 양의 자원이 거래되었다.
과한 부풀림 없이 가장 필요한 물자를 풍족하게 거래할 수 있게 되자, 경직되었던 양국의 시장도 활발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식 후계자 책봉식이 있기 전이었으나, 민심은 율리시스에게 한층 긍정적으로 변했다. 도미누스 왕자와 헨리우스 왕자는 원래도 툭하면 전쟁을 일으켜서 세금을 많이 걷거나, 죄 없는 청년들을 징병했다. 그러다 돌아오지 못한 청년들도 많았다.
그런 이들이 생활에 꼭 필요한 물자까지 막아 버린 극한의 상황을 단번에 해결하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콘티노와 평화 협정까지 이끌어 낸 율리시스에게는 당연히 호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류트를 들고 방랑자 흉내를 냈던 것도 다 왕명이었대요.”
“아니, 콘티노 왕국에서 귀족들을 모두 제 편으로 만들었다는군.”
“이미 재무부의 측근들과 함께 세금 조정안을 논의한대요. 올해가 흉작이었잖아요.”
사람들은 나라를 무분별하게 확장하기보다는 개개인의 삶을 더 질 좋게 하려는 율리시스 왕자에 대한 호평을 자자하게 했다.
그리고 그런 호평이 늘어날수록 그의 아내가 될 사람에 대한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대체 누가 될까요?”
“홀딱 반한 여자가 있다던데요! 듣자 하니 이번 책봉식에 온대요.”
“아주 난잡한 여자라는 소문이 있던데?”
“근데 히아신스 영애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야?”
누군가 히아신스라는 이름을 올리자,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합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