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4/121)

83화

“헬렌!”

헬렌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엘리아나가 웃으며 다가왔다. 헬렌은 그녀의 뒤로 우아하게 자리한 커다란 저택이 로즈 가문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담장을 빽빽하게 둘러싼 넝쿨 식물들은 저택을 한층 신비로워 보이게 했다.

“너무 아름다운 곳이네요, 엘리아나. 이사를 축하해요.”

“예쁜 꽃이네요. 고마워요, 헬렌. 여기저기서 과분한 선물을 받네요.”

엘리아나는 헬렌이 건넨 화분을 받아서 옆에 있던 하녀에게 맡겼다. 사용인은 스무 명 남짓으로 모두 노튼 가문에서 고용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외부의 관심으로부터 로즈 가문 사람들을 보호하고, 귀족 예법을 새로 가르치는 등 여러 가지로 바쁘게 일했다. 엘리아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큰 저택의 크기와 여러 가지 일들에 정신이 없었다.

규모가 워낙 큰 터라 모자 공방도 안으로 옮길 수 있었고, 양초 공방도 마찬가지였다. 작위만 없을 뿐이지, 카르만의 저택에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생기가 넘치는 귀족 저택이었다.

헬렌은 글렌이 공들여 단장해 놓은 분수대와 정원을 구경하고선 엘리아나의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헬렌은 앉자마자 편지를 꺼냈다.

“오라버니가 부탁한 서신이에요.”

“고마워요.”

질리언의 서신에는 폭약 탈취에 성공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빼앗은 폭약의 절반은 율리시스의 부대로, 절반은 수도로 옮겼다고 했다. 더불어 제데이아가 갱스턴 블러 백작의 비리 관련 조사를 모두 끝냈고, 왕실에 보고도 마친 상태라 쓰여 있었다.

“일이 잘 진행되고 있군요.”

엘리아나는 서신을 촛불에 바로 태워 버렸다. 헬렌은 그리 밝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델리 백작과는 얘기가 잘 되지 않았어요. 레이의 얘기를 들어 보려 하시지도 않았대요.”

“결국 그랬군요. 오델리 백작다워요. 아마 폐하의 밀서를 보기 전까지는 꼼짝하지 않을 거예요. 일단 제리크 공작을 만나고 난 후라, 나를 만나려 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게 제일 걱정이네요.”

잉그 오델리 역시 명문가라는 긍지가 높고 고집이 센 편에 속했다. 그런 그가 어린 자식의 말을 들어줄 리 없었다. 아마도 헛소문에 휩쓸렸다고 취급했을 게 뻔했다.

“죄송해요.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전혀요. 오히려 용기 내어 나서 줘서 고마워요. 헬렌에게 어려운 결정이었을 거란 걸 알아요. 정말 고마워요.”

헬렌은 그제야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동그란 뺨이 붉게 물들었다. 엘리아나는 갇혀 있던 헬렌의 세상이 한 뼘은 커진 것 같아서 기뻤다. 엘리아나는 그녀의 손에서 못 보던 반지를 발견하고선 손가락으로 쓱 훑었다.

“헬렌. 내게 알려 줄 소식이 또 있지 않아요?!”

엘리아나가 은밀하게 눈짓하자, 헬렌은 얼굴 전체가 새빨개져서는 입술을 움찔거렸다. 엘리아나는 밝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청혼받은 거 맞죠?”

헬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부끄럽다는 듯이 몸을 비비 꼬면서 말을 이었다.

“엘리아나가 먼저 말해 주면 저도 말하려고 했는데…….”

“나는 전해 줄 소식이 아직 없는데, 어쩌죠?”

“노튼 공작과 재혼하는 게 아니었어요?”

헬렌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러자 엘리아나는 전혀 아니라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에요. 그에게 과분한 선물을 받은 건 맞지만, 난 재혼 생각이 아직 없답니다. 이혼 서류에 서명이 마르지도 않았는걸요.”

“그랬군요. 죄송해요, 오해했어요.”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해요. 사교계에서 모두들 내 재혼이 언제 발표될지 기다리고 있다더라고요?”

“사실 오라버니는 아실 것 같아서 여쭤보려고 했는데……. 오라버니가 말도 못 꺼내게 해서 물어볼 수도 없었어요.”

엘리아나는 제게 물어보지 말라며 펄펄 뛰었을 질리언을 상상하고선 푸흐흐 웃음을 터뜨렸다. 엘리아나는 자신을 둘러싼 소문들이 이 상황에서 나쁘지 않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헌터 가문에서 나와서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시점에 나타난 타국의 명문 가문. 그것은 엘리아나의 가치를 높여 주었다. 덕분에 엘리아나는 이혼 후에도 사교계에서 계속 주목받고 있었다. 그녀의 행보, 그녀의 패션,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말이다.

그 덕분에 시무스 부인이 주최하는 사교 모임에도 더 일찍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그 자리에 올 사람들이 다 정해지진 않았지만, 분명 오델리 가문과 친한 부인이 한 명쯤은 포함되어 있으리라.

잉그 오델리를 같은 편으로 만들면 루스 윈에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제리크 헌터에게서 사람을 하나씩 몰래 빼내는 것이 엘리아나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는 그가 엘리아나를 우습게 보고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귀족 부인들끼리의 교류를 말이다.

하지만 아주 잘못된 생각이었다. 시무스 부인은 이를 통해 아무것도 아니었던 잭슨 시무스를 남작의 자리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올릴 수 있단 것은 끌어내릴 수 있다는 뜻도 되었다.

“오델리 백작은 내가 직접 만나 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레이에게도 고맙다고 전해 주고요. 레이가 전적으로 헬렌의 말을 믿고 행동한다는 게 증명된 셈이니 이번 시도는 어떤 의미로는 값진 거예요.”

“네. 저도 레이의 행동을 보고 청혼을 받아들였어요.”

헬렌이 수줍게 말하자, 엘리아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찻잔을 들었다. 청혼. 그 단어를 들으니 율리시스의 황금빛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럼 내일 청혼하면 되겠군요. 내일 같이 떠나요, 엘리아나.

이혼한다고 했더니 바로 그다음 날 청혼하겠다던 맑은 모습이 떠올라 엘리아나가 푸흐흐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재밌는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행복하게 웃어요?”

헬렌이 궁금하다는 듯이 묻자, 엘리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재밌는 해프닝이 생각나서요.”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엘리아나를 기분 좋게 하는 것인가 봐요. 방금 엘리아나의 얼굴이 진짜 행복해 보였어요.”

엘리아나는 헬렌의 말에 잠시 생각했다. 율리시스의 생각이 그렇게 행복했던가? 그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고 기분이 좋았다. 그건 그의 유쾌함이 자신을 즐겁게 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도 있는 것일까. 나는 율리시스를 어떻게 생각하지?’

엘리아나는 잠시 고민이 들었지만, 질문을 고이 접어서 마음 한쪽에 놔두었다. 지금 하기엔 너무 사치스러운 질문 같았다. 엘리아나는 그 질문이 마치 율리시스처럼 제 마음 안에서 통통 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꾹꾹 눌렀다.

헬렌은 여전히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엘리아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식은 언제예요?”

“아, 아직 그런 것까지는 정하지 않았어요.”

“웨딩드레스를 같이 고르러 갈까요?”

“조, 좋아요.”

엘리아나는 금세 화제를 전환하고선 즐겁게 대화를 이어 갔다. 마음 한쪽에 율리시스라는 질문을 놔둔 채로 말이다.

***

데미테우스 산맥으로 정찰을 나갔던 투리스와 멜번이 며칠 만에 겨우 돌아왔다. 산세가 매우 험한지라 길을 찾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그러나 정찰의 성과는 분명했다. 멜번은 자신들이 발견한 부대의 인원과 무기 창고에 관해서 설명했다.

“무기는 잭슨 시무스가 유통하려고 했던 그 무기인 것으로 보이고요. 인원은 300여 명 정도로 세 부대 정도가 함께 있는 것 같습니다. 상주 인원인 듯하고, 최소한의 인원만 배치해 둔 것 같았습니다. 모두 체구가 크지 않은 편에 속했는데, 아마도 길이 좁기 때문일 겁니다.”

“저는 가다가 끼어 죽을 뻔했어요. 왕자님.”

투리스가 정말이라는 듯이 외투를 들어서 상처가 난 복부를 보여 주었다. 멜번은 창피한 줄 알라는 듯이 툭 쳤다.

“다시 그곳을 찾아갈 수 있겠어?”

“네. 하지만 수일이 소모될 것 같고, 대규모로 이동하긴 힘들어 보입니다. 다른 길이 분명 있을 것 같은데, 산세가 워낙 험하다 보니 거기까지 탐색하긴 역부족이었습니다.”

멜번은 율리시스가 가진 지도에 길을 표시하면서 말을 이었다. 데미테우스 산맥에서도 가장 복잡한 곳이었다. 가시덤불 밭이 중간중간 튀어나오고, 지형은 가파른 데다 난데없이 암석 지대가 나오기도 했다. 예상할 수 없는 형태였다.

“이대로 진행하는 건 무리가 있겠네. 그래도 급습하기엔 좋은 것 같은데.”

“네. 거대한 창고도 몇 개 있는 것을 봐서는 이곳을 군수 물자 유통처로 삼으려는 것 같습니다. 콘테르와 콘티노의 중간에 있기도 하고, 숨기기도 좋고요. 그리고 분명 그들은 운반이 쉬운 길을 알고 있을 겁니다.”

율리시스는 멜번의 말을 들으며 지도를 톡톡 쳤다. 이 지역의 자세한 길을 알고 있을 사람은 해당 토지를 소유한 집안 사람뿐이었다. 아마도 디컨 조르디언이 많은 협력을 했을 터였다. 율리시스는 계속해서 지도를 톡톡 치다가 말을 이었다.

“우리도 다른 지도가 필요하겠네.”

“지도가 있는 곳을 아시나요? 아니, 왕자님. 아시면 진즉에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투리스는 긁힌 배를 벅벅 긁으면서 말했다. 율리시스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유력한 곳은 알지만,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그리고 우리가 직접 움직이기엔 위험하겠지.”

“그럼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멜번이 묻자, 율리시스는 빙긋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지혜의 여신에게 도움을 요청해야지.”

“엘리아나 로즈 부인 말씀이십니까?”

“이제 부인이 아니시지 않아? 이혼했잖아. 근데 그분이 왜 지혜의 여신이야?”

투리스는 멜번과 율리시스의 대화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율리시스는 투리스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녀만이 아마 지도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어떻게요?”

“지도를 가진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서.”

‘뒤흔든다’는 말의 의미는 여러 가지였다. 엘리아나는 특유의 사교술로 사람을 다룰 줄 알았다. 제데이아나 질리언의 고압적인 태도로는 어려울 것이었다. 하지만 엘리아나라면 가능했다. 그녀가 다뤄야 할 사람은 강압적인 방법으론 쉽게 입을 열지 않을 테니 말이다.

율리시스가 생각한 ‘또 다른 지도’는 조르디언 집안의 사람이었다. 가주인 존 조르디언을 살해한 범죄자.

트로이 조르디언.

율리시스는 그 이름을 떠올리면서 서신의 첫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엘리아나 로즈 양에게,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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