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6/121)

95화

“엘리아나, 나랑 결혼해 주겠어요?”

율리시스가 한 번 더 진정성 있는 울림을 전했다. 그러자 엘리아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답했다.

“아니요.”

“네?”

율리시스는 잘못 들었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박 보석을 닮은 눈동자가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엘리아나는 그 표정이 퍽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이었다.

“아니요, 라고 했어요.”

“어째서요!”

율리시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떤 잘못이든 당장에 고치겠다는 포부와 약간의 어리광이 섞인 모습이었다. 엘리아나는 그런 율리시스의 모습에 알쏭달쏭한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율리시스는 금세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손뼉을 치고선 말을 이었다.

“내가 아직 정식 후계자가 아니라서 그런 거죠? 엘리아나에게 왕비의 자리를 약속하려면 자격을 갖추고 와라, 그런 거죠?”

그는 엘리아나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녀의 어투와 거래 방법을 모두 파악하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고개를 살랑살랑 젓고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재에서는 피비린내가 나서 도저히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엘리아나가 창밖으로 몸을 반쯤 내밀자, 율리시스는 빠르게 따라붙어서는 그녀에게 물었다.

“아니에요? 왜요? 엘리아나, 혹시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고 있나요? 누군데요?”

“누군지 알면요? 또 목을 화살로 꿰뚫어 버리려고요?”

“아니요. 그건, 그 사람이 엘리아나를 죽이려고 했으니까! 내가 조금만 늦었어도 또 찔렸을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엘리아나가 깨어나지 않았을 때,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율리시스는 종알종알 지저귀는 새처럼 말을 이어 갔다. 엘리아나는 그것이 듣기 좋은 새의 노랫소리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끝났다.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엘리아나는 더 이상의 계약이 필요하지 않았다. 전쟁의 위험도 없어졌고, 굶을 걱정 하지 않을 정도의 자산이 생겼다. 전쟁을 막는 데 공을 세웠으니 가문에 작위가 내려질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것 이상으로 바라는 것이 없었다. 모든 게 끝났다. 그런데 또다시 누군가와 새로운 인연을 맺을 필요가 있을까? 엘리아나는 턱을 괴고선 말을 이었다.

“난 정략결혼은 인제 그만하고 싶어요. 왕비의 자리를 두고 하는 거래도요.”

“이건 거래가 아니라 청혼이에요.”

“하지만 그러기엔 내가 율리시스에게 반할 시간을 너무 주지 않은 건 아닐까요?”

“이 얼굴인데도요?”

율리시스는 자신의 잘생긴 얼굴을 알고 있다는 듯이 뻔뻔스럽게 들이밀었다. 엘리아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율리시스의 수려한 생김새는 어떤 여성의 마음도 설레게 할 것이었다. 거기에 왕위 계승자라는 지위, 달콤하면서도 장난스러운 성격, 특유의 다정함까지. 매력을 꼽자면 양 손가락을 다 넘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엘리아나는 밀고 당기기를 하는 듯이 말을 이었다.

“제데이아도, 질리언도 하물며 조셰프까지도 외모에서는 빠지지 않을 텐데요?”

“제데이아는 종달새처럼 생겼어요. 좀생이 같단 말이에요. 질리언은 너무 우락부락하고, 조셰프는 피부가 좋지 않아요. 엘리아나. 내 말이 맞다니까요.”

“남을 험담하는 남자는 별론데…….”

“…….”

율리시스가 금세 입을 꾹 다물었다. 뾰로통한 표정이 귀여워서 엘리아나는 손을 뻗어 율리시스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가 놓았다.

“조금 전까지도 나에게 칼을 겨누는 사람이 있었을 만큼 요즘 일상이 엉망이었어요. 급하게, 체할 듯이 진행되는 시간이었죠. 이제는 조금 여유롭게 가고 싶어요. 삶도, 사랑도…….”

“…….”

“그러니까 율리시스도 조금 더 천천히 다가와 줄래요?”

선선한 바람이 불어 엘리아나의 반묶음 한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율리시스는 곧장 다시 한쪽 무릎을 꿇고선 엘리아나의 손을 잡고 입을 맞췄다.

“내가 어찌 아름다운 엘리아나의 청을 거절할 수 있겠어요.”

“고마워요.”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꼬실 거예요. 엘리아나 당신을요. 그러니까 엘리아나도 단단히 각오해야 할 거예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엘리아나가 환하게 웃자, 율리시스는 그 얼굴을 보고서야 다시금 미소 지었다.

선선한 바람이 다시 한번 불었다. 이제 모든 종류의 전쟁이 어떤 의미에서는 끝을 맞이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

헌터 가문은 모든 작위를 박탈당했다.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은 모두 왕실에 귀속되었고, 사용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헌터 공작 부인은 남편과 아들의 죄를 모두 인정하고선 콘티노의 시골에 있는 작은 집으로 이주했다. 거기에서 평민과 다를 바 없는 생을 살아갈 것이라고 했다. 다행히도 그녀는 이 사건과 연루된 부분이 없었고, 루스 윈이 힘써 준 덕분에 벌을 받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콘테르와 콘티노 왕국 전역에 카르만 헌터의 지명 수배가 내려졌다. 아마도 다시는 고향 땅에 발을 내디딜 수 없을 것이었다.

콘티노 전역에서 그의 행방에 관한 얘기는 제일가는 가십거리였다. 시무스 부인의 모임에서도 빠지지 않고 얘기가 되었다.

―인티그레스나 아르헨으로 가지 않았을까요?

―아마 아르헨일 가능성이 크겠죠. 아르헨에 가면 찾을 수가 없으니까요. 인티그레스는 최근에 교역이 늘고 용병들도 자주 머물기 때문에 들키기 쉬울 거예요.

―이것 역시 또 다른 벌이 아닐까 싶어요. 어디서든 자기 얼굴도, 이름도 떳떳이 밝히지 못하고 살아야 할 테니까요.

시무스 부인의 말에 엘리아나가 답했을 때, 부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가문도 아니고, 이름 하나만으로도 명성이 자자했던 헌터 가문이었으니 말이다.

전투가 끝나고 나서도 일이 정리되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다. 루스 윈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모두 시인하고 기사단장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왕실에서는 끝까지 붙잡았으나, 그의 결심은 단단했다.

그러나 콘티노의 왕 역시 고집이 센 사람이었기에, 감옥에서 죗값을 치르는 대신 왕실 기사단에서 기사도와 전술을 가르치라고 명했다. 그는 그렇게 기사단장 대신 상급 기사 훈련 교관으로 기사단에 남을 수 있었다.

질리언은 해군 부사령관으로 몇 계단이나 진급했다. 로즈 가문도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더 높은 작위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엘리아나는 그것을 대신해서 지워진 로즈 가문의 역사를 다시 바로잡아 복원해 달라 요청했다. 그에 따라 로즈 가문이 청렴하고 유서가 깊은 학자 가문임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엘리아나의 아버지는 왕립 학교에서 테르어 문학을 담당하는 교수가 되었다.

재무부의 갱스턴 블러는 종신형을 받았고, 제데이아는 최연소로 재무부 최고 책임자에 임명되었다.

이 모든 특별 대우에 불만을 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콘테르와 콘티노가 큰 전쟁을 치렀다면 막대한 피해를 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영웅이었다. 이들이 몰래 벌인 작전을 자신의 경험인 양 영웅담을 만들어서 다니거나, 연극으로 각색해 공연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이 일에 관련된 이들은 모두 그다음의 삶을 꾸리기에 바빴다.

벌금형을 받은 시무스 가문은 로즈 가문의 양초와 모자, 전쟁 의약품 전반을 유통하는 상단을 꾸렸다. 단장은 데이지 시무스 부인이었다. 잭슨 시무스는 국내 상단 유통을 담당했다.

“나 참, 해적이 무섭다잖아요.”

“그럴 만도 해요. 톡톡히 당했잖아요.”

“폴 테일러를 실제로 만났는데, 그 사람도 이해관계만 잘 맞으면 문제 일으킬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물론 요즘 질리언의 맹추격 때문에 조금 고달픈 것 같긴 했지만요.”

시무스 부인은 대범하게 사업을 꾸려 나갔다. 경쟁 대상은 많았는데, 그중에는 트로이 조르디언의 상단인 트로이 상단도 있었다. 그는 전쟁에 크게 이바지한 바를 인정받아 특별 사면되었고, 그 이후 자기 경력을 바탕으로 작게 상단을 시작했다. ‘조르디언’이라는 이름 때문에 어느 곳에서도 신뢰를 쉽게 얻지 못했지만 말이다.

시무스 부인은 그래도 그의 경력은 무시 못 한다면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엘리아나는 그녀의 그런 전투적인 모습을 좋아했다.

“그래도 엘리아나가 상단을 시작하지 않아서 다행이죠. 로즈 가문이 시작했으면 난 그냥 포기했을 거예요. 어떻게 이겨요?”

“저는 학자 가문의 전통을 잇고 싶어요. 제 동생들이 그렇게 할 거고요. 저는 그걸 지원하는 역할을 맡을 거예요.”

“재혼은요? 질리언이랑 잘 되어 가는 거 아니에요?”

시무스 부인이 제일 재밌는 화제라는 듯이 말하자, 엘리아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손을 저으면서 말이다.

“하긴, 지금 엘리아나 로즈에게 잘 보이고 싶은 남자가 콘티노국에 한둘이겠어요?”

“어휴. 날파리들 때문에 오히려 골치 아파요.”

“남자들이 꼭 날파리 같을 때가 있죠.”

시무스 부인은 푸흐흐 웃음을 터뜨렸다. 엘리아나는 편한 드레스를 입고 시무스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이 시간을 좋아했다.

삶은 여유로워지고 있었다. 집안은 더 이상 가난하지 않았다. 포상금으로 받은 영지와 돈, 그리고 아버지가 교수로 일하면서 버는 봉급도 적지 않았다. 집안은 점점 더 부유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노튼 가문에 소속된 사용인들을 모두 로즈 가문의 이름으로 다시 고용해서 봉급을 줄 수 있을 정도였다.

팔려 가듯이 결혼하여 집안이 근근이 먹고 살기를 바랐던 몇 달 전이 까마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시무스 부인은 엘리아나의 얼굴에 스치는 감정을 읽었는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래서 엘리아나, 이번 연회에 입을 드레스는 정했나요?”

콘티노국의 모든 여인이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이었다. 엘리아나 로즈가 어떤 드레스를 입고 나타날지 말이다. 엘리아나는 비밀스럽게 웃었다.

“뭔데요. 뭔데요. 나한테만 살짝 말해 주면 안 돼요?”

엘리아나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실 뿐 대답해 주지 않았다. 시무스 부인은 궁금함에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엘리아나 로즈가 정숙하지 못하고 악독한 계모라는 평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은 콘티노와 콘테르를 통틀어 최고의 신붓감으로 꼽히는 여자였다. 팜므파탈. 그 단어는 그녀를 가리키기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엘리아나는 그 단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런 얘기에 둘러싸일 때면, ‘자기를 선택해 달라’며 간절히 자신을 쳐다보던 황금빛 눈동자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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