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아침이 되자 화사한 꽃바구니가 헌터 가문에 도착했다.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테네브 공작 부인이었다. 테네브 가문에서 온 시녀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엘리아나에게 직접 꽃바구니를 건넸다.
“부인께서 모자를 정말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또 차를 드시러 오셨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다음번엔 헬렌 양과 함께 와 주신다면 더 기쁠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헬렌에게 연락해서 꼭 가도록 할게요. 정말로 기뻐했다고 부인께 전해 주세요.”
“네, 부인.”
시녀가 물러나자, 옆에 서 있던 조셰프가 꽃바구니를 들었다. 운이 좋게도 제리크가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였다.
제리크는 모노클을 낀 눈을 찌푸리면서 말을 이었다.
“테네브 공작 부인이 보내신 거라고?”
“네, 보시다시피.”
“꼴에 재주가 좋은 편이로구나. 서재로 잠깐 들어오거라.”
“조셰프는 꽃을 곧장 내 방으로 가져다 주고, 베니는 물을 좀 주겠어?”
“네, 부인.”
엘리아나는 자신이 믿을 수 있는 두 사람에게 선물을 부탁하고선 제리크 헌터를 따라서 서재에 들어갔다. 그가 차고 있는 긴 칼이 자꾸 눈에 거슬렸다. 엘리아나는 겁먹지 않은 척하려고 애를 썼다.
“테네브 부인과는 어떻게 친해졌지?”
“사교 파티에서 자연스럽게 친해졌어요.”
“질리언 허트와는?”
“헬렌 허트 양과 만나다가요.”
“헬렌 허트는 왜 만나려고 했지?”
“공작님, 저를 신문하시는 건가요? 저는 범죄자가 아닌데요.”
“이건 헌터 가문의 가주로서 묻는 거다. 넌 우리 가문을 더럽히고 있어.”
“어떤 걸로요?”
“문란한 사생활로. 정숙하지 못한 태도로!”
“전 문란한 사생활을 한 적이 없어요. 누구와 동침을 한 적도 없고, 누구처럼 애를 가지지도 않았어요. 남자들과만 어울렸나요? 그런 것도 아닌데요. 문란함으로 죄를 물으시려면 아드님한테 가셨어야죠.”
“어떻게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고 하느냐, 한 마디도!!!”
진노한 제리크 헌터가 칼로 손을 뻗었다. 엘리아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카르만이 누구한테 손찌검을 배웠나 했더니, 장본인이 여기 계셨네요.”
“…….”
손찌검이라는 말에 제리크 헌터가 침을 삼켰다. 그도 냉정해져야 했다. 만약 카르만에게 엘리아나가 맞은 적이 있다면, 사교계의 물결을 바꾸는 건 한순간이었다.
심지어 그녀 말대로, 수양딸을 임신시켰다는 것도 겉으로 보자면 사실이었다. 사람들이 알음알음 눈을 감아 주는 것도 한계였다.
헌터 가문의 명예는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었다. 베르겐은 엘리아나가 샤르헨의 신분 세탁을 먼저 입에 올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제리크 헌터가 그녀에게 고압적으로 굴기 전의 일이었다.
엘리아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오델리 백작이고, 테네브 부인이고 상관없이 모두를 만나 그 사실을 떠벌릴 준비가 되어 있어 보였다. 녹색의 빛나는 눈동자는 제리크를 옥죄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이지?”
“똑같아요. 카르만이 제게 약속한 금액은 집사인 페페의 재산에서 압류하겠어요. 공방 사업은 베르겐이 집안의 명예를 위해서 하지 않겠다고 하여 재료와 투입된 인력을 제가 샀고요. 이를 통한 수입 활동은 헌터 가문과 별개로 로즈 가문에서 진행하는 거예요. 이것에 대한 방해는 없으셨으면 좋겠어요.”
“…….”
“샤르헨은 지금 이대로는 노출될 수 없어요. 죽었다고 하거나, 시집을 멀리 보냈다고 하고 신분을 세탁해야 해요. 사교 파티에는 대외적으로 내보낼 사람을 하나 정도 두는 게 좋을 것 같고, 가문은 시골에서 사 오는 게 좋겠죠.”
“이혼을 전제로 말을 하고 있군.”
“전 남편의 정부가 낳은 자식을 제 자식 삼아 키울 정도로 비위가 좋지 않아요. 그리고 공작께서도 저를 칼로 찌르고 싶을 만큼 싫어하시잖아요?”
“있지도 않았던 일을 지어 내지 마라.”
“손이 칼 쪽으로 향했던 걸 제 눈으로 봤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라는 말씀이시죠? 알겠어요.”
엘리아나는 길게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뚝 잘라 냈다. 묘하게 고분고분했지만, 제리크의 성질을 살살 긁고 있었다.
“좋아. 원하는 대로 해 주지. 대신 너도 이 가문에 있는 동안 해 주고 가야 할 게 있다.”
“전 이미 쓰러져 가는 남작가의 행정을 돌봤어요.”
“그건 남작 부인으로서 당연한 일이지.”
“저보다 앞서 이름뿐이었던 허수아비들은 누구도 하지 않았는데요.”
“그건 그들이 방만했던 거고.”
“저한테만 엄격하신 이유가 뭐죠?”
“국가가 위기이기 때문이다. 네 문제가 아니야.”
제리크 헌터는 짐짓 진지한 척 말을 이었다. 엘리아나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한 표정을 유지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냐면서 호들갑을 떨면 오히려 제리크 헌터의 의심을 살 게 뻔했다.
“콘테르국의 첫째 왕자와 둘째 왕자의 왕위 계승권 싸움이 심화하면서 전쟁이 일어나려 하고 있다. 내가 직접 접한 소식이지. 심지어 무기를 빼돌리려던 정황까지 잡아 냈어. 멍청한 잭슨 시무스가 그들의 꼬임에 넘어갈 뻔한 일이지.”
이야기는 교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엘리아나가 시무스 가문과 친분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그는 엘리아나가 테르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헨리우스와 도미누스의 정체도 말이다.
엘리아나는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유지했다. 제리크 헌터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어쨌든 그 일을 도왔던 존 조르디언은 사망했다.”
“네, 그건 알아요. 제 앞에서 죽었으니까요.”
“그래. 그곳엔 왜 갔지?”
“시무스 남작 부인과 친분이 있어서요. 잭슨 시무스를 변호해 달라고 부탁받았거든요.”
“짧은 시간에 온갖 가문의 비위는 다 맞추고 다녔구나.”
“그게 고까우셨다면 지금 제게 이렇게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지도 않으시겠죠. 저한테 원하는 게 정확히 무엇이죠? 저는 국가의 위기나 이런 건 잘 몰라요. 가문을 일으킬 돈과 연줄이 필요할 뿐이죠.”
엘리아나는 자신을 투명하고 뚜렷하게 표현했다.
“넌 생각이 짧구나. 국가가 없으면 돈도, 연줄도 다 필요 없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이 가난한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도 말이다. 하지만 제리크 헌터 앞의 엘리아나 로즈는 몰라야 하는 사실이었다.
엘리아나는 흥미 없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지금은 평화로운데요. 그리고 콘테르국은 우리의 이웃국이에요. 다른 나라는 침범했지만, 우리는 한 번도 침범하지 않았잖아요.”
“그 말을 다시 하자면, 주위 국가들이 모두 침략당하고 우리 하나가 남은 거지. 이건 외교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폐하께 말씀드려 봤지만, 왕실은 위기감이 전혀 없더구나. 마치 너처럼.”
제리크 헌터는 설명하는 중에도 엘리아나를 무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엘리아나는 그저 제리크 헌터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는 듯이 말이다.
제리크 헌터는 그 눈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국제 정세에 대해서는 까막눈이구나. 어쨌거나 너도 내가 네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곤란할 테지. 재혼 상대도 있을 텐데 말이야.”
엘리아나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잘못 짚으셨어요. 제 재혼 상대는 없어요. 결혼으로 망하는 건 이번 한 번으로 족해요. 질리언 허트는 테네브 공작 가문과 혼담이 오갈 거예요. 에이린 테네브를 제가 직접 연결해 주고 있죠. 레이 오델리는 헬렌 허트와, 올리버 공작은 말 안 해도 대대로 그랬던 것처럼 콘테르국의 공주들과 결혼할 테고요.”
“…….”
“그리고 이번에 말씀드린 조건들은 제가 이미 받은 것들이에요. 절 설득하려면 더 큰 조건을 가져오세요. 그래야만 거래가 돼죠. 전 헌터 가문처럼 나라를 위해서 헌신해야 한단 생각이 없어요. 그렇게 혜택받은 것도 없고, 평생 거지처럼 살아오기만 했죠. 돈이 될 만한 걸 말해 주세요. 그러면 바라시는 대로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맡겨 주신 일을 문제없이 처리할 테니까.”
엘리아나는 일방적으로 대화를 끝내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제리크 헌터가 그녀를 붙잡듯이 말을 이었다.
“잠깐!”
“…….”
“이혼 후에 사업을 한다고 했지? 조르디언 상단과의 사업권을 따내 주마. 그리고 너의 아무것도 아닌 로즈 가문에 작은 작위라도 내려 주지. 그래야 네 동생들이 그럴듯한 집안에 혼담이라도 넣어 볼 텐데, 어떠냐?”
잭슨 시무스가 제안받았던 것과 비슷했다. 약한 사람들의 욕망을 건드는 제안이었다. 작위와 사업권, 그것만 있으면 상류 사회에 진입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안겨 주면서 말이다.
엘리아나는 그것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마지막엔 총에 맞거나 칼에 맞아서 죽는 결말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입막음을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화사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제 좀 대화가 되네요. 조르디언 상단의 사업권과 작위라면 뭐든 해야죠.”
엘리아나는 마치 그 말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다시 자리에 앉아서 제리크 헌터를 향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흥미가 가득 생겼다는 듯 몸을 앞으로 뻗기도 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될까요, 아버님?”
아버님이라는 소리에 제리크 헌터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의 눈빛에서는 경멸이 묻어 나왔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상관없다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제리크 헌터의 입이 열렸다.
“질리언 허트에게 방금 전 내가 말한 이 내용을 전달하고, 나를 만나러 오게 해라. 아주 은밀하게 해야 한다. 내용은 곡해가 없어야 하고, 위기 상황임이 강조되어야 해.”
“…….”
“난 개국 공신인 헌터 가문의 가주다. 이 상황에서 나라를 반드시 지켜 내야 해.”
엘리아나는 그의 그런 말이 역겹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티 내지 않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선 말을 이었다.
“편지를 써 주세요. 직인을 찍어서요. 내용은 그 자리에서 확인시키고 불태우도록 할게요.”
“내가 너의 뭘 믿고 그런 밀서를 전달하게 하지?”
“질리언은 절 친구로는 생각하지만 그런 면에서 똑똑한 여자라고 생각하진 않는다고요. 믿음을 주기 위해선 어쩔 수 없어요.”
“…….”
“아주 간단하게만 적어 주세요. 누구한테 들켜도 티가 나지 않게.”
엘리아나는 은밀하게 말했다. 제리크 헌터의 눈이 흔들렸다.
“…정말 어쩔 수가 없군.”
엘리아나는 다행이라는 듯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사실 하시는 말씀의 절반 정도는 이해를 못 했어요. 어쨌든 위기 상황이라는 것만 전달할 뻔했다고요.”
엘리아나는 큰일이 날 뻔했다는 듯이 말했다. 제리크 헌터는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아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자신을 멍청하게 보는 남자만큼 다루기 쉬운 것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