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8/121)

77화

“범인은 분명 샤르헨이 틀림없어.”

엘리아나를 간호하던 베니는 분한 마음에 씩씩거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엘리아나가 쓰러진 사이에 제리크 헌터는 잉그 오델리를 비롯한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고, 카르만 헌터는 그런 그를 따라다니면서 보조했다.

“불쌍한 엘리.”

베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엘리아나의 곁을 지켰다. 또 다른 습격이 있을까 봐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조셰프는 침입자가 발생했다는 말에 속았던 것을 후회했다. 정작 자신을 속인 위병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도 없었다. 완전히 당한 것이었다.

제리크 헌터가 모든 면회를 불허했기에 어떤 가문도 엘리아나를 보러 올 수 없었다. 베니는 이대로 외롭게 엘리아나를 죽이려는 게 아니냐며 분노했지만, 한낱 시녀장이 제리크 헌터의 말을 거역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엘리아나가 깨어난 것은 사고가 난 지 4일이 지난 오후였다. 그녀는 겨우 눈을 뜨면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베니를 불렀다.

“베… 베니.”

베니가 잠시 잠든 사이였다. 베니는 아주 작은 음성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엘리아나가 옅게 웃으면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 정신이 드는 거야?”

엘리아나는 한번 웃어 주고선 다시 정신을 잃었다. 베니는 울면서 의사를 부르러 뛰어나갔다.

남작 부인이 꼬박 4일 만에 의식을 되찾았다는 소문이 남작가에 퍼졌다. 하지만 분위기는 마냥 밝기보다는 폭풍 전야처럼 고요했다. 마치 이제 또 다른 피바람이 불 것처럼 말이다.

***

카르만은 엘리아나 주변의 경호를 강화했다. 전담 경호병인 조셰프 외에도 다른 위병들을 주변에 배치했다.

엘리아나는 의사가 두어 번 방문한 후에는 완전히 의식을 되찾았다. 여전히 찔린 곳의 상처는 컸지만,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 그녀를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남편 카르만 헌터였다. 엘리아나는 베니에게 부탁해서 귀걸이를 가져와 보여 주었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엘리아나가 꽉 물고 놓지 않았던 증거였다.

카르만은 가만히 귀걸이를 바라보았다. 엘리아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나를 찌른 사람이 누군지 나는 알아요. 봤으니까. 당신도 이걸 보면 알겠죠?”

지난 사교 파티 때 샤르헨이 직접 고른 귀걸이였다. 굉장히 고가인 데다가 단 하나뿐인 디자인에 정밀한 세공이 들어가서 위조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물건이었다.

카르만은 놀라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소.”

“하지만 벌하지 않은 건 아무래도 그녀가 임신했기 때문인가요?”

“…그렇소.”

엘리아나는 옅게 미소를 짓고선 카르만을 보았다.

“카르만.”

그와 눈이 마주치자, 엘리아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이혼 서류에 서명해요. 날 또 죽음으로 내몰고 싶은 사람과 나는 단 하루도 더 살 수 없으니까.”

그녀의 눈빛은 지금껏 봤던 어떤 때보다 더 냉정했다. 마른 입술은 독기 어린 말을 내뱉고선 다물렸다. 카르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일단 쉬시오. 아직 몸이 낫지도 않았잖소.”

“지금만큼 적합한 때가 없죠. 낫자마자 또 당하면요?”

“그런 일이 없도록 할 것이오. 경비를 강화할 것이고…….”

“범인은 샤르헨이에요. 당신의 연인. 당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라고요.”

“…….”

“샤르헨을 제대로 벌주지도 못할 거면서, 나와 결혼은 이어 가고 싶다고요? 우유부단하고 이기적이에요!”

엘리아나는 노골적인 독설을 쏟아부었다. 소리를 조금 크게 내자, 상처 부위가 아팠다.

“아윽…….”

“무리하지 마시오. 샤르헨은 어떤 식으로든 벌을 줄 것이오. 다만 그녀가 홀몸이 아니니 고민하는 것뿐이오.”

카르만은 또다시 이야기를 회피하려고 했다. 피하고 지켜보는 것은 카르만의 주특기였다.

엘리아나는 순순히 따라 줄 마음이 없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오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이 집안에는 너무 많은 칼과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차라리 로즈 가문으로 돌아가서 왕의 밀서를 믿고 활동을 하는 게 나을 것이었다. 시무스 부인과 허트 가문, 테네브 가문처럼 자신의 편에 서 줄 의리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 말이다.

“됐어요, 카르만. 당신과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겠어요. 제리크 공작님과 이야기를 정리할게요.”

“당신의 남편은 나요.”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그래서 뭘 해 줬죠? 난 당신에게 아무것도 받은 게 없어요. 사랑도 받은 적 없고, 첫날밤도 갖지 않았죠. 우리는 길을 지나치는 여느 사람들보다도 더 먼 사이에요. 나에게 남편이라고 소리만 고래고래 지르면 다인가요? 난 당신의 애인에게 칼로 찔렸고, 다음엔 배가 아니라 심장이나 목일지도 모른다고요.”

엘리아나는 아픈 배를 붙잡고선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엘리아나.”

“당신과는 아무런 말도 통하지 않아요.”

“내가 당신에게 그 모든 걸 준다면 어떻게 할 것이오? 마음도, 육체도 모두 준다면.”

“늦었어요.”

“…….”

“내 마음은 첫날밤으로 돌아갈 수 없고, 당신에게 남은 건 실망감과 좌절뿐이에요. 이 모든 걸 당신 선택 하나로 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요?”

“…적어도 이런 반응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소. 내 입장도 헤아려 줄 순 없소? 눈을 뜨자마자 독설이나 퍼붓다니, 어떻게 이런…….”

“마치 내가 이럴 줄 몰랐다는 듯이 말하지 말아요. 아픈 사람 붙잡고 속을 뒤집어 놓을 셈이라면 성공했으니 이제 나가 줘요. 혼자 있고 싶으니까.”

카르만은 한숨을 쉬더니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말을 이었다.

“당신이란 여자는 도무지…….”

“아무런 말도 듣고 싶지 않아요. 나를 위해서라면 그냥 나가 줘요.”

“알겠소. 바라는 대로 해 주지.”

카르만은 몸을 돌려서 방을 나섰다. 엘리아나는 커다란 방문이 닫히자, 간신히 유지하던 표정을 잔뜩 찌푸렸다.

“아, 진짜 아프네.”

칼에 찔린 상처는 보통 상처가 아니었다. 이런 것들을 군인들은 대체 어떻게 견디고 싸우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직접 겪고 보니, 정말 전쟁 같은 건 일어나선 안 됐다. 이런 고통을 수십, 수백 명이 겪을 걸 생각하면 끔찍했다.

“절대 내 동생들은 참전시킬 수 없어. 아으… 아파.”

엘리아나는 아픈 배를 살짝 매만지며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조금 움직이고, 말했을 뿐인데도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힘들어.’

엘리아나는 그동안 자신을 돌보지 않으며 달려온 시간을 생각했다. 아주 조금만 쉬어도 되지 않을까. 엘리아나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끌려가듯이 엘리아나는 잠이 들었다.

***

엘리아나는 깨어난 이후로 다시 이틀을 잠만 잤다. 그러고 나서야 몸이 조금 회복되었다. 호박을 넣고 묽게 끓인 수프를 조금 먹고, 의사의 치료를 받았다. 여전히 졸음이 쏟아졌지만, 그래도 눈을 뜨고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조금은 길어졌다.

엘리아나는 몸이 제 상태를 찾기 시작하자, 제리크 헌터를 불러 달라고 했다. 베니는 ‘그 할아범이 또 무슨 말을 할지 모른다’라며 경계했지만, 엘리아나는 그가 아니면 지금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단 걸 알았다.

제리크 헌터는 침대에 누워서 자신을 맞이하는 엘리아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안주인이 엉망이니 이렇게 집안이 어수선하지. 어떻게 남작 부인이 칼을 맞았다는 이런 수치스러운 소식을 사교계에 알릴 수가 있느냐.”

몸은 괜찮냐는 형식적인 질문도 없었다. 그는 단지 헌터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엘리아나를 꾸짖을 뿐이었다. 엘리아나는 대들지 않고 눈을 내리깔았다.

“이번 일을 계기로 많은 걸 깨달았어요. 공작님께 제가 너무 무례했고, 이 집안은 너무 무서워요.”

“연기라면 집어치워라.”

“정말이에요. 저를 죽이려고 했던 게 누군지 아신다면 제가 왜 이러는지 아실 거예요. 절 죽이려고 한 건 샤르헨 헌터에요. 제게 증거가 있어요.”

“…….”

제리크 헌터는 치정 싸움이 몹시도 불쾌하다는 듯이 표정을 찌푸렸다. 그의 모노클이 곧 부서질 것만 같았다. 엘리아나는 기죽지 않고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평소에 못마땅해하셨던 샤르헨을 처리하실 수 있는 증거가 제게 있어요. 저는 그걸 기꺼이 공작님께 드릴 마음이 있어요. 질리언 허트도 내일 당장 이곳으로 초대할게요. 테네브 부인께는 찾아오라고 말씀은 못 드려요. 그렇게 많이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니까요. 서신을 주신다면 전달은 할게요.”

“왜 이렇게 고분고분하지? 무슨 꿍꿍이냐?”

“저를 이 집안에서 내보내 주세요.”

엘리아나는 그것만이 자신이 유일하게 살길이라는 듯이 말했다. 그녀의 마른 입술은 터 있었고, 얼굴은 심하게 상해 있었다. 그러니 그녀의 말은 더 간절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엘리아나는 일부러 턱을 덜덜 떨면서 말을 이었다.

“저는 죽고 싶지 않아요. 칼에 찔렸을 때… 정말 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어요. 그때 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이 집안에 있으면 또 누군가가 저에게 칼을 들이밀겠죠. 저는 그냥 로즈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솔직히 말하지. 네가 네 그 쥐구멍 같은 집안으로 돌아가서 그 천박한 입을 제멋대로 놀리지 않고 조용히 살 수 있을지 미덥지 않다. 차라리 여기서 죽는 걸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제리크의 말은 그녀가 일어나지 못해도 아무런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엘리아나는 그의 냉혹한 모습에서 카르만의 얼굴을 보았다. 카르만과 제리크는 정반대였지만 묘하게 닮은 점이 있었다. 타인과 공감대 형성이 전혀 안 되고, 자기 위주로만 생각하는 경향에 있어서 그랬다.

‘그 아버지에 그 자식이로군.’

엘리아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면서도, 겉으로는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선 말을 이었다.

“아직 질리언 허트를 설득하지 못하셨잖아요? 전 아직 제가 이용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게 끝나면 저는 더 이상 가치가 없겠지만요. 그러니 지금 이혼을 결정해 주셔야 질리언 허트를 부를 수 있어요. 제게 남은 건 그것 하나뿐이거든요.”

“하.”

제리크는 묘하게 바뀐 듯 바뀌지 않은 엘리아나의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뭐라 토를 달진 않았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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