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뭐라고!”
헨리우스는 전서구를 보고 격분했다. 아무래도 조짐이 이상했던 율리시스가 왕실군을 이끌고 가서 자신들의 요충지를 습격했다는 소식이었다.
헨리우스는 자신의 정예군들을 이끌고선 곧장 데미테우스 산맥으로 향했다. 디컨 조르디언에게 얻은 지도를 토대로 가장 수심이 얕고 수로가 좁은 곳에 튼튼한 다리를 설치해 둔 터였다. 그곳으로 가면 산을 넘지 않아도 군수 물자 창고로 갈 수 있었다.
“빨리, 빨리 움직여라! 전우들이 죽고 있다!”
“네!”
우렁찬 병사들의 대답과 함께 한 무리의 군대가 빠르게 움직였다. 헨리우스는 그때까지만 해도 안심하고 있었다. 자신들에게는 ‘최강의 부대’라고 불리는 루스 윈과 제리크 헌터의 지원군이 있었다. 게다가 군수 물자 창고에 주둔하고 있는 군만 해도 300여 명이 넘었다. 국경 지대에는 헨리우스의 기사들과 병사들도 대기하고 있었다.
‘왕위는 빼앗길 수 없다. 아비를 끌어내리고, 형의 목을 베고, 동생의 피를 보아야 한다고 할지라도……’
헨리우스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몰았다. 그에게는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분명 자신들만이 알아야 할 수로 앞에 기사단장 길리 커스버트의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헨리우스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설득하지 못했던 길리 커스버트를 야멸차게 노려보았다.
“경의 선택은 겨우 이것인가? 율리시스의 개가 되는 것?”
“먼저 폐하께 등을 돌린 건 왕자님이십니다.”
“닥쳐라! 이것이 폐하의 뜻이라고?”
“그렇습니다. 콘티노국에 앞잡이들을 만들어서 왕실에 칼을 겨눈 자에 대한 폐하의 뜻입니다. 그리고 평화를 바라는 콘테르 왕국 백성들의 뜻이기도 합니다.”
“흥. 조용히 숨만 죽이고 있었다간 도미누스 형님 꼴이 되었겠지. 나는 그런 바보 천치가 아니다. 이용당하고 버림받지 않을 거라고!”
헨리우스가 말을 강하게 차면서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각자의 뒤에 있던 기사들도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커스버트 단장의 병력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헨리우스는 자신의 오른팔인 겔린에게 소리쳤다.
“후방군과 수로로 빠져서 무기 창고를 사수하라!”
“네!”
순식간에 칼이 부딪쳤다. 북부 특유의 묵직하고 거대한 칼은 부딪칠 때마다 몸이 울릴 만큼의 파동을 일으켰다. 겨우 다섯 합을 겨뤘을 뿐인데도, 팔이 저릴 정도였다.
“길을 비켜라. 경이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칼을 버리십시오, 왕자님. 이미 전쟁은 끝났습니다.”
“가소롭구나. 아직 내 부대의 반의반도 보지 못했을 텐데!”
길리 커스버트는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 헨리우스를 보며 가슴 아파했다. 왕자들의 무술 선생은 다름 아닌 길리 커스버트 본인이었다.
자신보다 재능이 뛰어난 왕자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쪽도 있었다. 헨리우스는 욕심이 많았으나 타고난 힘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자였고, 그 반대에 있는 것이 율리시스였다.
하지만 늘 무술 대회의 1, 2위를 다퉜던 것은 체구가 큰 도미누스나 헨리우스였다. 그들은 그것을 실력이라고 믿었지만, 커스버트 단장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이길 수 있었던 건 율리시스가 승부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란 사실을 말이다. 율리시스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교련 과정엔 없는 동작과 호흡법, 기술을 썼다. 도끼, 칼, 창, 화살 등등 못 쓰는 무기가 없었다. 심지어 새총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괴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본능적으로 전쟁을 싫어했다. 사람의 삶을 단숨에 끊어 내는 것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 권력의 단맛도 무슨 맛인지 알고 싶지 않아 했다.
그가 왕이 되기로 결심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형들이 전쟁을 계속했기 때문이었다.
눈앞에서 사람들이 계속해서 죽어 나가는 광경이 끊이지 않자, 율리시스는 왕의 오랜 부름에 응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길리 커스버트가 있었다. 그는 조용히 분노하는 한편, 평화를 원하는 그의 편에 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그 결정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금 깨닫는 중이었다. 다시 칼날이 부딪쳤다. 그 순간, 무언가가 물 바닥에 처박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악!”
다름 아닌 헨리우스의 오른팔 겔린이었다. 그는 강물에 휘말려서 떠내려가고 있었다. 폭파된 수로의 한중간에 서 있는 투리스 때문이었다. 그는 바닥에 처박아 두었던 커다란 도끼를 들었다.
“인생 끝장나고 싶은 놈들 다 오라고!”
걸쭉한 목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퍼지자, 그 뒤로 백마 한 마리가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반짝이는 금색 머리칼을 가진 소년 같은 얼굴의 율리시스였다. 그는 곧장 말의 고삐를 놓고 화살을 쏴서 커스버트의 뒤를 급습하려던 자의 심장을 맞혔다.
“투리스, 물을 더럽히지 말고 땅으로 던지라고!”
“예, 전하!”
투리스는 도끼 등으로 덤벼드는 사람들의 명치를 내리쳤다. 기절한 사람들은 그대로 한 손으로 던져 나무 아래로 쌓았다. 다섯 사람이 연속으로 당하고 나자, 헨리우스의 병사들은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얼빠진 새끼들! 움직여라!”
헨리우스는 호통을 치면서 부서진 수로 뒤를 보았다.
‘제리크 헌터……. 루스 윈……. 그들은 언제 오는 거야!’
헨리우스는 콘티노의 기사들이 올 때까지 시간만 끌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화살이 뺨을 스쳤다.
“율리시스!”
“다음 활은 일부러 스치게 두지 않을 겁니다.”
“네놈이 이제야 이를 드러내는구나. 왕좌에는 관심도 없는 척 전쟁터를 피하던 놈이!”
“제가 왕이 된다면, 그건 모두 형님 덕분입니다. 누구를 죽여야만 왕좌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형님의 오만을 보고 왕이 되기로 하였으니까요.”
“허튼소리! 너의 야욕은 네 형편없는 류트 실력을 들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얍삽하고 비겁한 놈!”
말을 박차 순식간에 다가선 헨리우스가 칼을 휘두르자, 율리시스는 활을 던지고선 헨리우스의 부하가 든 칼을 빼앗아서 받아쳤다. 순발력은 누구도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헨리우스가 온 힘을 다해서 내리친 검을 손쉽게 돌려서 받아치기까지 했다. 그것도 너무도 쉽게 말이다.
“제 류트 실력을 욕보이신 것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율리시스는 피식 웃고선 뒤집힌 검을 바로 잡았다. 그러고선 헨리우스와 마주 보고 섰다.
“커스버트 경. 형님은 제가 맡겠습니다. 국경 지대를 마저 정리해 주십시오.”
“국경 지대를 정리해?”
헨리우스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되물었다. 하지만 율리시스는 그 말에 대답해 주지 않고선 대신 검을 휘둘렀다. 헨리우스는 공격을 힘겹게 받아 내면서 의문을 잊어버렸다.
‘율리시스의 검이 언제 이렇게 무거워졌지?’
하지만 헨리우스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분명 바로 앞에 있던 검이 미처 막을 틈도 없이 뒤로 돌아가 자신의 목을 겨눴기 때문이었다.
“크, 크읍……. 죽여라.”
“이것이 형님과 저의 차이입니다.”
율리시스는 진중한 표정으로 그의 목덜미를 손날로 내리쳤다. ‘컥’ 하는 소리와 함께 헨리우스가 말에 탄 그대로 엎어져 기절했다. 헨리우스의 군대가 조금씩 물러나면서 칼을 꽉 쥐었다.
“수장이 고개 숙인 싸움에 미래가 있다고 보는가? 칼을 버리고 투항하라, 콘테르인들이여!”
율리시스가 호통침과 동시에 누군가가 빈틈을 노리고 또다시 투리스에게 달려들었다. 율리시스를 보고 있던 투리스는 자신에게 달려오는 마른 병사의 귀싸대기를 쳐서 나무가 있는 곳까지 밀쳐내 버렸다.
잠시의 정적이 흐른 후에 챙그랑, 챙그랑. 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율리시스의 시선은 자신의 앞에 쓰러져 있는 둘째 형의 뒤통수에 닿았다.
***
“뭐? 루스 경이 벌써 출전했다고? 누가 루스에게 먼저 연락을 넣은 거지? 어떤 멍청이가!”
제리크는 루스 윈이 혹시나 오해하지 않을까 싶어서 빠르게 국경 지대로 부대를 끌고 갔다. 모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헨리우스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질리언에게 서신을 보냈지만, 답신이 오기도 전에 움직여야 했다. 제리크 헌터는 카르만에게 서신에 답이 오면 움직이라고 했다.
어차피 카르만의 위병들은 쓸모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힘이 약했고, 훈련도 엉망인 상태였다. 최전방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자신이 직접 가르친 기사단뿐이었다. 제리크는 힘차게 말을 몰고선 국경 지대로 향했다.
하지만 국경 지대로 갈수록 제리크는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함께하겠다고 했던 가문들이 다들 문을 걸어 잠근 것이었다. 상황이 급해 한 명 한 명 따져 묻기도 힘들었다. 막상 전쟁이 시작되니 무서워서 주춤거리는 것인지도 몰랐다.
‘겁쟁이 녀석들. 이게 다 폐하께서 외교니 뭐니 얘기하신 탓이다. 원래라면 그래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전쟁터로 나갔을 터인데…….’
제리크 헌터는 진심으로 탄식했다. 그리고 말의 고삐를 꽉 붙잡았다. 자신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래도 루스 윈이 제 곁에 있으니 다행이었다.
사실상 그의 군대와 헨리우스만 있어도 괜찮았다. 도미누스 왕자는 행방불명이었고, 나머지 왕위 후계자들은 다들 형편없는 놈들이었다. 헨리우스가 종종 경계하던 율리시스라는 놈도 제리크의 눈에는 한량일 뿐이었다.
배부른 자들은 배고픔을 모른다. 전쟁을 겪어 보지 않은 자들이 전쟁에 대해서 모르듯이 말이다. 율리시스는 딱 그 꼴이었다. 꽁무니만 내빼던 샌님이 전투에 능할 리 없었다. 콘테르 국왕도 아들들을 내세웠을 뿐, 콘티노 국왕처럼 외교에만 치중하는 겁쟁이였다.
겁쟁이들. 평화라는 이름의 나태함만을 가진 이들. 제리크 헌터는 그들을 증오했다.
그는 증오의 힘으로 힘차게 나아갔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것은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황량한 국경 지대였다. 그는 말에서 내려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한 슬픈 눈동자와 마주했다. 자신의 친우, 루스 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