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누나! 내 모자 못 봤어?”
“내 레슨 북! 베니! 내 레슨 북이 없어!”
“레슨 북은 소파 위에 있어, 모리스! 모자는 침대 위에!”
“베니! 나 달걀 두 개 먹을래!”
엘리아나는 아침을 여는 자잘한 소란에 미소를 지으면서 눈을 떴다. 어린 동생들이 우다다 뛰어다니면서 온 집안에 활기를 더하고 있었다. 그 소란이 비로소 로즈 가문에 왔다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엘리아나는 가볍게 세안을 마치고선 로즈 가문에서 평소에 입던 옷을 입고, 머리를 하나로 높게 묶었다.
“좋은 아침.”
“엘리 언니!”
아이들 특유의 포근한 냄새가 퍼지는 것만 같았다.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던 엘리아나의 아버지와 옆에 앉아 있는 어머니, 부엌에 있는 베니까지. 모든 게 따뜻했다.
“엘리, 조금 더 자도 되는데……. 시끄러웠어?”
“누나, 시끄러웠어?”
“언니, 시끄러웠어?”
베니의 질문에 동생들이 얼굴을 내밀며 연달아 물었다. 엘리아나는 고개를 젓고선 말을 이었다.
“빨리 아침 먹고 공방을 체크해 보고 싶어서. 새로운 디자인도 몇 개 만들고 싶고.”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니니? 일은 조금 천천히 해도 된단다. 베니도 그렇고, 너도 너무 숨 돌릴 틈 없이 일상으로 돌아오려는 것만 같아.”
엘리아나의 어머니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그녀는 길고 넓은 숄을 엘리아나에게 둘러 주고선, 베니의 볼을 쓰다듬었다.
“남작가를 나왔다고 해서 로즈 가문이 무시받는 건 못 봐요. 얼른 자리를 잡고 싶어요.”
“넌 이미 우릴 위해서 많은 걸 이뤘단다, 엘리. 너무 애쓰지 않아도 돼.”
엘리아나의 어머니는 너그러운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성품은 엘리아나를 늘 다정하게 안아 주는 것만 같았다. 엘리아나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전 욕심이 많잖아요.”
“그 욕심이 항상 가족을 위해서 쓰이니까 그렇지. 몸도 다 낫지 않았으면서.”
“부인, 제가 엘리를 잘 챙길게요.”
“베니가 있어서 내가 걱정은 덜하지만……. 베니 너도 무리해선 안 된다. 서로서로 감시해 줘야 해.”
“네. 명심할게요.”
엘리아나가 웃으며 답하고선 어머니를 포근하게 안았다. 엘리아나는 살얼음판 같은 상류 사회에선 느낄 수 없는 이런 따뜻함이 좋았다. 사람으로 대접받는 느낌은 그곳이 아닌 이곳에 있었다. 사소한 잔걱정들과 웃음소리가 오가는 로즈 가문에 말이다.
엘리아나는 식사하자며 가족들을 이끌었다. 엘리아나는 좁은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서 식사를 하는 내내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에게 집은 항상 돌아와야 할 공간이자, 힘을 충전하는 곳이었다.
아직 많은 것이 해결되지 않았다. 전쟁도, 헌터 가문의 반역도, 율리시스의 후계자 선정도 말이다. 엘리아나는 그런 것들을 잠시 잊고 눈앞에 있는 정겨운 풍경만 온전히 담으려고 노력했다. 아주 잠시라도 그런 시간이 엘리아나에게는 필요했으니까.
***
엘리아나는 헌터 가문에 있을 때 만들어 두었던 옷을 꺼내 입었다. 상처 부위 때문에 코르셋을 세게 조이진 못했지만, 매혹적인 화장과 화려한 의상은 그대로였다.
엘리아나는 부채를 펴서 들고선 집 근처의 빈집들을 사서 만든 공방에 들렀다. 모자는 늘 정해진 수량만큼만 제작되었고, 나오는 동시에 팔려 나갔다.
엘리아나는 수요가 많음에도 모자 제작 수량을 더 늘리지 않았다. 그것은 모자의 가치를 더 높였고, 영애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조금 더 높은 가격을 부르며 모자를 샀다.
하나둘 모조품들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모두들 로즈 가문에서 나온 모자를 원했다. 정확히는 ‘엘리아나 로즈가 쓰는 그 모자’를 원하는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카르만 헌터의 네 번째 전 부인’으로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녀는 로즈 가문이라는, 귀족 사회에선 생소한 가문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사교계의 장미였다. 그녀가 하는 화장법과 모자, 옷들은 모두 유행을 선도했다. 엘리아나는 조금 더 고급스러운 재료들이 쌓여 있는 모자 공방을 꼼꼼히 살폈다.
모자 공방에 있는 하녀들은 총 네 명이었다. 그녀들은 모두 정해진 시간에만 일했고, 집으로 출퇴근했다. 남작가에 있었을 때보다 훨씬 밝아지고, 말도 많아진 모습이었다.
“부인, 몸은 괜찮으신가요?”
“걱정해 준 덕분에. 일은 다들 잘 되어 가는 거야?”
“네, 부인. 도도하기로 유명한 영애들이 제가 만든 모자를 쓰고 다니는 걸 보면 너무 짜릿해요.”
밝은 목소리에 엘리아나는 웃으면서 어린 하녀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부인, 제가 새로 만들어 본 모자에요. 저번에 부인께서 알려 주신 디자인에 계절 꽃을 더해 봤어요.”
“하센,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너는 손이 정말 야무지구나.”
이제 곧 스무 살이 되는 하센은 이 모자 공방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자신만의 모자 가게를 차리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선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엘리아나는 계속해서 모자 공방을 유지할 생각은 없었다. 베르겐의 말대로 귀족 사회에서 그렇게 호감을 얻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적당한 때에 그녀에게 공방을 통째로 하센에게 넘겨 줄 생각이었다.
엘리아나는 형편이 나아진다면, 로즈 가문의 명예를 되찾고 싶었다. 학구적인 측면에서 성공할 수 있다면 더 좋았다.
남동생인 조이스와 모리스가 공부에 관심이 많았고, 여동생인 가이아와 제니아는 각각 하프와 피아노에 관심이 있었다. 전부 아카데미에서 전공하고 교수직으로 나아가거나, 연주자나 학자가 될 수 있는 분야들이었다.
엘리아나는 동생들의 미래를 보장해 주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로즈 가문의 이름에 학문과 예술의 이름을 걸어 주고 싶었다.
그녀는 모자 공방의 하녀들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고선 양초 공방으로 향했다. 양초는 특별히 쓸 일이 있어서 많은 양을 제작하고 있었는데, 재료 수급을 시무스 부인이 도와주고 있어서 수월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작업자들이 오래 알아 온 기술자들인지라, 더더욱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엘리아나는 작업된 양초들의 상태와 수량을 확인하고선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 몸이 완벽히 회복된 것이 아니라서 장시간 밖을 돌아다니긴 어려웠다. 집에 다다른 엘리아나는 대문 앞을 서성거리는 남성을 발견했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직 조셰프가 완전히 소속을 옮긴 게 아닌지라 경호병이 따로 없기에, 베니는 엘리아나보다 먼저 걸어가 입을 뗐다.
“저는 로즈 가문의 시녀장 베니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아, 저는 노튼 가문의 집사 글렌입니다.”
“노튼 가문?”
“애덤 노튼 공작님께서 서신과 함께 부탁하신 게 있어서, 엘리아나 로즈 양을 뵈러 왔습니다.”
애덤 노튼은 율리시스의 친구였다. 엘리아나는 베니의 곁으로 가서 손을 내밀었다. 집사는 서신을 건네주었다.
「친애하는 엘리아나 로즈 양에게.
엘리아나, 올리버예요.
길거리에서 목숨을 빚졌던 것을 이렇게나마 갚을 기회가 생겼군요.
노튼 가문에서 오래전부터 주인을 찾고 있던 저택을 로즈 가문에게 선사합니다.
약소한 나의 선물을 제발 거절하지 말아 줘요.
집사인 글렌이 일자리를 잃습니다.
추신. 지금 지내는 곳은 경호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에 질리언과 제데이아도 동의하였습니다.
당신의 올리버로부터.」
“이건…….”
“괜찮으시다면 로즈 가문의 가주께 제가 직접 설명해 드리고 내일 바로 거처를 옮기실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이렇게 큰 선물은…….”
“노튼 가문에서 진 빚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선물입니다. 부디, 받아 주세요.”
글렌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엘리아나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애덤 노튼과 상의해서 그의 별장을 사 버린 율리시스의 행보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금의 집은 조셰프를 데려오지 못할 정도로 좁고, 경호하기가 불편한 곳이긴 했다.
모두가 귀족다운 공간에서 살 수 있다면……. 각자의 방을 가지고, 좁지 않은 식탁에서 식사하고, 하녀들과 위병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면…….
엘리아나는 고민을 길게 하지 않았다.
“들어오세요, 가주께서 허락하신다면 기꺼이 기쁘게 받겠어요.”
글렌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베니와 엘리아나를 따라 로즈 가문으로 들어섰다.
***
“공작님. 엘리아나 로즈 양이 애덤 노튼 공작에게 저택을 선물받았다고 합니다.”
“소란이 났던 그 별장인가?”
“아닙니다. 수도 쪽에 더 가까운 곳인데, 부지가 넓습니다. 사용인들도 지원받은 것 같습니다.”
“콘테르 왕국의 명문 가문과도 인연이 있었다니……. 대체 행실을 어떻게 하고 다녔길래. 쯧.”
제리크 헌터는 혀를 끌끌 찼다. 엘리아나가 선물받은 저택은 헌터 남작 저택만큼이나 크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전의 허름한 집과는 차원이 달랐다.
제리크 헌터는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엘리아나 로즈에게 호감을 느끼는 세력이 많음을 매일 깨닫고 있었다. 그녀가 입는 천박한 옷은 사교계의 유행을 선도했고, 모자 사업은 날개가 돋친 듯이 성장하고 있었다. 귀족 영애들은 그녀와 친해지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문제는 그것을 저지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약속대로 헌터 가문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마치 그런 가문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은 오롯이 엘리아나 로즈, 그녀 자체로 모두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었다.
“역시. 대업이 끝나면 제거하는 게 좋겠어. 우리 집안의 치부를 너무 많이 알고 있으니.”
제리크 헌터는 아직도 첫 만남에서 제게 괘씸하게 굴었던 그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엔 죽여야 이 분이 풀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헨리우스 왕자와 함께 꾸미고 있는 반란이 먼저였다. 콘테르 왕국을 그가 정복하도록 돕고 연합군을 형성하여 콘티노 왕국을 자신이 정복하는 것. 그리고 영토 전쟁을 활발하게 일으켜 콘티노의 전사 정신을 되살리는 것. 제리크 헌터의 제일 큰 목표는 그것이었다.
그 대의에 비하면 엘리아나 로즈 따위에게 가지는 분노는 하찮은 것이었다.
“디컨에게서는 연락이 왔나?”
“아뇨.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풍랑이 너무 세서 배가 길을 잃은 것 같습니다.”
“그 녀석도 멍청한 놈이야. 폭약 하나 나르는 것도 못 하다니.”
제리크 헌터는 책상을 쾅 내리쳤다. 풍랑을 만나서 겨우 오고 있는 그 배에는 폭약 대신 200자루의 모래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