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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91/121)

90화

늦은 밤, 정찰을 나갔던 투리스가 막사로 돌아왔다. 율리시스와 멜번은 지도를 펴놓고 전술에 관한 논의를 이어 가던 중이었다.

“투리스, 이렇게 빨리 돌아왔어?”

“지도가 완전 예술이야. 왕자님, 이 지도는 너무 훌륭해요. 가는 길에 비가 왔는데도 걱정 없었다고요. 게다가 정말 정확해요. 이대로만 가면 문제없겠어요.”

투리스는 몸을 흔들어 비를 우수수 털어 냈다. 그러고선 율리시스와 멜번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투리스가 들고 있는 가죽 지도는 비에 젖어 있었지만, 자수로 놓인 길들은 전혀 번지지 않았다.

율리시스는 엘리아나의 현명함에 다시 한번 반한 기분이었다. 투리스는 자신의 지도를 탁자 위에 올려놓으면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제가 뭘 찾은 줄 아십니까?”

“뭘 찾았는데?”

“다리를 찾았습니다. 여기, 이 구간에 말입니다.”

“다리?”

“지도에 이 구간이 유난히 수로의 폭이 좁게 표현되어 있어서 한번 들러 봤더니 길을 터 놨더군요. 여기에 다리를 넓고 튼튼하게 지어 놨습니다. 아마도 콘테르와 콘티노를 잇는 주요 구간인 것 같습니다. 여기를 지나서 이 길로 곧장 빠지면 산을 절반쯤은 넘지 않아도 되고, 시간도 절약되니까요.”

“역시. 강을 건널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장소는 생각도 못 했네요.”

멜번은 예상하지 못했던 자리에 있는 다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이 지역을 제대로 아는 사람만 설치할 수 있을 겁니다. 애매한 위치인 데다가 사실 지도 없이 찾아갈 수는 없었을 거예요. 게다가 가다 보니 지도엔 없던 넓은 길이 트여 있었습니다. 아마도 군인들이 움직일 통로를 만들어 놓은 것 같아요. 나무가 뽑힌 흔적들이 군데군데 있더라고요!”

투리스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지도의 매력에 흠뻑 빠진 듯한 표정이었다.

율리시스는 그 표정을 보며 웃고선 말을 이었다.

“이 길을 막고, 수로를 폭파하면 어떻게 될까?”

“콘테르로 오는 길이 끊기게 되겠죠.”

“자, 여기에 있는 국경 지대 출입구 1과 2도 같이 막는다면?”

“…….”

투리스는 지도를 뚫어져라 보았다. 멜번은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고립되겠죠. 무기도, 군인들도.”

“주요 물자들이 전부 여기에 있다면?”

“…….”

“여기를 우리가 먹는다면?”

“왕자님.”

“당장 내일 친다면?”

율리시스가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멜번은 침을 한 번 삼키고선 말을 이었다.

“승기가 기울 것입니다. 우리 쪽으로. 아주 유리하게요.”

“해가 밝자마자 폭탄을 제조해. 만들어진 것들은 모두 수로에 설치하고, 해가 산의 중앙부에 걸쳐지기 시작하면 일제히 폭파를 시작해. 그리고 그대로 돌격한다.”

“밤이 아니라 낮에요?”

“오후에 그곳을 점령하고 밤 전투를 대비해야지. 커스버트 경에게 지원군을 요청해서 수로의 앞부분을 맡게 하고, 우리 군은 국경 지대의 입구 1과 2를 각각 나눠 막고 전투를 벌인다.”

율리시스는 지도의 각 주요 부분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투리스는 불퉁하게 말을 이었다.

“그냥 국경 지대까지 쭉 치고 나가면 안 됩니까?”

“안 돼. 그건 우리가 먼저 콘티노국을 공격한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어.”

“멜번 말이 맞아. 엄연한 콘티노국의 국경이니까. 하지만 이곳은 조르디언 상단의 사유지니까 콘테르 왕국의 땅이라고 부를 수도, 콘티노 왕국의 땅이라고도 부를 수도 없지. 조르디언 가문의 정체성이 그러하니까. 게다가 주둔하고 있는 군인들이 대부분 콘테르인이고.”

“게다가 제일 빠른 산길을 지도로 알고 있어서 우리 군에겐 퇴로도 확보가 된 셈입니다. 물자를 유통할 수 있는 곳도 있고요.”

“그렇지. 여기 커스버트 경이 맡을 곳으로는 이렇게 일직선으로 가서 도움을 줄 수 있고, 우리가 가려는 1번과 2번 구역은 각각 이렇게 움직이면 돼.”

율리시스가 손가락으로 지도의 길을 따라 훑으며 말했다. 굵은 자수 실이 손에 닿으니 느낌이 좋았다. 어두운 밤에도 등불 없이 더듬거리면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보내 준 휴대용 양초는 매우 유용했다.

율리시스는 엘리아나를 생각하며 피식 웃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치지 않아도, 2∼3일 안에 그들이 먼저 움직일 거야. 돈줄이 끊겨서 숨이 막히고 있을 테니까.”

율리시스가 그렇게 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막사 밖에서 “왕자님.”이라고 속삭였다. 통신병이었다. 그는 막 도착한 서신을 율리시스에게 전해 주었다.

율리시스는 그것을 뜯어 보고선 함박웃음을 지었다.

“무, 무슨 내용인데 그러십니까, 왕자님? 저희도 궁금합니다.”

투리스가 기웃거리면서 묻자, 율리시스는 상상도 못 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엘리아나가 콘티노의 귀족 부인들과 협력했대. 의약품과 의사, 무기를 고칠 기술자들을 보내 주겠다는 내용이야.”

“대체 그 영애님은 못 하는 일이 뭡니까? 말 그대로 지혜의 여신이네요.”

투리스가 감탄하자, 멜번이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야.”

“응? 왜 아니야?”

“그녀는 지혜의 여신이 아니라, 승리의 여신이야.”

“투리스의 말도, 멜번의 말도 맞아. 지혜와 승리가 우리 곁에 있으니……. 이제 우리는 잘 싸우기만 하면 돼.”

율리시스는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에 멜번과 투리스는 팔을 들어 올리며 경례했다.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막사를 가득 채웠다.

***

기사단장 루스 윈은 황급히 잉그 오델리 백작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가 약소한 금액이지만 돈을 마련했다고 서신을 보내 왔기 때문이었다.

루스 윈은 자존심조차 버린 채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평생을 청렴하게 살았던 루스 윈은 자산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 자산마저 모두 전쟁 준비에 쓴 참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디컨 조르디언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 전쟁이 코앞에 놓인 참이었다.

‘이대로 콘티노 왕국을 망하게 할 순 없어.’

루스 윈은 제리크 헌터와 헨리우스 왕자가 서로 손을 잡고 자신을 속이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콘테르 왕국 후계자 전쟁의 칼날이 콘티노국을 향할 예정이고, 이미 군대가 국경 지대까지 와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이었다.

실제로 콘테르 왕국에서는 수도를 중심으로 기사단장 길리 커스버트가 이끄는 군대가 주둔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태세를 갖추는 것처럼 말이다.

상황은 루스 윈이 제리크 헌터를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루스 윈은 그의 말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애초에 의심할 수도 없었다. 그는 개국 공신의 집안인 헌터 가문의 가주였다. 나라를 배신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적어도 루스 윈은 그렇게 생각했다.

루스 윈은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급히 향하던 걸음은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멈췄다. 잉그 오델리와 함께 앉아 있는 화려한 여성의 모습 때문이었다.

“저분은…….”

“엘리아나 로즈 양입니다. 이번 자금 관련해서 해결책을 가지고 오신 분입니다.”

“오델리 백작, 오해하지 말고 들으시오. 저 사람은 콘테르 왕국과 내통하고 있는 사람이오. 지금 사는 집도 콘테르 왕실과 깊은 인연이 있는 노튼 가문에서 선물한 것인 데다가 정숙하지 못한 소문으로…….”

“제리크 헌터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공작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부인.”

“아니요. 전 함부로 말하겠어요.”

“뭐라고?”

루스 윈이 버럭버럭하면서 호통치려 하자, 엘리아나가 빠르게 말을 가로챘다.

“제리크 헌터는 반역을 도모하기 위해 헨리우스 왕자와 내통하고 있어요.”

그녀는 테이블 위에 왕의 밀서를 올렸다. 그러고선 말을 이었다.

“단 하나뿐인 친구인 루스 윈을 속이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죠. 경은 전 재산을 쏟아부어서 무엇을 했죠? 제리크 헌터는 전쟁을 준비했다고 말했겠죠. 국경 지대에 군인들을 배치하고, 조르디언 가문의 사유지에 무기들을 마련해 놨다고요. 내 말이 틀렸나요?”

“그걸 어떻게…….”

“일단 와서 이걸 보시오. 나 또한 이 밀서를 읽고 나서야 상황이 판단되었소.”

잉그 오델리의 말에 루스 윈은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다가와 밀서를 읽었다.

국왕의 필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루스 윈은 이것이 날조된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콘티노 왕국의 인장은 누구도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믿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친구이자, 동료인 제리크 헌터가 반역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믿을 수 없소. 이건 모두 거짓이오. 폐하를 속이고 있는 것이오!”

“갱스턴 블러가 자금을 더 이상 끌어오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그 일을 잉그 오델리 백작님께서 맡은 이유는요?”

“…….”

“갱스턴 블러의 잘못된 행실은 오래전부터 계속되고 있었어요. 제데이아 테네브가 그걸 눈치채면서 제리크 헌터의 계획이 드러나게 된 것이고요. 질리언 허트가 잡은 해적 또한 조르디언 가문이 콘테르 왕국의 헨리우스 왕자와 손을 잡았다는 걸 실토했어요.”

“그럴 리가……. 질리언 허트는 이미 우리 편에.”

“그 질리언 허트를 누가 소개해 줬을 것 같으신가요? 여동생을 끔찍이 아껴서 헌터 가문에서 일하는 위병이라고 하면 패지 않고는 참지 못할 정도로 그 가문을 싫어하는데 말이죠.”

“엘리아나, 당신이 제리크를 속였군!”

“제리크 헌터가 먼저 나를 속이려고 들었으니까요. 국가의 위기? 이건 콘테르 왕이 콘티노 왕께 보낸 서신이에요.”

“…….”

“두 나라의 왕실은 누구보다도 평화를 원해요. 전쟁을 원하는 건 제리크 헌터와 헨리우스 왕자뿐이에요.”

루스 윈은 엘리아나에게서 서신을 빼앗듯이 가로챘다. 그러고선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이럴, 이럴 수는 없소. 제리크가 어째서……. 어째서…….”

“헨리우스 왕자가 그에게 왕의 자리를 약속했으니까요.”

엘리아나가 냉정하게 말했다. 루스 윈은 하얗게 질려선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괴로워했다.

“아니야… 아니야……. 그는……. 그럴 리가 없어.”

“저를 믿을 수 없다면 지금 당장 국경 지대로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 보세요. 그곳에 콘티노인이 있는지, 콘테르인이 있는지. 무기만 봐도 알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게 무슨 소리요…….”

“이미 콘티노국의 국경 지대엔 헨리우스 왕자의 부대가 들어와 있어요. 당신의 재산과 제리크 헌터의 재산은 그 군부대를 위해서 쓰이고 있고요.”

루스 윈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고선 빠르게 돌아섰다.

“사실이 아니라면 내가 직접 엘리아나 로즈, 당신의 목을 베겠소.”

“베세요.”

엘리아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그러고선 덧붙였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자기 목을 베진 마세요. 콘티노에는 기사단장 루스 윈이 필요해요. 반역자에게 속은 루스 윈이 아니라, 이 나라를 수호할 최고의 기사요.”

엘리아나의 단호한 말에 루스 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곧장 오델리 백작 저택을 박차고 나가서 말에 올랐다. 다른 누구를 시킬 생각도 없었다. 그는 직접 국경 지대를 향해 빠르게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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