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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76/121)

75화

엘리아나는 방에 돌아오자마자 꽃바구니를 보았다. 베니는 꽃바구니 안에 숨겨져 있던 서신을 전달해 주었다.

“고마워.”

“서신은 네 예상대로 꽃바구니 아래에 잘 밀봉되어 있었어. 두 개야. 하나는 이거, 다른 하나는 이거.”

엘리아나는 두 개의 서신을 차례로 보았다. 하나는 율리시스에게 전해 줘야 할 콘티노 왕의 서신이었고, 하나는 엘리아나가 들고 다닐 밀서였다.

밀서는 잘 찢어지지 않도록 양피지에 적혀 있었다. 엘리아나는 양피지의 반들반들한 부분을 만져 보다가 드레스 룸으로 들어섰다. 그러고선 드레스의 밑에 집어넣는 속치마용 치마 겹을 찾아냈다. 풍성한 치마 겹 사이로 양피지를 넣으니 보이지 않았다.

“엘리아나 뭘 하고 있어?”

“이대로 꿰매 버려야겠어.”

“어?”

“분명 우리가 있을 때 없을 때 상관없이 이 방을 뒤지려고 할 거야. 제리크 헌터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거든.”

엘리아나는 누구라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귀족 부인의 치마 겹 안쪽을 택했다. 이것을 보여 줄 때 치마를 들쳐야 하더라도, 안에 또 치마가 있기에 발가벗는 것은 아니었다. 예의에 어긋나더라도 간절함과 함께 비밀스러운 느낌을 잘 전달할 수 있을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자신이 애용하는 치마 겹 안쪽에 양피지를 대고 단단히 박음질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리송해하던 베니도 엘리아나를 도왔다.

양피지를 꿰맨 후엔 치마 겹을 더 풍성하게 하여 아무리 움직여도 서신이 보이지 않도록 했다. 엘리아나는 직접 입고 몇 번을 움직여서 그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심했다.

“베니, 마차를 불러 줘. 시무스 부인에게 가야겠어.”

“응.”

베니는 엘리아나가 주로 이용하는 마차를 불렀다. 엘리아나는 코르셋 안쪽에 율리시스에게 전달할 서류를 넣고선 움직였다.

말 그대로 엘리아나 그 자체가 밀서가 된 것이었다.

마차가 도착하자, 엘리아나는 마차에 오르기 전 마부와 눈을 마주쳤다. 마부는 율리시스의 부하 중 한 명인 멜번이었다. 그는 폭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엘리아나는 그를 향해 한 번 웃어 주고선 귓가에 속삭였다.

“모자를 두고 내릴게요. 서신은 모자 밑에 있을 거예요. 물론 모자는 내게 돌려줘야 해요.”

엘리아나의 달콤한 목소리에 멜번의 귓불이 빨갛게 변했다. 엘리아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어깨를 밀어내고선 베니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마차의 문이 닫히자마자 베니를 향해 몸을 돌렸다. 베니는 코르셋을 조이느라 묶은 겹겹의 리본을 풀고선 그 안에 있던 편지를 꺼냈다. 그러고선 다시 옷을 여몄다. 흔들리는 마차 안이라서 쉽지 않았지만, 도착 전에는 끝낼 수 있었다.

엘리아나는 약속했던 대로 모자 아래 서신을 두고선 내렸다.

멜번은 마차를 몰기 전에 청소를 하듯이 안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면서 말을 걸었다.

“부인, 모자를 두고 가셨습니다.”

“아, 내 모자. 고마워요.”

엘리아나는 싱긋 웃었다. 멜번은 꾸벅 인사를 하고선 낡은 마차를 몰고 사라졌다. 엘리아나는 멀어지는 마차에 시선을 오래 주지 않았다. 그녀는 여상하게 고개를 홱 돌려서 자신의 목적지를 향했다.

시무스 남작 가문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데이지 시무스는 환하게 웃으면서 달려 나왔다.

“엘리아나!”

“시무스 부인!”

“고생이 많았다면서요. 다친 데는 없나요?”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래도 다친 곳 없이 무사히 돌아왔답니다.”

“들어와요. 안에서 얘기해요.”

시무스 부인은 첫 만남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친절했다. 엘리아나는 그녀와 손을 잡고 응접실로 들어섰다.

“잭슨은 아마도 벌금형에서 그칠 것 같아요. 정말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남작께서도 이번을 계기로 많은 걸 깨달으셨을 거예요. 특히 아내에게 비밀로 하면서 하는 일은 잘되지 않는다는 사실 같은 거요.”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에요.”

시무스 부인은 안도 섞인 웃음을 흘렸다. 엘리아나는 하녀가 차와 디저트를 내주고선 나가자, 시무스 부인에게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시무스 부인.”

“네.”

“긴히 전할 얘기가 있어요.”

“어떤 얘기인데요?”

엘리아나는 치마 겹을 잡아서 휙 올렸다. 시무스 부인은 순간 깜짝 놀랐지만, 속치마 위로 선명히 보이는 양피지에 시선을 돌렸다.

“‘나라를 세운 공신의 후예들이여. 어찌하여 자신들의 손으로 그 창조물을 부수려 하는가.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는 것이 그대들의 천명임을 잊지 말고, 콘티노의 깃발 아래로 모여라’……. 이게 무슨 뜻이죠?”

“제리크 헌터 공작이 콘테르국의 헨리우스 왕자와 손을 잡고 반역을 꾸미고 있어요. 귀족들에게는 콘테르국이 우릴 공격할 것이니, 우리도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하면서요. 헨리우스 왕자와 함께 콘테르국을 공격하고 나서, 콘테르 왕실을 먹으면 그다음은 콘티노국이에요.”

“이럴 수가……. 그건 우릴 모두 이용하는 거잖아요.”

“이용하고 자신과 뜻이 맞지 않으면 죽이겠죠.”

“그렇다면 존 조르디언은…….”

“그는 도미누스와 헨리우스, 그 어느 쪽과도 협력하지 않겠다고 했었다더군요. 그래서 죽었고요.”

엘리아나가 겉치마를 빠르게 내렸다. 시무스 부인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세상에. 엘리아나는 괜찮은 거예요? 당신도 헌터 가문에 소속되어 있잖아요.”

“그들이 저를 인정한 적은 없으니까요. 다만, 제리크 헌터는 제가 질리언 허트를 설득해서 자신의 편에 서게 만들기를 원해요.”

“아니, 그럴 수가…….”

“잭슨 남작님이 수출하려고 했던 무기도 모두 제리크 공작의 손에 들어가 있어요. 남작님에게 배를 제공했던 선박 회사 사장도 죽었고요.”

“그이는 완전히 속아 넘어간 거군요.”

엘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말을 이었다.

“루스 윈은 이미 넘어갔어요.”

“맙소사. 루스 경이요?”

“절친한 친구이자, 이 나라를 위해서 한 몸 바쳐 공을 세운 헌터 가문 가주의 말이에요. 믿지 않을 이유가 없죠. 부인도 제가 아니라 헌터 공작을 먼저 만났다면 그에게 설득되었을 거예요.”

“확실히 그렇군요. 제리크 공작이 역모라니……. 말도 안 되니까요. 나도 서신을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거예요. 콘티노 왕실의 필체와 직인은 감히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니까요.”

위조할 수 없는 필체와 인장이었다. 시무스 부인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 왕실엔 어떤 가문들이 함께하고 있죠?”

“지금은 테네브 가문과 허트 가문, 그리고 콘테르국 왕실이 함께 움직이고 있어요.”

“…좋아요. 시무스 가문도 그곳에 함께하겠어요.”

데이지 시무스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결정했다. 왕의 서신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듯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귀부인들의 다과회 모임을 조금 더 이르게 잡아 주세요.”

“그녀들에게 이것을 직접 보여 줄 생각인가요?”

“네, 그리고 철저히 모른 척해 주세요. 공작은 자신이 조금이라도 밀린다는 걸 알게 되면 바로 전쟁을 터뜨리고 말 거예요.”

시무스 부인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모임은 우선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부인들을 위주로 모으고, 잘 찾아오지 않는 귀부인들은 한 번 더 따로 모셔야겠네요.”

“테네브 부인께 양해를 구하고 그곳에서 모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식물 정원을 개방한다고 하면서요. 상류 귀족들이 모일 수 있으면 좋아요. 제 최종 목표는 루스 윈에게 닿는 거예요.”

“루스 경이 자기 친구가 아닌 엘리아나의 말을 믿어 줄까요?”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까요.”

“엘리아나는, 정말 대단하군요.”

“아니에요. 할 수 있는 걸 해 보는 거죠. 다른 사람들은 거의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있어요. 질리언도 그렇고 제데이아도……. 그리고 율리시스 왕자도요.”

엘리아나의 말에 시무스 부인이 그녀의 두 손을 꼭 쥐었다. 그러고선 말을 이었다.

“우린 우리만의 전쟁터가 있는 거죠. 사교계도 치열하니까요. 할 수 있는 만큼 사람들을 모아 봐요. 귀족 부인들이 의기투합하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보여 주자고요.”

“부인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나 역시 엘리아나가 없었으면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거예요. 잭슨은 물론이고요. 그러니까 우리 이번에도 잘 해내 봐요.”

엘리아나는 시무스 부인의 진심 어린 말에 미소를 지었다. 시무스 부인은 특유의 욱하는 성질이 있었지만, 이런 의리와 관련된 일에는 기꺼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드는 사람이었다. 엘리아나가 시무스 가문을 가장 먼저 찾은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이다음엔 누구에게 향할 건가요?”

“내일은 잉그 오델리 백작을 만나러 가려고요.”

“확실히 오델리 백작을 잡는 건 중요하죠. 하지만 제리크 공작이 이미 만났을지도 몰라요.”

“루크 오델리의 별장에서 사고가 난 이후로 예민해져 있는 상태니까, 함부로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어쨌든 선수를 쳐야죠.”

“필요한 게 있다면 꼭 내게 도움을 요청해요. 나는 이번 주 안에 모임을 잡아 볼게요.”

“좋아요.”

엘리아나는 시무스 부인의 손을 맞잡으면서 고개를 끄덕했다. 시무스 부인은 이왕 온 김에 밥을 먹고 가라며 식사 자리로 이끌었다. 마침 배가 고팠던 엘리아나는 든든하게 식사를 마치고선 저택으로 돌아왔다.

아직 초저녁도 되지 않았음에도 저택은 고요했다. 마치 누가 그렇게 만든 것처럼 말이다.

엘리아나가 마차에서 내려 홀에 들어올 때까지도 조셰프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위병 하나가 다가와서 엘리아나에게 말을 걸었다.

“조셰프는 북쪽에 있는 문에 갔습니다. 외부 침입자가 나타나서요.”

“혼자 갔나요?”

“아니요. 위병 두 명과 함께 이동했습니다. 일이 끝나는 대로 올 것이긴 하나, 위험하니 부인께선 방에 가 계십시오.”

엘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인지 모를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베니는 돌아오던 중간에 로즈 가문의 공방을 보러 내린 참이었다.

엘리아나는 스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복도에 발을 내디뎠다.

‘아무런 일도 없을 거야.’

엘리아나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의 방문을 연 순간, 날카로운 무언가가 그녀의 배를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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