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6/121)

85화

생각지도 못한 왕의 밀서가 등장하자, 부인들은 술렁였다.

“이, 이건 우리에게 보여 줄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요?”

“그래요. 우리는 그저 자수 얘기나 정원 가꾸는 이야기를 하러 오는 것뿐이라고요.”

수아르 부인의 이의 제기에 체이슨 부인이 답했다. 엘리아나의 시선은 레이첼을 향해 있었다.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선 엘리아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이에게 이야기를 듣긴 했어요. 하지만 이 내용과는 조금 다른데요.”

“제리크 헌터가 루스 윈과 함께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한다는 내용이었죠?”

“……!”

“거기에 오델리 백작님은 무엇을 도와줘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아마도 곧 결정될 거예요. 돈이요. 곧 자금줄이 막히게 되어 있거든요.”

제데이아가 비리를 밝히면 갱스턴 블러가 자금을 유통하지 못하게 된다. 게다가 질리언이 해적과 손을 잡고 군수 물자까지 빼돌리면 더욱 그러할 것이었다.

레이첼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어떻게 그걸 알고 계시죠?”

“이 일과 연관된 사람은 많아요. 나는 얼마 전까지도 헌터 가문에 있었지만, 폐하의 이 밀서를 갖고 있었어요. 이 밀서를 누가 내게 줬다고 생각하나요? 난 지금 수많은 동료와 함께 있어요. 그리고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시무스 부인. 이런 얘기를 하려고 우릴 모은 건가요?”

레이첼이 기분이 나쁘다는 듯이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무스 부인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네. 이 일로 제 남편이 죽을 뻔했기 때문이에요.”

시무스 부인이 엘리아나의 말을 도왔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저는 부인들이 저와 같은 일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피가 마르는 기분과 실제로 남편이 총에 맞은 것을 눈앞에서 봐야 하는 상황을요.”

“하지만 우리는 그저 집 안에 있는 부인들일 뿐이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다고요.”

“수아르 부인의 얘기가 맞아요. 이런 건 남자들이 하는 일이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

레이첼은 선을 긋듯이 말했다. 엘리아나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많아요.”

“우리 말을 누가 들어 주긴 하나요?”

“그걸 역으로 이용하는 거죠. 전 저를 무시하는 제리크 헌터를 속여서 이 밀서를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어요. 이렇게 부인들을 만날 수도 있었고요. 전 이렇게 해서 헌터 가문을 무사히 빠져나오고, 망해 가던 제 가문을 일으켜 세웠어요.”

엘리아나가 말하는 건 반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모두가 그녀가 이혼하게 된다면 더 빈털터리가 되고, 사교계에서도 초라하게 퇴장할 것이라고 했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알지도 못하던 로즈 가문을 사람들의 뇌리에 똑똑이 각인시키고, 보란 듯이 큰 저택을 얻어 명망 있는 가문들과의 인연도 이어 가고 있었다.

엘리아나는 그녀들이 하는 일이 제 일과 다르지 않다는 듯이 강조하며 말을 이었다.

“귀족 부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잘못된 말이에요. 다들 각자의 가문을 운영하고, 움직이게 하는 데 가장 큰 일을 맡아 하고 있잖아요. 가문의 경제적인 사정을 잘 알고 있고, 인맥을 관리하는 건 오히려 여자들이라고요. 각자의 상황에 맞게 사교 활동을 하고, 내조하죠. 그중 가장 출중한 부인들이 모인 자리가 이 다과회 아니던가요?”

흔히 듣던, 여자들끼리 모여서 하는 건 차를 마시며 수다 떠는 게 전부이지 않느냐는 말을 제대로 반박하는 말이었다.

실제로 각자 가문의 운영은 아내들이 도맡아 했다. 사용인 한 명, 한 명을 부리는 것부터 각자의 가문을 위한 사교 활동과 경제 활동까지 모두 말이다.

다과회에 모인 부인들은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는 설득되기도 했다. 그때, 비비안 공주가 엘리아나의 말에 힘을 더해 주었다.

“엘리아나 양의 말이 맞아요. 제리크 헌터 공작과 헨리우스 왕자가 벌이려는 일을 막아야 해요. 전쟁이 일어나면, 그땐 정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거예요.”

그러자, 아이가 있는 수아르 부인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쟁이요? 아이들이 징병되면 어떡하죠?”

“그럴 수도 있겠죠.”

“오, 우리 애들은 아직 너무 어리다고요.”

수아르 부인이 순간 걱정에 휩싸이자, 레이첼이 분위기를 끊어 내듯이 말을 이었다.

“그런 입에 발린 말은 누구든 할 수 있어요. 만약에 그이가 당신으로 인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린다면 어떻게 할 거죠?”

레이첼은 날카로웠다. 엘리아나는 예상했다는 듯이 부드럽게 그녀의 말을 받아쳤다.

“잉그 오델리의 판단력을 그렇게 못 믿나요?”

레이첼은 입술을 깨물었다. 엘리아나는 찻잔의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녀는 잃을 것이 없다는 듯이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제리크 헌터는 잔혹한 사람이죠. 제가 그곳에 있었기에 더 잘 알아요. 호전적이고, 망설이지 않죠. 어쩌면 오델리 백작님이 배신한 걸 알고 칼을 들고 덤빌지도 몰라요.”

“…….”

“하지만 역사 속에 반역자로 남는 것보다는 오델리 가문의 명예를 지켜서 이름을 남기는 것이 백작님이 더 원하는 바가 아닐까요? 그를 제일 잘 아는 것은 레이첼 부인일 테니…….”

엘리아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선 말했다. 수아르 부인과 체이슨 부인은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기다렸다. 레이첼 부인은 자신감 있는 엘리아나의 눈을 피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하……. 다른 답이 나와도 나는 몰라요. 자리만 만들어 줄 테니까요. 그이는 지금 제리크 헌터 경의 말만 믿고 있어요. 허트 가문에서 레이를 통해서 당신과 같은 걸 말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거절했어요. 단호하게.”

“알고 있어요. 그리고 난 설득할 자신이 있어요.”

엘리아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레이첼 부인은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 손짓했다.

“그리고 하나.”

“네.”

레이첼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이 앞에서는 치마를 들춰서 보여 주진 않겠다고 약속해요.”

엘리아나는 환하게 웃었다. 다른 부인들도 그건 아닌 것 같다면서 레이첼의 말에 동의했다. 엘리아나는 소리 내 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답했다.

“절대로 들추지 않을게요. 맹세해요.”

그 말에 안심하는 레이첼을 보며 시무스 부인과 엘리아나는 은밀하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

레이첼은 따로 날을 잡거나, 그러지 않고 다과회가 끝남과 동시에 자신의 마차에 엘리아나를 태웠다.

“다른 날을 잡기엔 시일이 촉박한 문제고, 그이는 눈치가 빨라요. 게다가 마침 오늘 찾아온다 했으니 딱이죠.”

그녀는 곧바로 엘리아나를 데려가는 이유를 설명했다. 마차는 오델리 백작이 마련해 준 레이첼의 거처로 향했다.

여느 애인, 혹은 정부와 달리 레이첼 부인은 정식 백작 부인만큼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오델리 백작의 자식들도 모두 그녀를 잘 따르는 편이었고, 때때로 그곳에 머무르기도 했다.

그러나 레이첼은 어디까지나 오델리 백작의 연인으로서 선을 넘지 않았고, 그에 따라 그가 선물한 별장 외에 프랜시스 가문 명의의 주거지를 따로 가지고 있었다. 성대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엘리아나는 수선하는 하녀에게 가위를 부탁했다.

“약속은 지켜야죠?”

엘리아나는 뱅싯 웃더니, 가위를 들고 손님방에 들어갔다. 그러고선 속치마를 잘라 내었다. 풍성한 치마겹은 몇 겹을 잘라 내어도 겉으로 티가 나지 않았다.

엘리아나는 밀서가 있는 부분의 솔기를 조심스럽게 뜯어냈다. 밀서가 최대한 손상되지 않도록 하며 작업을 마치고 나오니, 레이첼 부인은 흡족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이가 조금 전에 도착했어요.”

레이첼이 방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엘리아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선 응접실을 향했다.

잉그 오델리는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다가 엘리아나를 보고선 눈을 크게 떴다.

“헌터 부인? 여기서 보다니……. 당, 당황스럽군요. 레이첼과 원래도 친했던가?”

“이제는 그냥 엘리아나 로즈일 뿐이죠. 오랜만이에요, 오델리 백작님.”

“오늘 다과회를 했다가 만났죠. 할 얘기가 있어서 데리고 왔어요. 여기에 온 걸 아는 사람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레이첼은 부드럽게 말을 잇고선 자리를 비켜 주었다.

“레, 레이첼. 어딜 가는 거야? 같이 있자고.”

“차를 가지러 다녀올게요. 둘이 나눌 말이 있을 거예요.”

레이첼이 나가고, 잉그 오델리는 눈에 띄게 불편해했다. 엘리아나는 꼿꼿하게 앉은 채로 다른 말을 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 양피지를 폈다.

엘리아나와 거리를 두려고 하던 잉그 오델리는 양피지의 왕실 문양을 보고선 표정이 싹 굳었다. 그는 서신의 내용을 살펴보고선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입가를 쓸어내렸다.

“누구를 통해 이것을 받았소?”

“제데이아 테네브. 질리언 허트요.”

“말이 안 되오. 질리언 허트는 헌터 공작과 같은 편에…….”

“카르만 헌터를 원수처럼 생각하는 질리언 허트를 누가 제리크 공작에게 소개해 줬을 것 같으세요?”

“…엘리아나, 당신?”

“그들은 군사적인 준비를 모두 마쳤어요. 그리고 저흰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 만나 가면서 편을 늘리고 있죠. 콘테르 왕족과도 연관이 있어서 양측 왕실에선 함부로 움직이기가 힘들거든요.”

“…….”

“백작. 의로움의 상징이자, 명문 가문인 오델리 가문의 이름에 오명을 묻히게 두진 않으시겠죠? 이건 단순한 서신이 아니라 폐하의 목소리에요. 저는 그저 그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온 것뿐이고요.”

“…….”

오델리 백작은 고민이 되는 듯이 말이 없었다. 엘리아나는 말을 이었다.

“한시가 급해요. 백작님.”

“나 다음은 누구요?”

“루스 윈 경이요.”

“정말 모든 걸 알고 있었군.”

잉그 오델리는 그 말을 내뱉더니 품속을 뒤졌다. 그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다름 아닌 리볼버 한 자루였다.

그는 엘리아나를 겨누고서 말했다.

“내가 만약 이 모든 걸 알고서도 제리크 헌터 공작을 도우려고 하는 거면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순진한 짓을 하셨소.”

그는 피식 웃었다. 엘리아나는 등줄기로 땀이 흘렀지만, 전혀 동요하지 않는 척했다. 그러나 마음속은 태풍이 치는 바다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엘리아나의 생각에 제리크 헌터가 반역을 일으키고, 그것으로 왕이 된다고 해도 잉그 오델리는 얻을 수 있는 게 없었다.

작위가 더 높아진다고 하더라도 그동안 지켜 온 역사가 있는, 왕가에 충성하는 명예로운 가문이라는 이름은 필시 더럽혀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반역에 조력한 가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엘리아나가 보기에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명예였다.

하지만 그게 틀렸다면?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눈앞의 명예와 권력을 좇았다면? 자신이 파악한 잉그 오델리와 실제 그의 선택이 달랐다면? 엘리아나는 이마에 구멍이 뚫린 채로 죽게 될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백작님. 저는 여기서 죽더라도, 제 결정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엘리아나의 말에 잉그 오델리는 코웃음을 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