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윽……!”
찰나의 일이었다. 날카로운 칼은 엘리아나의 단단한 코르셋을 뚫고 들어갔다. 벌벌 떨리는 손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전문적인 암살자는 아닌 것 같았다.
엘리아나가 피를 흘리면서 정신을 잃어 가자 그녀를 공격한 이는 빠르게 도망치려고 했다.
“안… 돼.”
“네가… 자초한 거야.”
낮고 빠르게 스쳐 간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샤르헨.
엘리아나는 쓰러져 가면서도 도망가는 자의 무엇이라도 잡으려고 애썼다. 여자는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었고, 옷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까만 메이드 복이었다.
엘리아나는 그녀의 귀에서 반짝이는 귀걸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옷은 갈아입었지만, 귀걸이는 미처 빼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그럴 정신도 없이 제 방에서 칼을 들고 기다린 것일까. 팔 하나를 들 힘이 없었다. 엘리아나는 할 수 없이 몸 전체를 의지하듯이 앞으로 움직였다.
“으윽…….”
“놔, 놔……!!”
엘리아나는 범인을 부둥켜안았다. 칼이 더 깊이 박혀 들어가는 게 느껴졌지만, 꾹 참았다. 엘리아나는 귀걸이를 이로 잡고 뜯어 버릴 듯이 물었다. 그다음 여자를 세게 밀었다.
“아악!”
귀가 뜯긴 그녀는 엘리아나의 입을 열려고 했지만, 엘리아나는 입술을 꾹 다문 채로 버텼다.
“부인!”
조셰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하는 수 없이 엘리아나를 놓고 급히 도망쳤다. 엘리아나는 입 속에 넣은 귀걸이를 삼키지 않으려 애쓰면서 배를 꾹 쥐었다. 칼이 그대로 박혀 있는 배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왔다.
‘이대로 죽을 순 없는데…….’
엘리아나는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조셰프가 달려와서 그녀를 안았다. 엘리아나는 손으로 반대쪽을 가리켰다. 범인이 그쪽으로 갔다는 뜻이었지만, 조셰프는 자신을 붙잡고 울부짖을 뿐이었다.
의사를 부르라고 했던 것 같았다. 엘리아나는 마지막 의식을 짜내어 입에 있던 귀걸이를 뱉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
“엘리아나가 습격당했다고?”
“네. 저택 안에서 습격당하셨다고 합니다.”
질리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물었다.
“범인은?”
“아직 못 찾았다고 합니다.”
“그럴 리가! 어떻게 남작가의, 그것도 헌터 집안의 보안이 그렇게 허술할 수 있어! 분명 내부자의 소행이야!”
“수사 방향을 그렇게 잡은 것 같기는 합니다만…….”
“엘리아나의 상태는? 괜찮은 건가?”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셔서 지금은 의식이 없으시다고 합니다. 방문도 되도록 피해 달라고 헌터 남작께서 말씀하셨다고…….”
“그 자식이 뭐라고! 어차피 이름뿐인 남편이면서!”
질리언은 진심으로 분해하면서 책상을 내리쳤다. 엘리아나가 이대로 죽는다? 그런 건 있을 수 없었다. 그런 일은 없어야 했다. 질리언은 자신이 선물한 아마조나이트 목걸이를 한 채로 환하게 웃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이 잘 어울린다고 말해 줬던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있던 모습도, 헬렌과 함께 수다를 떨며 정원에 있던 모습도 말이다.
“젠장, 젠장, 젠장!”
질리언은 자신의 책상 위에 있던 책을 내리치면서 화를 냈다. 질리언의 부하는 어쩔 줄 몰라 할 뿐이었다. 질리언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이렇게 허무하게 보낼 순 없어.”
질리언은 중얼거리면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바로 제데이아와 율리시스에게 서신을 썼다. 자신보다 멀리 있는 이들에게는 아직 연락이 닿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어떻게든 머리를 맞대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엘리아나를 그 헌터 가문에서 구출할 방법을 말이다.
‘어쩌면 그 헌터 가문에 있는 모두가 그녀가 죽길 바라는지도 모르지.’
질리언은 그 생각을 하면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고 느꼈다. 연정. 이것은 분명한 연정이었다. 질리언은 뒤늦게 깨달은 마음에 저미는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 거칠게 펜을 움직였다.
***
“뭐?”
율리시스는 헌터 남작가에 심어 둔 첩자로부터 온 서신에 깜짝 놀랐다. 서신엔 엘리아나가 괴한의 습격을 받아서 칼에 찔렸다고 쓰여 있었다.
율리시스는 국경 지역에 터를 잡고선 어떤 방향으로 전쟁을 빠르게 끝낼 수 있을지 의논하던 중이었다.
기사단장인 길리 커스버트는 일부러 요란스럽게 수도를 중심으로 군인들을 배치하고 있었다. 율리시스의 친구인 애덤 노튼은 율리시스인 척 그들 사이에 합류해 있었다. 얼굴이 노출되지 않는 자리에만 쏙쏙 들어가서 일하면서 이름만 올리는 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전부 숨길 수는 없었지만, 당분간 이 지역에 관심을 두지 않도록 눈길을 끌 수 있어서 좋았다. 그렇게 번 시간 내에 전쟁을 준비하면 되는 일이니 말이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일이 율리시스의 발목을 붙잡았다. 율리시스는 보던 지도를 내려놓고선 곧장 작전실을 나섰다.
“왕자님, 어딜 가십니까!”
멜번과 투리스가 꽤 단호한 태도로 율리시스를 가로막았다. 지금은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율리시스가 아무리 멋대로 행동한다고 해도 이건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 전쟁이 코앞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왕자님은 총사령관이십니다. 자리를 지켜 주세요.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고작?”
율리시스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녀는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파트너야. 그녀가 없으면 우리는 전쟁에서 지게 되어 있어.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
“왕자님.”
“이겨도 의미가 없을 거야. 난 그녀에게 최고의 대우를 약속했어.”
“약속은 때때로 못 지킬 수도 있는 겁니다.”
“아니. 그건 지켜야 하는 약속이야. 장차 이 나라, 콘테르국을 책임질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될 테니까.”
어떤 말로도 율리시스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뜨거운 분노를 넘어선 어떤 것이 느껴졌다. 항상 웃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졌고, 냉기만이 가득했다. 멜번은 한숨을 쉬고선 말을 이었다.
“그럼 저희가 다녀오겠습니다.”
“너희가 이곳을 지켜. 그녀만 데리고 올게.”
“왕자 저하!”
“한 번만 더 나를 막으면 누구든 가만두지 않겠다.”
율리시스는 싸늘하게 말하고선 두 사람을 밀어냈다. 그는 검정 후드로 자신의 화려한 금발과 외모를 가리고선 곧장 말 위에 올라탔다.
말은 그가 타자마자 빠른 속도로 앞으로 튀어 나갔다. 멜번과 투리스는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
“엘리…….”
베니는 엘리아나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었던 탓에 회복이 더뎌지고 있었다.
그나마 조셰프가 가장 먼저 발견한 덕분에 밀서가 있는 겹치마는 베니가 숨길 수 있었다. 그리고 둘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뱉어 낸 귀걸이도 꼼꼼히 챙겼다.
하지만 조셰프와 베니는 이 증거인 귀걸이를 내놓지 않았다. 헌터 가문의 누구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질리언이나 율리시스가 나타나면 그때 내밀 생각이었다.
카르만 헌터는 매일같이 엘리아나를 찾아왔다. 하지만 뭐 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침대맡에 앉아서 엘리아나를 몇 시간이고 쳐다보다 갈 뿐이었다.
범인을 찾는 것은 난항을 겪고 있었다. 조셰프는 습격자가 고통에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고 하면서 귀에 상처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귀걸이가 뜯기면서 난 상처를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귀걸이가 엘리아나의 입 안에 있었다곤 말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사실 조셰프와 베니는 그것만으로도 범인을 특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모든 여자 사용인들의 귀 한쪽에 상처가 나 있었던 것이다.
누가 지시한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모두의 한쪽 귀가 칼로 찢겨 있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잠시 잠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서 모르겠다고만 했다. 베니를 제외한 모두에게 상처가 있었다.
베니와 조셰프는 샤르헨도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지만, 샤르헨은 심한 독감에 걸려서 밖으로 나올 수 없다면서 시녀장인 메이가 가로막았다. 카르만이 찾아가도 너무 큰 상처를 받아서 만나고 싶지 않다는 말로 돌려보냈다.
범인은 나타나지 않고, 엘리아나는 깨어나지 않았다. 이대로 사건은 영원히 미궁으로 빠질 것만 같았다.
***
“모, 모두 다 귀에 상처를 냈어? 다 한 거 맞아?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네, 부인.”
샤르헨은 이불을 뒤집어쓰고선 덜덜 떨며 말했다. 메이의 대답에도 불안한지 샤르헨은 창문의 커튼을 모두 치고선 침대에 다시 웅크렸다.
“이, 이건 다 카르만 때문이야. 카르만이 약속을 어겼잖아… 나만 사랑한다고 했어. 나를, 나를 사랑한다고 해 줬어. 처음으로 내게 그런 말을 해 줬다고.”
샤르헨은 과거를 떠올리면서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부모는 얼굴도 몰랐다. 열일곱이 될 때까지 샤르헨은 식모 일을 하면서 입에 풀칠을 했다. 그러나 집안의 남자들은 아직 어린 샤르헨의 미모에 반하기 일쑤였고, 그녀는 늘 부인들에 의해서 맞거나 쫓겨났다.
카르만을 처음 만난 그 날도 일하던 집에서 흠씬 두들겨 맞고 쫓겨난 날이었다. 맨발로 길거리에 웅크려 앉은 그녀에게 카르만은 새 신발을 신겨 주었다.
―나와 함께 가자.
―…도련님께서도 저를 이렇게 버리실 거 아닌가요?
멍과 상처투성이의 샤르헨은 마음도 엉망진창이었다. 그를 믿지 못하고 그렇게 말했을 때, 카르만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난 너를 버리지 않아. 네가 나와 함께 가 준다면.
그는 샤르헨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믿으면 안 된다고 머리론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은 자신에게 달콤한 말을 해 주는 그에게 기울었다.
처음에는 당장의 배고픔과 추위만 달래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카르만이 주는 어설픈 애정에 경계는 차츰 허물어졌다. 다른 여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오직 자신에게만 사랑을 속삭여 주는 그가 좋았다.
샤르헨이 성인이 되던 날, 그 거리에서 새 신발을 신겨 주면서 직접 사랑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랬었잖아. 사랑한다고 해 줬었잖아!”
샤르헨은 자신의 머리칼을 쥐고선 절망했다. 그럴 리 없었다. 다른 사람은 다 그래도 카르만은 그럴 리가 없었다. 그가 자신을 버릴 리가 없었다.
“들키지만 않으면 돼… 들키지만 않으면 엘리아나는 죽고, 나는 남작 부인이 되는 거야. 그렇게 되는 거야.”
샤르헨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는 와중에 그녀의 눈에 메이의 밋밋한 귀가 들어왔다. 순간, 샤르헨은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눈을 매섭게 뜨면서 말했다.
“메이, 다 했다고 했잖아.”
“네. 분명 제가 다 검사했습니다, 부인.”
“한 명이 빠졌어.”
샤르헨의 행동은 순식간이었다. 벌떡 일어난 그녀는 빵을 자르는 나이프로 메이의 귀를 그었다.
“아악!”
메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귀를 붙잡았다. 샤르헨은 바닥을 물들이는 붉은 핏방울을 보고 자신의 열일곱을 떠올렸다.
폭력, 고통, 추위, 배고픔에 떨던 날들.
샤르헨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 절대 버리지 않을 거야. 카르만은 나를 버리지 않을 거야.”
홀린 듯이 중얼거리며 다시 침대로 파고드는 샤르헨의 모습에 메이는 두려움을 느꼈다.
‘제정신이 아니야. 빨리 내 살길을 찾아야 해.’
메이는 자신의 귀를 지혈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