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9/121)

78화

엘리아나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질리언 허트는 번번이 약속을 미루거나, 바다에 나가 있었다. 테네브 부인은 ‘다른 사람과의 교류는 연회에서만으로도 충분하다’며 에둘러서 거절했다.

그 두 가문은 꼭 만나야 하는 가문이었다. 하나는 바다를 꽉 잡고 있었고, 하나는 현금 유통을 꽉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엘리아나 말고 그들과 만날 수 있는 구실이 없었다. 제리크 헌터가 그녀를 하찮게 여기면서도 제안을 거절할 수 없는 이유였다.

“죽다 살아나니 겨우 주제 파악이 되는 모양이구나. 이혼 서류는 바로 준비해 주마. 오늘 저녁에는 네 협탁에 놓아 둘 테니, 너도 내일은 질리언을 이 남작저에 나타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오늘 당장 제 시녀장을 보내서 답신을 받아 오겠어요.”

“이젠 작위고 사업권이고 다 포기하는 것이냐?”

“네. 욕심내지 않아요. 목숨만 살려 주세요.”

엘리아나는 죽음이 정말 두렵다는 듯이 말했다. 제리크 헌터는 크게 비웃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샤르헨 그 계집의 덕을 보는군. 너 같이 잔재주를 부리는 계집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 이참에 전부 치워 버릴 수 있어서 시원하구나. 혹여라도 번복할 생각은 말고.”

“네, 알겠습니다.”

“카르만은 샤르헨이 널 찔렀다는 걸 알고 있나?”

“네, 하지만 절 구해 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아직 샤르헨을 사랑한다고요.”

“어리석은 놈. 협상이란 걸 모르지.”

제리크 헌터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엘리아나의 방을 나섰다. 가겠다는 인사 하나도 없었다. 엘리아나는 문이 닫히자, 움츠렸던 어깨를 폈다.

이혼. 드디어 이곳에서 해방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제리크 헌터를 제대로 잡을 수 있다는 뜻도 되었다. 아무런 연결 고리 없이 제대로 탈탈 털어 버릴 수 있었다. 엘리아나는 조금 전까지 느꼈던 모욕감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해 놓으려 애썼다.

이 감정을 집념으로 만들어서 반드시 이 헌터 가문을 박살 내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다음번엔 살려 달라고 비는 게 내가 아니고 제리크 헌터 당신일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엘리아나는 그가 나간 방문을 한껏 노려보면서 생각했다. 그것을 위해선 건강을 회복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엘리아나가 한숨을 쉬면서 다시 잠을 자려는데, 노크 소리가 났다. 베니였다.

“베니, 마침 잘 왔어. 질리언에게 내일 와 줄 수 있냐고 연락 좀 넣어 주겠어?”

엘리아나가 그렇게 말하자 베니의 뒤에 있던 의사가 고개를 들었다. 눈부신 금발에 아름다운 황금빛 눈동자가 익숙했다. 엘리아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와 눈을 마주했다.

“율리시스?”

율리시스는 빙긋 웃더니 엘리아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의사의 왕진 가방을 들고 후드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빛나는 눈동자와 풍성하고 결 좋은 머리칼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그는 가방을 내려놓고서는 한걸음에 달려와서 엘리아나의 곁에 앉았다.

“엘리아나,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며칠간 이 주위를 맴돌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지금 여기 있어도 되는 거예요? 전쟁은요?”

엘리아나는 목소리를 낮추려 애쓰면서 말했다. 그러자 율리시스는 엘리아나의 손에 입을 맞추면서 말을 이었다.

“당신이 괜찮은지를 봐야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이제 돌아갈 수 있겠군요. 고마워요, 엘리아나.”

“이런 바보 같은……! 폐하의 밀서는 받았어요?”

“무사히 전달했어요. 덕분이에요. 그것 때문에 엘리아나를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 내몬 건 아닌지 나 스스로 자책했어요.”

“무슨 소리예요. 이건 집안 문제에요. 그것도 이제 다 정리될 거고요.”

“범인은 찾았나요?”

엘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선 베니에게 자신의 책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엘리아나는 제 손을 잡고 있는 율리시스의 손을 마주 잡아 주면서 말했다.

“내 걱정은 말아요. 아직 죽을 순 없으니까. 악착같이 살아남을 거예요. 그러니까 율리시스도 다치지 말아요. 칼 이거, 한번 맞아 보니까 알겠네요. 정말 너무 아파요. 이런 걸 어떻게 견디고 전쟁을 하겠다는 건지…….”

“다치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엘리, 여기 책.”

엘리아나는 책을 펴고 일전에 찢어 그 안에 넣어 둔 페이지를 보여 주었다.

“안 그래도 이걸 어떻게 전달해 줘야 하나 싶었어요. 이 부분, 데미테우스 산맥의 끝부분이 존 조르디언이 가지고 있던 땅이었어요. 아내인 쥬드 조르디언에게 상속되었지만, 사실상 디컨이 가진 거나 마찬가지겠죠.”

“콘티노와 콘테르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할 수가 있겠군요.”

“네. 다만 산세가 험하고, 앞이 전부 숲이라서 잘 살펴봐야 해요.”

“정찰병을 보내 볼게요.”

“한번 살펴보고 알려 줘요. 만약에 이 부분을 그들이 이미 사용하고 있다면…….”

“우리에겐 커다란 위협이 될 수도 있겠군요.”

엘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시스는 종이를 접어서 품에 넣었다.

“엘리아나는 한시도 쉬지 않는군요. 몸이 다친 동안은 조금 쉬어요. 나머지는 질리언과 나, 제데이아가 움직일게요.”

“안 그래도 그러려고요. 당분간은 이혼 문제도 있고요.”

“이혼…하는 건가요?”

“그래야죠. 또 칼에 맞을 수는 없잖아요.”

엘리아나는 두 번은 있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싫다는 듯이 말이다. 율리시스는 그 말에 환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언제 하는데요?”

“아마 오늘 저녁 아니면 내일 서류가 나올 거예요. 제리크와 거래를 좀 했거든요.”

“이혼이 그렇게 빨리 돼요?”

“콘티노국은 혼례청이 따로 있어서 거기에 이혼 서류를 내기만 하면 돼요. 빨리 정리해 버려야죠. 이 헌터 가문이랑 엮어서 좋은 게 하나도 없어요.”

엘리아나는 질렸다는 듯이 말했다. 율리시스는 활짝 웃으면서 엘리아나의 두 손을 잡았다.

“왜, 왜 그래요?”

“그럼 내일 청혼하면 되겠군요. 내일 같이 떠나요, 엘리아나.”

“…청혼?”

뒤에 서 있던 베니가 눈을 크게 떴다. 엘리아나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아나는 진지한 율리시스의 표정을 보고선 푸흐흐, 웃음을 터뜨렸다.

“아, 아…….”

엘리아나는 너무 크게 웃었다가 아픈 배를 부여잡았다.

“엘리아나, 괜찮아요?”

“율리시스가 웃긴 얘기를 하니까 그렇잖아요.”

“내 청혼이 웃긴가요?”

“뜬금없이 웬 청혼이에요.”

“진심이에요. 난 엘리아나를…….”

율리시스가 볼을 빨갛게 붉히고선 입술을 움찔거렸다. 그가 자신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엘리아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런 과정도 없이 결혼부터 하자고 달려들 줄은 몰랐다. 꽤 귀엽기는 했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무리인 일이었다.

엘리아나는 율리시스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가 놓았다.

“허튼 생각하지 말고, 중요한 일에 집중해요.”

“내겐 엘리아나와의 일이 제일 중요해요. 폐하께 허락도 받았다고요.”

“나한테는 허락 안 받아요?”

“이, 이제 받아야죠! 허락해 줘요!”

막무가내였다. 그런 율리시스의 모습에 베니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풉, 하고 웃어 버렸다. 엘리아나는 율리시스의 손을 잡고선 말을 이었다.

“내 이혼 후에 하겠다는 말이 그거였어요?”

“네…….”

율리시스는 웃음기가 가득한 엘리아나의 말에 풀이 죽은 강아지처럼 답했다. 엘리아나는 그와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내 대답은.”

“대답은?!”

“율리시스가 공식 왕위 계승자가 된 후에 말해 줄게요.”

“네?”

“율리시스도 내 이혼 후에 말해 주겠다고 했으니까, 우리 똑같은 거예요.”

“그건 너무 늦잖아요.”

“그렇게 늦게 될 생각이에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럼 이제 얼른 돌아가서 이 지역에 뭐가 있는지 알아봐요. 난 회복과 이혼에 힘을 좀 써 볼 테니까.”

“…알겠어요. 대신 다른 사람과 재혼하면 안 돼요! 그건 조건을 어기는 거예요!”

엘리아나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율리시스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면서 말했다.

“제일 위험한 사람 질리언 허트, 그다음에는 제데이아 테네브 그다음에는 엘리아나를 지키는 그 위병! 그리고 또…….”

“알겠어요. 애초에 아직 재혼은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나랑은 생각해 줘요!”

엘리아나는 자꾸만 자신을 웃기는 이 왕자님 때문에 배가 당겼다. 엘리아나는 율리시스에게 다가오라고 했다. 그가 엘리아나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는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생각할게요. 그러니까 이제 이만 가 봐요. 율리시스 때문에 내 상처가 다 벌어지겠어요.”

“엘리, 엘리아나…….”

“왕위 계승자가 되지 않으면 내 생각은 다 날려 버릴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네!”

“그럼 얼른 가요. 너무 오래 있었어요. 여기 감시하는 사람이 정말 많다고요.”

율리시스는 자기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를 벗더니 엘리아나의 목에 걸어 주었다.

“이게 뭐예요?”

“왕위 계승자 후보가 되면 주는 펜던트에요.”

“이걸 날 주는 거예요?”

“정식 왕위 계승자가 되면 다시 받으러 올게요. 청혼과 함께요.”

율리시스는 환하게 웃더니 엘리아나의 손에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그러고선 후드를 다시 뒤집어썼다.

“소식 전할게요. 그 세 사람은 정말 조심해야 해요.”

“알았어요.”

엘리아나가 부드럽게 웃자, 율리시스는 베니와 함께 그녀의 방을 빠져나갔다. 가면서도 엘리아나를 돌아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가 나간 후에 엘리아나는 제 목에 걸린 묵직한 펜던트를 만져 보았다.

콘테르국의 수호석인 가넷이 가운데 박혀 있고, 에메랄드 다섯 개가 주변을 별처럼 감싸고 있었다. 왕위 계승자의 후보가 되었다는 증표. 그것은 매우 귀한 것이었다. 이것을 제게 주었다는 건 자신의 목숨을 걸 전투에서 반드시 이기겠다는 선언과 다름이 없었다.

다시 돌아올 때는 후보가 아니라 전쟁의 승리자이자, 콘테르 왕국의 정식 계승자로서 청혼하겠노라.

엘리아나는 율리시스의 진심이 담긴 펜던트를 꾹 쥐었다. 가운데 박힌 커다란 가넷은 마치 율리시스의 심장과 같이 느껴졌다. 펄떡이는 생명력을 가둬서 제게 준 것 같았다.

연정, 사랑, 연애. 그 모든 건 자신과는 멀다고 생각했던 이야기였다. 율리시스가 이렇게 눈앞에 가져다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노골적인 구애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평소처럼 전략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웃음이 자꾸 새어 나오는 건 왜일까.

“하… 정신 차려야 하는데.”

엘리아나는 침대에 몸을 푹 기댔다. 그러나 웃음이 좀처럼 멎지 않았다. 누군가의 진심을 움켜쥐는 것은 이런 느낌일까. 엘리아나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끼면서 눈을 감았다. 포근하고 따뜻한 잠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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