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율리시스는 엘리아나가 보낸 서신이 도착했다는 말에 서재에서 뛰쳐나와서 궁의 입구까지 달음박질쳤다. 정식 후계자 책봉이 얼마 남지 않아서 쏟아지는 정무에 정신이 없던 차였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어서 더욱 엘리아나의 소식은 율리시스에게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처럼 달았다.
“어디 있어? 그녀가 보낸 편지!”
율리시스는 산처럼 쌓인 서신들을 뒤적이면서 말했다. 그가 정식 후계자로 거론되자마자 온갖 귀족들이 연회 초대장이며, 축하 인사 등의 서신을 전국에서 보내 왔다. 그러다 보니 서신 창고에는 온갖 편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따로 빼놓았습니다.”
시종장 미네는 주요 서신을 분류해 둔 곳에서 엘리아나 로즈의 서신을 찾아서 건넸다. 두툼한 봉투에 안전하게 포장되어 온 봉투에서는 장미 향이 났다.
율리시스는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켜 본 다음에 씨익 웃고선 그대로 자신의 서재로 다시 뛰어 올라갔다. 당장 뜯어 보고 싶었지만, 미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네는 늘 개구쟁이 같은 모습을 잃지 않는 율리시스의 모습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왕자들을 봐 왔다. 콘테르 왕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평생을 함께할 시종이 정해지곤 했다. 말이 시종이지, 사실 모든 것을 담당하는 참모에 가까웠다.
미네는 여타의 왕자들과 다른 행보, 다른 마음씨, 그리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율리시스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자신의 평생을 다 바쳐서 그를 보조할 수 있다는 게 행복할 정도로 말이다. 이젠 그 정점을 찍을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정식 후계자 책봉과 결혼.
미네는 숨길 수 없을 만큼 사랑에 푹 빠진 소년의 얼굴을 한 율리시스를 떠올리면서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 역시 누구보다도 엘리아나 로즈를 궁금해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소문만으로는 다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매력을 말이다.
‘아마 후계자 책봉식에선 뵐 수 있겠지.’
미네는 초대장 리스트 가장 상단에 올라가 있는 그 이름을 떠올리면서 미소를 지었다.
***
율리시스는 서신을 열자 보이는 작은 에메랄드 커프 링크스(cuff links)를 보았다. 매끈한 표면은 마치 올리브 나무 열매의 그것과 비슷해 보였다. 게다가 에메랄드를 감싸고 있는 금색 테두리의 끝을 올리브 꼭지처럼 표현해 놓은 터라, 금세 만든 이의 의도를 알아볼 수 있었다.
“올리버가 그 뜻이었어?”
올리브에서 나온 이름이었다니……. 뭔가 허탈하면서도 너무 귀여운 발상인지라 미소가 절로 튀어나왔다. 올리버는 한 쌍의 커프 링크스를 만지작거리다가 편지를 펼쳤다.
「친애하는 율리시스 밀 왕자님께.
콘테르의 아름다운 유리 장미에서 나온 빛으로
열매를 맺은 올리브를 보내 드립니다.
이 뜻을 왕자님이라면 알아보실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감사와 축하의 마음을 함께 담아 보냅니다.
작은 선물이지만, 올리브나무의 생명력과 축복의 기운이 콘테르에까지 닿기를 바라며…….
―엘리아나 로즈」
그녀의 글씨체는 단정하고 문장은 유려했다. 율리시스는 지금까지 받아 왔던 어떤 선물보다도 더 값지고, 귀중한 것을 받았다는 듯이 손에 커프 링크스를 꼭 쥐었다.
“미네!”
“네, 왕자님.”
“연회에서 입을 옷을 정했어.”
“어떤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미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왕실의 재단사가 20벌은 넘게 만들어 놓은 터였다. 그 외모에 무엇을 입든 멋있지 않을 리 없었지만, 율리시스는 평소답지 않게 오래 고민했다.
―가장 멋있어야 해.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남자로 보여야 한다고.
율리시스의 주문에 재단사와 미네는 땀을 뻘뻘 흘렸다. 이미 그는 그런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누가 감히 율리시스 밀보다 잘난 남자라고 자신을 뽐낼 수 있단 말인가.
콘테르뿐만 아니라 콘티노, 인티그레스, 아르헨 등 모든 왕국을 포함해도 그런 남자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들어 설득해도 율리시스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마치 아주 잘 보여야 할 대상이 있다는 듯이 말이다.
율리시스는 손 안에 쥐고 있던 커프스를 보여 주었다.
“이것과 가장 잘 어울리는 옷으로.”
“그러면 17번 의상이 어떠실지요?”
17번 의상은 검은색 정장이었다. 그러나 원단 특성상 빛을 받으면 주름진 부분이 부드러운 녹색 빛깔로 빛났다. 아주 은은하고 오로라처럼 아름다운 빛이었다. 이 영롱한 에메랄드와도 딱 어울릴 터였다.
노골적인 녹색 정장보다는 그 편이 훨씬 더 율리시스의 외모를 빛나게 해 주리라는 것을 미네는 알고 있었다. 율리시스 역시 같은 옷을 생각한 참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말했다.
“지금 당장 입어 봐야겠어.”
“네. 준비하겠습니다.”
신이 난 듯한 율리시스의 말에 미네가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
왕실의 연회는 성대했다. 국경 지역에 있던 대공들과 각 나라의 정식 후계자들이 모두 참석해서 자리를 빛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새로 만든 샹들리에는 눈부신 크리스탈들이 눈처럼 떨어지는 모양으로 달려 있었으며, 곳곳은 화려한 생화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밀랍으로 만든 고급 양초들은 날아다니는 천사들의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었고, 실내 중앙 분수에서는 향긋한 꽃 내음이 나는 분수 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화려한 무늬의 실크 커텐들은 넝쿨들과 어우러져서 자연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매력을 듬뿍 발산했다.
마치 숲속의 요정들이 사는 곳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왕비가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여섯 번째 공주인 비비안이 소품들을 하나하나 골라서 구성한 것이었다.
연회장은 어느 한 곳에서도 빈틈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촘촘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그러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은 모습이 콘티노 왕실의 이미지와도 잘 어울렸다.
공식 입장 전, 왕비 알현 시간이 가까워오자 로즈 부인은 목 아래를 살포시 누르면서 말을 이었다.
“너무 떨리는구나. 내 평생 왕비님을 실제로 알현하는 날이 오다니…….”
“저희도 뵙고 싶어요! 왕비님은 천사 같으실 텐데!”
아쉽게도 데뷔탕트를 거치지 않은 영애들은 따로 알현실에 갈 수 없었다. 때문에 로즈 가문에서 갈 수 있는 사람은 로즈 부인과 엘리아나뿐이었다.
엘리아나는 동생들의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면서 말을 이었다.
“또 뵙게 될 날이 올 거야.”
“정말?”
“그럼.”
“요즘은 뭔가 다 꿈만 같아, 언니. 이 모든 게 갑자기 깨어 버리면 어떡하지? 그럼 난 정말 슬플 거야.”
동생들의 불안함을 모르는 것이 아니기에, 엘리아나는 볼을 살짝 꼬집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어때? 꿈이 아니지?”
“언니가 꼬집는 건 하나도 아프지 않은걸!”
“그럼 내가 할래!”
“아얏! 너 진짜!”
“어허, 싸우는 사람은 마차에서 내려서 걸어오게 한다!”
로즈 부인이 엄하게 말하자, 금세 얌전해진 엘리아나의 동생들은 툴툴거렸다.
“진짜 아팠어. 꿈은 아닌 거 같아.”
그 목소리에 로즈 부인과 엘리아나의 웃음이 커다란 마차 안을 채웠다.
***
“오, 어서 와요. 로즈 자작 부인, 엘리아나 양. 정말 만나고 싶었어요.”
콘티노 왕국의 왕비는 부드러운 황금색과 베이지색 실크가 풍성하게 펼쳐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리본이 치맛단마다 열매처럼 맺혀 있었고, 목과 팔에 두른 화려한 보석은 그녀 자체를 보석처럼 빛나게 했다. 왕비는 손동작 하나하나가 우아했고, 얼굴 근육의 움직임조차 왕실의 교육을 받은 것처럼 귀태가 났다.
“로즈 가문의 소피아 로즈와 엘리아나 로즈, 왕비 전하를 뵙습니다.”
로즈 부인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자, 왕비는 두 손을 들어 반기며 가까이 다가오라고 했다.
“진정한 연회의 주인공들이시죠. 몹시 뵙고 싶었답니다. 오늘 연회는 그대들의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충분히 즐기고 가세요. 이렇게 자주 보게 되었으면 좋겠네요.”
“황송하옵니다. 왕비 전하.”
“엘리아나. 듣던 대로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답군요. 부디 우리 왕자들도 기꺼워해 주길 바라요.”
왕실에 엘리아나를 들이고 싶다는 노골적인 뜻이었다. 엘리아나는 그녀의 우아한 미소를 따라지으면서 대답했다.
“부디 제게 그런 인연의 행운이 닿기를 바랍니다. 왕비 전하.”
왕비는 더 이상 엘리아나의 대답을 강요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아주 잠깐 만났을 뿐인데, 로즈 양을 향한 헛소문들이 얼마나 많은 시기와 질투로 만들어진 것인지 알겠네요.”
왕비는 짧게 엘리아나를 칭찬하고선 그들을 보내 주어야 했다. 만나야 할 귀족 가문이 줄지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현을 마친 로즈 부인은 잠시 눈물을 흘렸다.
“엘리아나.”
“네, 어머니.”
“나는 이 모든 게 꿈같이 느껴지지 않는단다. 다만, 여기에 오기까지 너 혼자서 해내야 했던 모든 것들에 도움을 주지 못한 게, 정말 미안하구나.”
엘리아나는 그런 로즈 부인을 안아 주면서 말을 이었다.
“제게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또다시 선택의 기회가 온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예요. 저는 지금이 너무 행복해요.”
“엘리아나.”
“그러니 우리 이 행복만을 누려요. 과거는 모두 훌훌 날려 버리고요.”
“엘리아나, 고맙다. 이렇게 돌아와 줘서. 이리 못난 부모를 만나서도 이렇게나 잘 성장해 줘서…….”
엘리아나는 울지 않았다. 가슴속에 벅차오르는 감정이 있었지만, 꾹 눌렀다. 앞으로 로즈 가문이 가야 할 길은 더 많이 남아있다고 믿었으니 말이다.
“절 이렇게 길러 주신 건 어머니와 아버지잖아요. 제가 오히려 감사해야 해요.”
“엘리아나…….”
“가족들이 모두 우리를 기다릴 거예요. 어서 가요.”
“그래. 그러자.”
엘리아나는 빛나는 유리 장미가 올라간 구둣발을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그 걸음은 아름다운 콘티노 왕실의 연회를 장식하는 마지막 한 송이 꽃의 등장과도 같았다. 엘리아나 로즈라는 이름의 장미 말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녀의 손짓과 시선을 기다리는 수많은 이들이 있었다. 그녀의 간택을 원하는 간절한 꿀벌 같은 남자들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