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루스 윈은 달렸다.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전장에서 전우를 잃어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러나 모든 물증은 자신의 믿음이 틀렸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제리크 헌터가 반역을 준비하고 있다. 그것도 옆 나라의 왕자를 도와 가면서, 자신을 속여 가면서 말이다. 루스 윈은 절친한 친우의 배신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국경 지대에 도착해 말을 세운 루스 윈의 눈에서는 끝내 눈물이 떨어졌다.
국경 지대에 있는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일반인처럼 옷을 입고 있었지만, 모두 근육질에 오랫동안 훈련한 기사의 태가 났다. 기사단장으로 오래 일해 온 루스 윈은 한눈에 상대가 용병인지, 위병인지, 기사인지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상급 기사 이상의 사람들이었다. 전투에 익숙한 이들. 그것도 최전선에서 일했을 사람들이었다. 낯선 무기와 생김새는 그들이 외국인임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루스 윈은 말에서 내리지조차 못하고 그곳에 그대로 서 있었다.
“뉘시오?”
누군가가 어슬렁거리면서 다가와 그리 궁금하지 않은 척 물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한 경계였다. 거리에 있는 모두가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여차하면 발목이나 팔에 숨겨 둔 단도가 나와서 루스 윈을 겨눌 것이었다.
그는 마지막, 정말 마지막 희망을 품고 말을 이었다.
“제리크가 나를 아직 소개하지 않았나? 나는 콘티노의 왕실 기사단장 루스 윈이다.”
“…….”
남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눈가가 촉촉한 루스 윈의 모습을 의심하는 듯했지만 그 역시 오래 훈련된 기사단장의 몸을 알아볼 줄 알았다. 루스 윈이 입은 복장과 어깨에 있는 표식 또한 그의 신분을 드러내 주었다. 콘티노 왕실에서 기사에게만 주는 장식이 네 개나 붙어 있었다. 최고 권위자라는 뜻이었다.
남자는 몇 분간 그를 지켜보다가 갑자기 몸을 틀었다. 그는 기사들의 예의를 갖춰서 팔을 내밀고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경. 이렇게 급하게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리크 경이나 전하께 보고받은 바가 없어 미처 경황이 없었습니다. 저는 상급 기사 일리야입니다.”
일리야가 인사를 하자 거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일제히 몸을 굽혔다. 루스 윈은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은 고통을 느꼈다.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위병들은, 근위대는 다 죽여 버렸을까? 아니면 어디로 빼돌린 것일까? 어떻게 콘티노의 땅에 타국의 기사들을 숨겨 줄 수 있단 말인가. 자신에게는 콘테르국에서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야 한다면서 누구보다 기사도를 엄중히 외치던 이가 말이다.
루스 윈은 배신감이 온몸을 휘감는 느낌이었지만, 그럴수록 더 냉정하게 행동하려고 애썼다.
“되었다. 나의 단독 행동이었으니 괘념치 마라. 군수 물자 융통이 어렵다고 해서 현장의 상황을 직접 전해 듣고 싶었다.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야 하니까.”
루스 윈은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그 자리에서 만들어 냈다. 그러자, 일리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이미 한차례 군수 물자 비축은 끝났습니다만, 폭약이 유실된 건의 타격이 큽니다. 게다가 곧 전투를 시작할 예정이라서 계속해서 보급품이 들어와야 하는데, 현장의 병사들은 그에 대한 대비가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시급한 조달이 필요한 게 사실이었군. 알았네. 내가 오늘 방문했던 것은 따로 보고하지 말게. 서로의 의견을 불신했다는 오해를 사고 싶진 않군. 물론 보고한다고 해도 어쩔 수는 없겠지만.”
“네, 알겠습니다.”
“또 다른 필요한 것은 없나?”
“병력은 기존 전략대로 양쪽으로 나누어져 있고, 전투 준비도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물자 조달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일리야는 믿음직스럽게 말했다. 루스 윈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말의 머리를 돌렸다. 그는 올 때처럼 빠른 속도로 국경 지대를 벗어났다.
일리야는 그의 눈에 어룽져 있던 크디큰 절망을 보았다. 그것은 아군을 향한 의문이라기보다 배신당한 이의 좌절에 가까워 보였다. 아무래도 헨리우스가 콘테르에서 돌아오는 즉시 루스 윈의 방문에 대해서 보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리야는 자기 부하에게 물었다.
“전하께선 언제 돌아오시기로 되어 있지?”
“오늘 저녁입니다.”
“서둘러 알리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왜 그러십니까? 루스 윈은 우리 편이 아닙니까?”
“난 콘티노인들을 믿지 않아.”
일리야는 그렇게 말하면서 작전 기지인 국경 지대 여관으로 향했다. 그때, 병사 세 명이 피를 흘리면서 경계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당했습니다……. 율리, 율리시스의 군대입니다. 크헉…….”
한 사람은 겨우 말을 하고 숨이 끊어졌다. 나머지 두 사람은 여기까지 오는 데 사력을 다한 듯 말도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일리야가 그를 품에 안고 있자, 전투 단장인 딘이 명령을 내렸다.
“모두 갑옷을 챙겨 입고, 무기를 들어라! 1/3은 이곳 국경 지대에 주둔하면서 지킨다. 상급 기사는 모두 보급 창고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우리의 물자가 모두 그곳에 있다. 반드시 탈환해야 한다! 전하께서도 소식을 들으면 곧장 합류하실 것이다. 겁먹지 말고 칼을 들어라, 콘테르의 전사들이여!”
“와아!!”
우레와도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동료의 죽음으로 조금 더 격앙된 분위기가 있었다.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다. 다만 모두의 머릿속 한편에는 어떻게 그 비밀 보급 창고가 들킨 것인가, 그리고 그곳에 있던 300명의 군사는 어떻게 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승리가 우선이었다. 모두들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 군장을 챙겼다.
이미 수로가 폭파되었고, 주둔하고 있던 군인의 대부분이 전사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였다.
***
“루스 윈 단장이 어떤 결정을 내릴 거라고 생각하시오? 엘리아나 양.”
“어떤 것도 예상할 수 없어요. 그곳에 있는 자들의 목을 다 베어 버리고 돌아올 수도 있고, 아니면 여기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죠.”
“루스 윈은 충직한 기사요.”
“제리크 헌터도 그랬죠. 이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기에 빠른 판단을 내려 준 질리언이나 백작님께 감사할 따름이죠.”
“다른 귀족들도 전부 움직였다고 들었소.”
“각 가문의 부인들이 해낸 것이에요. 자신의 아이들과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한 일이죠. 제가 한 건 없어요.”
“엘리아나 양은 항상 겸손하군.”
“사실을 말한 것뿐이랍니다. 미에 있어서 만큼은 절대 겸손하지 않지만요.”
엘리아나의 농담에 잉그 오델리가 미소를 지었다.
창밖엔 해가 지고 있었다. 전력으로 달려갔다가 돌아온다면 지금쯤 도착했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어쩌면 정말 엘리아나 양의 말대로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루스 경은.”
오델리는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는 듯이 읊조렸다.
엘리아나는 그가 다시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테니까. 친구에게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친구를 죽일 수도 없고. 자신의 어정쩡한 위치를 견디지 못할 테니까.
엘리아나가 그렇게 생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백작의 응접실 문이 쾅 하고 열렸다. 머리가 흐트러지고, 땀으로 범벅이 된 루스 윈이 절망에 가득 찬 표정으로 그들을 보았다.
엘리아나와 오델리 중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한참 동안 숨을 고르던 루스 윈이 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
“무엇을 하면 되겠소…….”
전장에서 완벽히 패배한 장수의 것처럼 힘없고, 좌절로 가득 찬 목소리였다. 오델리 백작은 낮게 한숨을 내뱉었고, 엘리아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경의 군대를 멈춰 주세요. 기사단장 루스 윈의 군대가 멈추면 제리크 헌터의 병력 절반 이상이 멈추게 돼요. 최정예의 기사들만 윈 가문의 기사들이 될 수 있죠.”
“…….”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어요. 루스 윈 경.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전쟁에서 우리 콘티노국을 지켜 내는 것뿐이에요. 경은 늘 하던 대로 그것을 해 주시면 됩니다.”
“늘 하던 대로…….”
“…….”
“하지만 이번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다를 것이오. 내가 제리크에게 칼을 겨눠야 할 테니.”
그는 냉정을 되찾은 표정으로 오델리 백작의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긍정의 뜻임에도 엘리아나와 오델리 백작 중 누구도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 기사단장 루스 윈의 고통과 절망을 절절히 느꼈기 때문이었다.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을 이었다.
“루스 윈 경의 옆을 지키겠소. 혼자보다는 둘이 낫겠지.”
“백작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드리겠어요.”
“엘리아나 양은 어디로 가시오?”
“저는 제 가문으로 돌아갈 거예요. 가서, 이 전투의 화풀이 상대로 로즈 가문이 희생되지 않도록 막아야지요.”
“제리크라면 충분히 그런 선택을 할 수도 있겠군. 오델리 가문의 기사를 일부 보내겠소.”
“감사해요. 다른 가문들에도 문을 걸어 잠그거나, 경계 태세를 갖추라고 얘기해야겠어요.”
“그 뜻은…….”
“네. 제리크 헌터와 헨리우스는 반드시 패배할 것이에요. 그러나 패배와 추방을 눈앞에 둔 공작이 어떤 짓을 할지는 아무도 모르죠. 저는 제 앞에서 공작이 한 사람의 생을 앗아 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단단히 준비해야 해요.”
엘리아나는 페페를 돼지 취급하면서 망설임 없이 목숨을 끊었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페페에게 좋은 감정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의 생이 그렇게 결정되는 건 옳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든 될 수 있었다. 엘리아나는 오델리 백작과 작별한 뒤, 마차에 올라 빠르게 저택으로 이동했다.
전쟁이 시작되고 나면 모든 것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태어난다. 승자와 패자가 나뉘고, 그에 따른 보상이 주어진다. 그리고 누군가는 박탈당하고 죽임을 당한다.
엘리아나는 조셰프의 기사 서임을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일의 사태를 위해 로즈 가문도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못하도록 말이다.
명확한 밝음과 어둠이 있는 것이 전쟁이었다. 엘리아나는 자신이 딛고 있는 자리에 빛이 있음을 확신했다.
어둠은 조금도 찾아오지 못할 것이었다. 적어도 로즈 가문에는 말이다. 그녀는 눈을 바로 뜨고선 앞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