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카르만!”
샤르헨의 목소리는 애달팠다. 곧 쓰러질 것처럼 가냘프기도 했다. 엘리아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카르만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남작가에 조금 더 남을 수 있는 건 전략상 좋은 일이지만, 카르만이 제게 진심이 되는 건 곤란한 일이었다. 괘씸한 일이기도 했다.
‘이제야?’
엘리아나는 아직도 첫날밤에 느꼈던 그 모욕감과 절망감을 잊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돌아설 수도 없는 가난한 가문이라는 걸 이용해서 자신들의 사랑을 지키려 한 이기적인 모습도 말이다.
엘리아나는 도도하게 말했다.
“그건 내가 곤란하겠는데요.”
“…당신은 이혼을 원한다는 거요?!”
“누군가가 저를 죽이려고 하고 있어요. 아마도 정숙하지 못한 남작 부인이 싫은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이겠죠.”
엘리아나는 굳이 노골적으로 샤르헨의 이름을 말하진 않았다. 하지만 샤르헨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를 모함하려는 거예요! 그녀는 싫은 척 모든 걸 다 챙긴다고요! 돈도 챙기고, 솜씨 좋은 하녀들도 빼 갔어요. 게다가 오늘은 종일 나를 정원에서 일하게 했어요! 아이를 가진 몸인데도요! 그리고 이젠 저에게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범죄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잖아요. 저런 엘리아나를 용서할 건가요?”
“난 그게 샤르헨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는데, 제 발이 저린 모양이에요?!”
“이 상황에서 카르만이 가장 먼저 의심하는 게 나일 게 뻔하잖아요!”
“그거야 내 알 바가 아니죠.”
“두 사람 모두 조용히 하시오!”
카르만의 호통에 엘리아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싸움의 불씨는 자기가 던져 놓고선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람?’
엘리아나는 표정에서 불만을 숨기지 않고선 말을 이어 갔다.
“아무튼 나는 이 자리가 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자리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이미 재혼 상대를 구했기에 그런 건 아니고?”
“그렇다고 하면, 당신이 나를 욕할 자격이 있나요? 내 눈앞엔 당신의 애를 가진 샤르헨이 있다고요.”
카르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샤르헨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카르만에 대한 배신감과 엘리아나에 대한 미움이 뒤섞여서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옆에 있던 메이가 가까이 다가가 부축하고서야 겨우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엘리아나는 그걸 지켜보다가 말을 이었다.
“이제 두 사람이 생떼 쓰는 건 더 이상 보고 있기가 힘들어요. 베르겐과도 얘기가 끝났고요. 이미 가주님께도 보고가 완료되었을 거라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가주인 제리크 헌터의 말을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은 셋 중 아무도 없었다. 카르만 헌터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한들 그의 말을 완전히 어길 순 없었다. 그럴 수 있었다면 네 번째 부인으로 엘리아나가 들어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집안 꼴이 잘도 돌아가는구나.”
그 때, 우렁찬 목소리가 계단 위에서 울려 퍼졌다. 식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했다.
그곳에는 백발의 노신사와 베르겐이 서 있었다. 청록색 벨벳으로 만들어진 군복을 입은 노신사는 모노클(monocle)을 끼고 있었다. 깐깐해 보이는 마른 체구임에도 탄탄한 몸은 그가 타고난 군인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제리크 헌터.
엘리아나는 그를 본 순간,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녀를 비롯한 카르만과 샤르헨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춰 인사했다. 제리크는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오면서 잔소리를 이어 갔다.
“식사 자리에서 입은 음식물이 보이지 않도록 작게, 말소리는 조용히, 팔꿈치는 테이블에 닿지 않게. 이 기본적인 매너들도 잊어버린 자들을 어떻게 헌터 가문의 일가라고 할 수 있지? 베르겐에게 보고받던 것보다 더 가관이구나.”
“어쩐 일이십니까?”
“별것도 아닌 일로 집안이 들썩거린다기에 내 직접 정리하러 왔다. 천한 것이 임신한 게 무슨 유세라도 되는 양, 이혼이니 뭐니 논하게 내버려 두다니……. 네가 그러고도 헌터 가문의 차기 가주라고 할 수 있겠느냐?”
샤르헨이 입술을 깨물었다. 엘리아나는 수치심으로 붉게 물든 샤르헨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나 그녀는 제리크 헌터 앞에서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엘리아나는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여기서 제리크 헌터에게 그렇고 그런 이미지를 보여선 안 되었다. 만만하거나 멍청해 보이지 않는, 독보적인 이미지를 심어 줘야 했다.
엘리아나는 차분히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치켜뜨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임신은 별일이죠. 그것도 수양딸과 양아버지 사이의 임신인데, 그걸 견딜 귀족 부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에게 상당히 무례한 말씀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는군요. 제리크 헌터 공작님.”
“엘리아나!”
카르만이 엘리아나를 말리려고 했지만, 제리크는 매우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엘리아나의 이마를 툭 쳤다.
“돼먹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난 주제에 그것도 귀족이라고 입만 나불거린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군.”
탁.
엘리아나는 자신의 이마를 쳤던 제리크의 손을 밀어냈다. 말이 밀어낸 것이지, 약하게 내리친 것과 다름없었다. 베르겐의 눈이 커졌다. 제리크도 마찬가지였다.
“이,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제가 말한 것엔 대답하지 않고, 저를 꾸짖는 방향으로 대화 주제를 돌려 버리시네요. 가문을 건드리면 제가 발작이라도 할 것 같았나요? 제리크 헌터 공작님, 제가 사교계에 이 일을 정식으로 문제 제기하고 가문의 명예에 먹칠하길 바라시는 게 아니라면.”
“…….”
“그런 고압적인 태도는 버리셔야 할 겁니다. 저는 이렇게 저를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과는 대화할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다시는.”
“…….”
“함부로 제 몸에 손대지 마세요. 가문은 보잘것없지만, 고고한 그 얼굴을 제대로 못 들게 하고 다닐 수 있을 만큼 입은 잘 나불댄답니다.”
엘리아나는 말을 마치고선 제리크 헌터를 지나쳐서 계단을 쿵쿵 밟고 올라갔다.
제리크 헌터의 얼굴에서는 당황을 넘어서 허망함까지 보였다. 이렇게 제멋대로인 며느리일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을 것이었다.
그동안 이 집안에 들어왔던 이들은 모두 제리크를 존경했고, 그만큼 공손했다. 샤르헨은 이때껏 그의 카리스마와 압도적인 분위기에 뭐라고 말도 붙이지 못했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줘야 했다.
사실, 조금의 빡침도 있었다.
“하, 다짜고짜 와서 사람 머리를 밀어?”
엘리아나는 방문을 열면서 풀리지 않는 화를 내뱉었다.
‘하여튼 헌터 가문은 나랑 안 맞아. 한 명도.’
엘리아나는 더 욕을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면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
“하. 되바라진 것. 넌 어떻게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 없는 게냐. 골라도 꼭 그런 망나니 같은 계집애를!”
서재로 자리를 옮긴 제리크 헌터는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는다는 듯이 소리쳤다.
카르만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 만찬은 매우 중요한 자리였다. 그러나 제리크의 등장과 함께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아니다. 그가 오지 않았더라도 그 자리는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이혼을 원하지 않는 건 카르만뿐이었다. 두 여자는 뜻을 같이하지는 않았지만, 서로가 원하는 지향점이 같았다.
“그래서 엘리아나 로즈가 노리고 있는 재혼 상대는 대체 누구냐? 질리언 허트? 아니면 정말 콘테르국의 노튼 공작을 꼬신 게냐?”
“모르겠습니다. 워낙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니는 데다가, 남자고 여자고 구별도 없습니다. 저번에는 오델리 백작 댁에 다녀오더니, 어제는 테네브 공작 부인을 만나러 갔다 오더군요.”
“무슨 잔재주를 부렸길래 그 단단한 인간들을 꼬여 낸 거야? 미치고 팔짝 뛰겠군.”
“…….”
제리크 헌터는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불 같은 성질을 뿜어냈다.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소문이 있는 그녀라고 할지라도 자신을 보면 낮게 숙일 줄 알았건만, 되레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선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제게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제리크 헌터로선 태어나서 처음 만나 보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것도 시아버지와 며느리 관계에 있는, 까마득히 어린 여자가 아닌가.
그런데 내쫓아 버리기엔 그녀가 순식간에 이룬 사교적인 업적이 대단했다. 제 아들인 카르만은 사교에 전혀 재능이 없었다. 모두가 헌터 가문이라고 호감을 표시하긴 했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없었다. 게다가 연이은 이혼으로 인해 영애들에겐 더 이상 상대자로 고려되지도 않는다고 들었다.
“이용 가치만 없었어도 소리 소문 없이 내쫓았을 거다. 괘씸한 계집애, 누구 앞에서 고개를 빳빳하게 세워?”
제리크 헌터는 피곤하다는 듯이 모노클을 벗고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왕실에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똑같지. 또 외교술이네, 뭐네. 답답한 얘기들만 할 뿐이지 도무지 답을 내려는 사람이 없어. 나라가 이렇게 위기인데도!”
제리크 헌터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진실하지 않았다.
그는 왕실에 출입하지 않았다. 헨리우스 왕자와 작전을 논의하고 곧바로 카르만에게로 왔다. 허트 가문, 오델리 가문, 콘테르 가문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에 엘리아나 로즈가 요긴하게 쓰일 예정이었다.
잉그 오델리와는 사이가 좋은 편이기에 이야기가 수월할 터였다. 하지만 콘테르 공작이 죽은 뒤로 문을 닫아 버린 콘테르 부인이나 질리언 허트와는 교류를 이어 줄 끈이 필요했다. 거기에 엘리아나 로즈는 적임자였다.
베르겐이 미리 상황을 파악해 보았고, 거짓 소문이 아니라 진실로 그들과 친하다는 것이 검증되었다. 그 절차가 끝났기에 제리크가 직접 이곳에 온 것이었다.
‘단물이 빠지면 내가 제일 먼저 죽음을 안겨 주마, 애송이 년.’
제리크가 분노하며 주먹을 쥐었다. 카르만은 그런 자신의 아버지를 아무 말 없이 지켜보기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