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율리시스는 형인 헨리우스를 임시 감옥에 가두고 나서 곧장 빠져나왔다. 전쟁은 이제 기사단장에게만 맡겨도 되었다. 적군의 우두머리가 꺾였으니 말이다.
사실 조금 여유를 가졌던 율리시스는 한순간 마음이 급해졌다. 다름 아닌 제리크 헌터가 국경 지대에서 도망쳤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가족들을 대피시키거나, 그들과 함께 도망가기 위함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를 쫓는 게 누구던가, 바다를 꽉 잡고 있는 질리언과 육지를 꽉 잡고 있는 루스 윈이었다.
하늘로 날지 않는 이상 그가 빠져나갈 구멍은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
제리크 헌터는 야성적인 남자였다. 야망도 컸고, 오만함도 있었다. 그런 남자가 자신의 파멸을 직감하고 할 마지막 일이 무엇일까? 율리시스는 두 가지를 꼽았다.
첫 번째. 후계자를 지키는 것. 즉 카르만 헌터를 살리는 것.
두 번째. 자신을 이렇게까지 만든 원흉이라 생각되는 사람을 죽이는 것.
아무리 제리크 헌터가 멍청하다고 한들, 국경 지대에서 루스 윈과 마주쳤다면 깨달았을 것이었다. 자신의 모든 계략을 알아채고 사람들을 저항하게끔 조직한 사람이 엘리아나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의 능력은 실로 최고였다. 지혜와 승리의 여신. 율리시스는 그녀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죄인을 왕실로 곧장 이송하고, 폐하께 상황을 바로 보고해 주게.”
“…….”
“이 땅의 전쟁은 이제 끝났다고.”
단번에 정식 후계자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 율리시스는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지킨다. 자기 부하들을, 자기 백성들을.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그중 단연 우선하는 건 한 떨기의 장미였다. 율리시스는 눈부시게 하얀 백마 위에 올라탔다. 그러고선 급하게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가 향하는 곳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한 여인이 있는 곳이었다.
***
로즈 가문의 기사, 조셰프는 경비를 더 강화했다. 이전에 이미 한차례 엘리아나의 목숨을 노린 습격이 있었던 만큼, 이번엔 반드시 아무런 일도 일어나게 해선 안 되었다. 조셰프는 자신의 밑에 있는 위병들이 철저하게 사방을 지키게 하였다.
노튼 가문에서 받은 이 저택은 헌터 남작저보다 넓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처 생각지 못한 허점이 있을 수도 있고, 침입자가 생기면 그 구멍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다시 엘리아나의 생명을 위협할 터였다. 조셰프는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떠지지 않던 두 눈, 길게 난 칼자국, 진동하던 피 냄새와 식어 가던 체온…….
베니는 조셰프가 없었다면 더 큰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위로했지만, 그 위로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자신 때문에 그녀가 죽을 뻔했다는 사실만 오롯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조셰프는 기사 서임을 받으면서 자신이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도 엘리아나의 옆자리에 설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것은 그녀를 지키는 것이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말이다. 그것이 조셰프에게 허락된 사랑의 방식이었다.
조셰프는 엘리아나의 저택을 계속 돌면서 빈틈이 없는지를 확인했다. 위병들은 모두 노튼 가문 출신으로 성실하면서도 실력이 출중한 자들이었다. 조셰프는 남문을 단단히 잠그고선 서문을 향했다. 마지막으로 확인할 문이었다.
“크억!”
그런데 서문에 도착하기도 전에 누군가의 신음이 들렸다. 짧은 단말마였다. 조셰프와 정찰병들은 빠르게 서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열 명도 넘게 세워둔 문지기들은 모두 쓰러져 있었고, 핏자국은 저택을 향해 이어져 있었다.
몹시 먼 곳에서 달려온 것 같은 말 한 마리가 허겁지겁 저택 안 연못의 물로 목을 축이고 있었다.
“침입자다! 침입자가 발생했다!”
조셰프는 입술을 깨물고선 외쳤다. 서문은 가장 먼저 점검했던 곳이었다. 서문을 시작으로 동쪽과 북쪽을 살피고, 남쪽을 살피고선 한 번 더 살피러 왔었던 것이었다. 방어 계획은 완벽했다. 그러나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침략자의 수준이었다.
발자국은 어지러웠지만 한 사람의 소행임이 분명해 보였다. 고작 한 사람이 이 모든 걸 해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젠장.”
조셰프는 자꾸 한 박자가 늦었다.
그러나 이 한 박자가 엘리아나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는 걸 조셰프는 알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저택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칼자국과 핏자국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
엘리아나는 만일을 대비해서 사용인들과 가족들을 모두 저택 밖으로 내보냈다. 가족들은 예전에 살던 곳으로 보냈고, 사용인들은 적당한 숙소를 잡아서 그곳에 모두 모여 있게 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전쟁에서는 승리할 테지만, 무조건 한 사람은 자신을 찾아올 것이었다.
제리크 헌터 혹은 카르만 헌터.
둘 중 한 명일 것이다. 분명히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지우면서 씩씩대는 표정으로 나타나겠지.
쾅! 엘리아나의 서재 문이 거칠게 열렸다. 엘리아나는 열린 문 앞에 씩씩거리면서 서 있는 사내를 보았다.
그래. 이 순간을 자신도 모르게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칼과 얼굴에 피를 묻힌 채로 약간 비틀거렸다. 노튼 가문의 기사들은 약하지 않았다. 혼자 상대하기엔 버거웠을 것이었다.
“수하라도 두세 명 데려오시지 그랬어요. 고고한 공작께서 직접 손에 피를 묻히시다니.”
“네 목을 베는 데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릴 순 없지. 그런 즐거움을 남에게 넘겨줄 수가 있나.”
“저를 죽이실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금방이라도 쓰러지실 것만 같은데.”
엘리아나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자리에서 일어나 보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러고선 뒤에 있는 큰 창을 활짝 열었다. 제리크는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칼끝을 그녀에게 향한 채였다.
“네년의 농간에 놀아나는 것도 이제 끝이다. 순진한 척 감히 내 대업을 말아먹어?”
“선후를 분명히 해야죠. 이미 망가지고 있었던 일을 나는 발견한 것뿐이에요. 그리고 콘티노 왕국의 국민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고요.”
“닥쳐!”
“제리크 헌터, 이 반역자. 당신이나 닥쳐요.”
엘리아나는 책 더미 뒤에 숨겨 놓았던 총을 꺼냈다. 오델리 백작에게서 빌려 온 것이었다. 그러나 총알은 없었다. 조셰프와 위병들이 오려면 얼마나 걸릴까. 엘리아나의 등 뒤로 땀이 흘렀다.
“한 번도 총을 쥐어 보지 않은 자세군. 쏠 수나 있겠어?”
제리크는 비웃으면서 칼을 겨눴다. 그의 칼끝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위병들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제리크는 총은 안중에도 없는 듯이 엘리아나에게 뛰어들었다.
“죽어라!”
엘리아나가 눈을 질끈 감는 순간, 그녀의 귀 옆으로 무언가가 빠르게 스쳤다.
챙그랑. 제리크 헌터의 얇고 긴 검이 바닥을 뒹구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자 그가 목에 화살을 관통당한 채로 피를 뿜어 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엘리아나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나무 위에 자리한 율리시스가 활시위를 쥐고 있었다.
“율리시스!”
“커, 커컥……. 커커컥.”
제리크 헌터가 손을 허우적거리면서 검을 다시 쥐려고 했다. 다행히 조셰프를 비롯한 위병들이 도착해 그를 포위했다.
그렇게 열 개가 넘는 칼에 둘러싸인 채로 그는 헐떡이다가 눈을 감았다. 엘리아나의 서재 바닥에는 페페가 죽던 그날처럼 진한 피가 흘렀다.
엘리아나는 총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선 율리시스를 향해 몸을 완전히 돌렸다.
“데미테우스 산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날아오기라도 한 거예요?”
“제리크 헌터가 사라졌단 소리를 듣자마자 이곳으로 무작정 달렸어요.”
“…….”
율리시스는 굵은 가지를 타고 위태롭게 큰 창으로 들어왔다. 그에게서는 검에서 나는 쇳내와 은은한 피 냄새가 났다. 율리시스는 엘리아나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살펴보더니 그대로 그녀를 꽉 껴안았다.
“율리시스!”
“오는 내내 엘리아나 생각뿐이었어요. 잘못되면 나도 어떻게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지키고 싶어서……. 그래서 날아오듯이 온 거예요.”
엘리아나는 중얼중얼 자기의 불안한 마음을 내뱉는 율리시스의 등허리를 쓸어 주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조셰프는 엘리아나와 율리시스가 포옹하는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선 제리크 공작의 시신을 들것에 실어서 옮겼다. 어서 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 버리고 싶었다. 순간순간이 괴로워서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셰프와 위병들이 나가고, 엘리아나는 율리시스를 떼어 냈다. 그러고선 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살폈다. 흙먼지가 이곳저곳에 묻어 있긴 했지만, 다친 곳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다 엘리아나 덕분이에요. 그러니까 제리크가 당신을 노린 거겠죠.”
“그냥 내가 싫었던 것일지도 몰라요. 다른 상대들은 덤벼 볼 엄두가 안 나니까 나를 선택할 것인지도 모르고요.”
“이유야 어찌 됐든 엘리아나가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율리시스는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엘리아나는 아직 밝게 웃지 못하고선 말했다.
“상황은 어떻게 된 거예요? 어서 내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을 해 줘요.”
엘리아나의 말에 율리시스는 활짝 웃으면서 답했다.
“이겼어요. 더 이상의 전투는 없을 거예요. 헨리우스 형님은 생포했고, 국경 지역은 기사단장 루스 윈과 길리 커스버트가 각각 지키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엘리아나는 그 말에 안심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예상대로 흘러가서 다행이었다. 비로소 마음 편히 미소 짓는 엘리아나의 모습에 율리시스가 말을 이었다.
“이제 내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을 해도 될까요?”
율리시스는 황금빛 눈동자에 잘 어울리는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엘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율리시스가 곧장 한쪽 무릎을 꿇고선 말을 이었다.
“나와 결혼해 주세요. 엘리아나.”
“…….”
“평생을 행복하게 해 줄게요. 나는, 나 율리시스 밀은 그대를 사랑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게 되어 버렸어요.”
엘리아나는 진실하게 마음을 고백하는 율리시스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