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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99/121)

98화

“이번에 입장하실 가문은 로즈 자작 가문입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함께 로즈 가문의 이름이 불리자, 연회장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문을 향했다.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은 어린아이들까지 모두 입장할 수 있게 허가받은 가문, 나라를 지킨 최고의 가문인 로즈 가문이었다.

커다란 양 문이 열리고, 로즈 자작과 자작 부인이 먼저 입장했다. 그리고 그 뒤로 어린 자녀들이 따라붙었다.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러면서도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지막에 등장한 전쟁 영웅, 검을 들지 않고서도 승리를 이끈 그녀. 엘리아나 로즈를 보기 위해서 말이다.

그녀는 아름다운 몸매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고선 문 앞에 섰다. 그러고선 드레스를 살짝 들면서 모두를 향해 인사했다.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는 옷차림이었다. 그녀는 연회장에 있는 어떤 여성보다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고, 누구와도 겹치지 않았다. 풍성한 머리칼은 반쯤 올리고, 반은 내려서 어깨에 살짝 걸치게 했다. 어깨에 두른 여우 털로 만든 숄은 그녀의 부드러움을 더욱 돋보였다.

밀랍 양초로 조각된 여신상보다 더 성스러운 모습에 모두 입을 쩍 벌리고선 제대로 다물지 못했다. 엘리아나는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찰랑거리는 드레스 자락 아래로 드러난 유리 꽃 구두에 모든 영애가 술렁거렸다.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아나는 왕과 왕비에게 인사를 올리고서는 몸을 돌렸다. 그러고선 첫 사교 파티 때와 마찬가지로 테네브 공작 부인을 먼저 찾았다. 상징적인 행동이었다. 바뀐 위치와 상관없이 그녀가 존경하는 사람이 테네브 공작 부인임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부인,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엘리아나. 우리가 처음 만난 후로 한 해가 지나지도 않았는데 많은 것이 변화했군요. 그것도 모두 좋은 방향으로 말이죠.”

“테네브 가문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거예요. 특히나 제데이아 경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정말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엘리아나의 칭찬에 제데이아의 표정이 약간 움찔했다. 입꼬리가 움직인 것이었다. 옆에 있던 제데이아의 여동생 에이린은 경악을 하면서 말했다.

“오빠 지금 웃은 거야?”

“아니. 그런 적 없어.”

“웃었어. 지금 엘리아나 양의 말에 웃었잖아.”

“아니야.”

두 사람은 철이 들지 않은 어린아이들처럼 투덕거렸고, 테네브 부인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엘리아나 양.”

“네, 부인.”

“그때 내가 했던 말을 하나 거둬도 될까요?”

“무엇이든지요. 제가 어찌 부인의 부탁을 거절할까요.”

엘리아나가 빙긋 웃자, 테네브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그땐 내 아들을 노릴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었죠. 엘리아나에 대한 정숙하지 못한 소문에 이 늙은이가 눈이 어두웠습니다.”

“아닙니다. 부인께선 아무런 편이 없던 제게 미소와 친절을 내주셨잖아요.”

“좋은 사람은 좋은 기억만 하는군요. 그렇다면…….”

“네, 부인. 뭐든 말씀하세요.”

“내 아들도 엘리아나의 재혼 후보자 중 한 명으로 생각해 줄 수 있나요?”

그 말에 엘리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놀란 건 제데이아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 저는…….”

그러나 그녀를 원하지 않는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없었다. 될 수 있다면 선택받고 싶었다. 그녀의 남자로 말이다. 그녀는 최고의 참모였다. 어떤 가문의 안주인이 되더라도 그 가문을 단연 대륙 최고로 만들 만한 위인이기도 했다.

게다가 현명한 만큼 아름답고, 우아했다. 모든 결혼 적령기의 귀족들이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몰라 했으니 말이다.

“네, 부인.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는 제데이아 경이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요.”

테네브 공작 부인은 경쾌하게 웃었다.

“다행이네요. 영 미움받지는 않은 모양이니……. 그래도 워낙 숙녀 앞에서는 숙맥이라 승산이 없을 수도 있겠군요. 저 뒤에서 엘리아나가 돌아서기만 기다리는 숱한 남성들에게 말이죠.”

엘리아나는 방싯 웃으면서 치마를 살짝 올려 인사를 했다.

“부인의 기대에 부응하는 멋진 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가볍게 인사를 마친 엘리아나는 오델리 백작과 레이첼 부인에게도 짧게 인사를 했다. 그러고선 허트 남매와 이야기를 나눴다. 레이 오델리는 헬렌 허트에게 딱 달라붙어선 사랑이 담긴 눈빛을 쏟아내느라 정신이 없었고, 질리언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그를 감시하는 중이었다.

“질리언.”

엘리아나가 짐짓 혼내듯이 입을 열자, 질리언이 툴툴거렸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오. 아직 결혼식 날짜도 잡히지 않았는데, 아내라도 되는 것처럼 종일 쫓아다니고, 곁에 못 둬서 안달이니……. 내 어찌 헬렌이 걱정되지 않을 수 있겠소?”

“헬렌은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이제 결혼을 앞둔 연인에게 지나치게 간섭하는 게 얼마나 눈치 없는 행동인 줄 알아요?”

“눈치가 없다니! 레이 오델리 저놈이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오?”

“적어도 전 그렇게 생각해요. 질리언, 당신도 주변 영애들에게 시선을 좀 돌려 줘요. 다들 당신의 관심을 원한다고요.”

“…그중에 당신은 없잖소.”

질리언이 중얼거리자, 엘리아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말을 이었다.

“확신할 순 없죠?”

“그, 그게 무슨 뜻이오?”

“질리언을 놀리는 거예요. 에이린 테네브 양에게 말을 걸어 줘요. 그녀가 목이 빠지게 당신이 바라봐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엘리아나는 질리언의 어깨를 툭툭 털어 주고선 몸을 돌렸다. 질리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자신에게 농담을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영애였다. 하지만 매번 에이린 테네브와 연결시켜 줄 생각만 할 뿐, 자신을 진지하게 바라보진 않는 것만 같았다.

‘정작 내가 원하는 건 에이린 테네브를 포함한 수많은 영애가 아니라 단 한 명의 여인뿐인데…….’

그 이름은 엘리아나 로즈였다. 질리언의 짙은 눈빛이 엘리아나에게 닿았다. 그러나 그녀의 발걸음은 율리시스를 향하고 있었다.

샴페인을 마시고 있는 율리시스의 소맷단이 유난히 빛났다. 엘리아나가 선물한 커프 링크스가 장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녹안과 꼭 닮은 에메랄드였다. 특수 세공사에게 부탁하여 올리브 모양으로 만들어 낸 액세서리는 입체적이면서도 아름다웠다.

엘리아나는 자연스럽게 율리시스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커프 링크스가 아주 잘 어울리네요.”

“제가 대놓고 연정을 품고 있는 사람이 줬거든요.”

엘리아나는 율리시스의 말에 웃음을 지었다.

“누군지 몰라도 대단히 센스가 좋으신 분인가 봐요.”

“미모부터, 센스, 지성까지 빠지는 구석이 없는 분이죠.”

“율리시스.”

엘리아나는 칭찬이 과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율리시스는 어깨를 으쓱이고선 엘리아나의 손등을 쥐었다.

“그러니 레이디의 첫 춤은 제가 가져가도 되겠지요?”

“황송할 따름이죠.”

엘리아나가 가볍게 손가락을 움직여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율리시스의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콘테르 왕국의 정식 후계자와 엘리아나 로즈에게로 집중되었다. 엘리아나는 가볍게 몸을 돌려 시무스 부인에게 향하며 그 시선을 뿔뿔이 흩어 놓았다.

“이곳에 오신 귀빈 여러분, 모두 반갑소. 여러분이 한마음 한뜻을 모아 준 덕분에 콘티노 왕국은 많은 피를 흘리지 않고, 다시 한번 나라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를 위해 성심을 다한 모두에게 감사와 축복을 전합니다. 먹고, 마시고, 충분히 즐기십시오.”

콘티노 왕의 연회 선포와 함께 잔이 부딪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무곡이 시작되었다. 율리시스는 예고했던 대로 엘리아나의 손을 가장 먼저 잡아챘다. 둘을 향해 질리언과 제데이아의 시선이 진하게 달라붙었다. 뭇 남성들의 시선도 함께였다.

하지만 누가 봐도 한 쌍의 커플처럼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말을 얹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다음 차례를 노릴 뿐이었다.

“질투로 인한 시선이 칼날 같아서, 오늘 밤은 온몸이 쑤시겠는걸요?”

율리시스가 부드럽게 엘리아나의 허리를 감으며 말했다. 그러자 율리시스의 어깨에 손을 얹은 엘리아나가 웃었다.

“빠지는 부분이 없는 레이디를 대놓고 연모하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두 사람의 얼굴에 같은 모양의 미소가 퍼졌다. 춤을 추는 모습은 부드럽고 여유로웠다. 엘리아나는 첫 번째 춤을 마치고, 잠시 목을 축였다가 질리언과 손을 잡았다.

질리언 허트는 첫 번째 춤을 에이린 테네브와 추고 온 후였는데, 뭔가에 뿔이 난 것처럼 그녀를 향해 툴툴거렸다.

“왜 내게 자꾸 다른 사람을 붙여 주려고 하는 거요?”

“그래서 에이린 양이 못생기거나 매력이 없기라도 하다는 거예요?”

“그, 그런 말이 아니잖소!”

“그러면 뺏기기 전에 낚아채요. 그녀보다 더 좋은 영애는 내가 아직 보지 못했으니까.”

“그녀는 아직 어리고……. 또 나처럼 거친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소. 오히려…….”

질리언은 자신과 어울리는 사람은 엘리아나 당신이라는 말을 내뱉지 못하고 삼켰다. 엘리아나는 그런 질리언은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가 에이린 테네브에게 쑥스러움을 느끼는 줄만 알면서 말이다.

엘리아나 로즈가 세 번째 무곡 때 제데이아 테네브와 손을 잡았을 때, 남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영애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떠들기 바빴다. 이번 연회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세 남자를 모조리 차지한 걸 보니 ‘그’ 엘리아나 로즈의 인기가 실감 난다는 내용이었다.

이야기 속 주인공인 엘리아나 로즈는 언제나 그렇듯 어떤 말도 듣지 않고, 담지 않았다. 소문이란 그녀를 돋보이게 할 뿐, 부끄럽게 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엘리아나가 세 번째를 마지막으로 춤을 그만 추고, 데이지 시무스를 비롯한 부인들끼리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을 때, 몇 명의 귀족들이 아쉽다는 듯이 그 주위를 배회했다.

“장미의 향기에 취해 벌들이 끊이질 않는군요. 엘리아나.”

시무스 부인이 놀리자, 엘리아나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이 연회의 주인이 마치 엘리아나인 것처럼, 질투도, 선망도 모두 그녀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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