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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90/121)

89화

“어머, 이거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면 되는 거예요?”

“네. 기본적인 것은 준비해 왔으니까, 원하시는 것들로 꾸며서 가져가시면 돼요.”

“나 이런 거 처음 해 봐. 어머나 세상에.”

엘리아나가 준비한 모자 꾸미기 시간은 부인들에게 반응이 좋았다. 색깔이 다른 모자들을 준비하고 기본적인 장식을 마친 후에, 그 위로 깃털이나, 꽃, 리본과 같은 장식은 모자를 가져갈 이들이 원하는 취향대로 꾸미는 것이었다.

하센이 구상하고 있는 모자 가게의 주요 판매 상품이기도 했다. 손님이 원하는 대로 의뢰를 받아 제작하거나 혹은 직접 만들 수 있도록 재료를 판매하는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부인들의 호감도 얻고, 반응도 시험해 볼 겸 제품들을 가지고 왔다.

그녀들은 매우 열광적이었고, 엘리아나는 특히 반응이 좋았던 부분들을 예리하게 체크했다.

“난 깃털이 정말 좋아요. 깃털만 가득했으면 좋겠어.”

“그건 너무 새 둥지 같지 않겠어요?”

“어머, 그런가?”

자기들끼리 모자를 꾸며 보다가 커다랗게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이번 다과회엔 오늘 처음 엘리아나를 보는 사람도 있었고, 저번에 만났던 사람도 있었다.

다행히 저번에 만난 사람들이 엘리아나에게 호의적이었기에, 다른 부인들도 쉽게 엘리아나를 받아들였다. 게다가 엘리아나가 도착하기 전에 부인들 선에서 이미 제리크 공작에 관한 얘기도 모두 끝낸 참이었다.

“어제 루스 윈이 우리 남편한테 돈을 꾸러 왔더라고요. 그 자존심에 절대 돈 얘기는 안 하는 사람인데……. 지금 단단히 돈줄이 막혔나 봐요.”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요?”

“제가 미리 언질을 넣어 뒀죠. 기사 봉급 아시지 않느냐고, 당장 그렇게 큰돈은 어렵다고 말했더니 알아서 돌아가더래요.”

성기사의 아내인 체이슨 부인은 아마도 기사단을 돌면서 돈을 꾸러 다니는 것 같다고 소곤댔다. 수아르 부인은 그 소식을 듣더니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블러 백작이 우리 남편을 찾아왔었어요. 혹시 폐하께서 재무 분야 관련 법관들을 불러 갔냐고 묻더라고요.”

“어머, 그래서요?”

“우리 남편이 바보도 아니고, 딱 잡아뗐죠. 안 그러면 그 법관들을 다 찾아갈 기세였다니까요. 그러니까 돈을 빼먹지 말았어야지. 단위가 장난이 아니래요. 백만 디온은 되는 것 같다지 뭐예요.”

“백만 디온이요? 세상에.”

“엘리아나 양에게 고마워해야 해요. 소식을 몰랐으면 우리도 깜빡 속을 뻔했죠. 안 그래도 제가 조심스럽게 얘기했더니 그이도 일전에 폐하께 어느 정도 들은 게 있었던 모양이더라고요.”

부인들은 모두 조심스럽다는 반응이었지만, 각자의 가문을 위해서 충실했다. 모두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고 각자 할 수 있는 만큼의 처신을 하고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보자면 아주 작은 저항이었지만, 모이고 또 모이면 제리크 헌터와 헨리우스의 숨통을 조일 수 있는 큰 한 방이 될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부인들이 자신에게 최신 정보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녀들은 진행되는 상황을 알길 원했다. 엘리아나는 모자에 리본을 달면서 말을 이었다.

“체이슨 부인과 수아르 부인 말대로예요. 듣자 하니, 재무부 수사가 시작된 모양이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돈줄이 막혔대요. 외국에서 군수 물자를 다시 사 오려고는 하는데, 그쪽에서 네 배는 넘는 가격을 부른 모양이에요.”

“세상에……. 돈을 꾸러 다닐 만하네요. 루스 윈 단장이 얼마나 고고한 사람인데, 일개 기사들에게 돈 얘기를 하고 다니겠나 싶긴 했어요. 근데 큰돈 쥐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꽉 잡고 있으니까 다들 안 먹힐 거예요. 그렇죠, 레이첼 부인?”

“그이가 재무부 수사 담당자가 되면서 당분간 큰돈의 흐름이 있는 곳은 무조건 이번 비리와 연관 짓겠다고 얘기한 모양이더라고요.”

“역시 오델리 백작!”

체이슨 부인의 반응에 엘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레이첼 부인을 보았다.

“오델리 백작이 해 주시는 역할이 커요. 게다가 제리크 공작은 오델리 백작을 의심조차 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우리 모임도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라고, 우리 남편이 그러던데요.”

남편이 왕립 은행에 다니고 있는 도리스 부인의 말에 엘리아나가 말을 이었다.

“여자들이 모이면 아무것도 못 할 거로 생각하는 분이거든요. 아마 저한테도 계속 감시를 붙이고 있는 모양인데, 아직 움직임이 없는 걸 보니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요. 레이첼 부인 댁에 갔던 것도, 그 이후에 감옥에 다녀온 것도요.”

“엘리아나, 감옥에도 다녀왔어요?”

“존 조르디언을 죽인 장남을 만나러 갔다 왔어요. 그가 가지고 있는 영지가 주요 전쟁터가 될 것 같더라고요. 그곳의 지도가 필요했거든요.”

부인들은 엘리아나의 행동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자신들이 남편들에게 얘기하고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러나 엘리아나는 잘난 척하거나 으스대려 하지 않았다. 그저 모자를 열심히 꾸미고 있을 뿐이었다.

수아르 부인은 제비꽃 조화를 붙이다가 말고 말을 꺼냈다.

“우리 친정 동생이 의약품 유통 관련해서 좀 알고 있는데……. 전장에는 의약품이 많이 필요하지 않나요? 연결을 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수아르 부인의 말에 엘리아나는 단번에 눈을 빛냈다.

“의약품이라니, 엄청난데요? 그보다 좋은 군수 물자가 있을 수 없죠. 수아르 부인, 정말인가요?”

“그래요? 그렇다면 한번 다리를 놓아 볼까요? 뭐, 별거는 아니지만…….”

“정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엘리아나가 기뻐하자, 레이스를 들고 있던 체이슨 부인도 말을 얹었다.

“그, 그 저희 남편도 기사다 보니까 여기저기 무기를 수리하는 사람들을 좀 모을 수 있다던데……. 그것도 도움이 되려나요?”

“당연하죠. 그분들이 도와주실 수만 있다면요. 곧 전투가 일어날 것 같거든요. 그분들에 대한 보상은 제가 장담할게요. 폐하께서 따로 해 주시지 않는다면 로즈 가문에서라도 꼭 보답하겠어요.”

“보답이라뇨. 이게 다 우리 아이들이 사는 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인데요. 사실 그날은 설마설마했다니까요. 근데 갈수록 눈에 쏙쏙 들어오잖아요. 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감쪽같이 속일 생각을 했는지…….”

체이슨 부인은 그날을 떠올리면 열이 오른다는 듯이 손부채질을 했다.

“헌터 가문에 있는 사용인한테 들은 건데, 그 집 재산이 완전 바닥이 났대요. 있는 돈, 없는 돈 다 갖다가 국경 지역에 퍼부었다는데…….”

“헨리우스 왕자에게 갔겠죠?”

“그러니까요.”

부인들은 남자들의 생각보다 훨씬 예리했다. 할 수 있는 범위의 일들도 많았고, 소식도 빨랐다. 그리고 자신의 구역을 지키려는 강인한 의지가 있다 보니, 무엇이든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모자를 꾸미기 위해 만난 것 같겠지만, 어느새 모임은 전투를 어떻게 후방에서 지원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를 나누는 자리가 되어 있었다.

집안의 중요한 일들을 맡고 있으면서도 정작 국가나 정치에 관련된 일에선 빠져있던 터였다. 그런데 자신들의 손으로 나라를 지키고,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들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움직였다. 그것은 어떤 기사나 군인보다도 강력한 의지와 실천력이었다.

‘그렇게 무시하던 귀족 부인들이 얼마나 강력한지 한번 겪어 보라고, 제리크 헌터 공작.’

엘리아나 로즈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만지고 있던 리본을 단단히 묶었다.

“어머, 세상에 리본이 너무 예쁘다. 나도 해 줘요. 나는 세 겹으로. 이렇게, 이렇게, 세 번.”

체이슨 부인이 밝은 목소리로 말하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엘리아나는 그녀의 모자를 받아 들고선 말했다.

“위대한 체이슨 부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기사들의 말투를 흉내 내자, 체이슨 부인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우리 남편이 하는 거랑 똑같았어요, 똑같았어.”

체이슨 부인의 말에 다른 부인들도 웃으면서 농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엘리아나와 눈이 마주친 시무스 부인은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려 보였다. 당신은 참 대단한 여자라는 뜻으로 말이다.

***

부인들이 돌아가고 난 뒤, 시무스 부인과 엘리아나는 따로 만났다. 엘리아나는 그녀에게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잭슨 남작님은 어때요?”

“이제 거의 다 나았죠. 다만 좀 풀이 죽어서 걱정이에요. 철없는 게 그 사람 매력인데…….”

“전쟁이 끝나면, 시무스 가문에서 본격적으로 상단을 운영해 보는 건 어때요? 귀족이 상업적인 활동을 하는 게 그리 좋지 않게 보인다곤 하지만, 무역 활동은 또 다른 얘기니까요. 게다가 잭슨 남작님은 테르어를 할 줄 알잖아요.”

시무스 부인은 깜짝 놀라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그이에게 기회가 올까요? 조르디언 상단이 있는걸요.”

“디컨 조르디언이 헨리우스 왕자와 협력하면서 신뢰 관계는 완전히 박살 났어요. 헨리우스 왕자가 왕이 된다면 모를까, 이대로 우리가 전쟁에서 이긴다면…….”

“중간 무역 상단이 없어지게 되겠군요.”

“그것도 가장 큰 상단이 없어지는 거죠. 그 빈틈을 노리고 들어올 데는 아마 많을 거예요. 하지만 준비된 자가 그렇게 많을까요? 난 그렇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다들 방심하고 있는 거죠. 콘테르와 콘티노의 교역은 모조리 조르디언에서 해 왔고, 그 조르디언 상단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공고했으니까요.”

“하지만 잭슨도 도미누스 왕자에게 속았는걸요.”

시무스 부인은 잠시 희망을 보았다가 곧장 절망을 본 듯 어두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속은 걸로 치자면 너무 많은 사람이 벌을 받아야 해요. 곧 루스 윈 경도 만날 테지만, 그 사람이 속았다고 해서 기사단장을 그만둬야 하는 건 아니에요. 그 사람만 한 사람은 없어요. 실력과 음모는 분리해야죠.”

“엘리아나…….”

“내가 적극적으로 도울게요.”

“고마워요, 엘리아나. 난……. 정말 첫 만남 때 당신에게 했던 모든 걸 후회해요. 이렇게 좋은 사람인 줄도 모르고…….”

엘리아나는 시무스 부인의 손을 잡았다.

“천만에요. 그때 부인이 나를 주목받게 해 주지 않았다면 나는 이렇게까지 성장하지 못했을 거예요. 우리의 인연도 이렇게 닿지 않았겠죠.”

“엘리아나…….”

“우리 함께 잭슨 남작님의 기를 살려 줘 보자고요. 그러려면 전쟁에서 먼저 이겨야겠지만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게 돕겠어요. 그리고.”

“…….”

“조르디언 상단의 자리를 꼭 시무스 가문의 이름으로 갖고 말겠어요.”

엘리아나는 데이지 시무스의 열정과 포부가 좋았다. 이 힘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 이후에 무역 공백 또한 메울 수 있을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전쟁과 전쟁 이후의 큰 그림을 그리면서 시무스 부인의 손을 더 꼭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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