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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73/121)

72화

엘리아나는 저녁 시간이 다 되도록 도서관에만 있었다. 그녀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알지 못했다. 콘티노국과 콘테르국의 경계는 생각보다 길고 넓었다.

이 중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군인이거나, 무역업자였고, 난민이나 이민자들도 많았다.

이 경계 지역은 제3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독특한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문화권에 대해서는 콘테르, 콘티노 양쪽에서 모두 침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니 이곳에서 있었던 변화도 눈치채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이를 파악한 헨리우스가 똑똑하게 선택했고, 그 선택을 제리크도 알아본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경계 지역은 데미테우스 산맥의 끝이 닿아 있기도 했다.

엘리아나는 데미테우스 산맥 지도를 더 자세히 보았다. 콘테르국과 콘티노국 사이에는 긴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곳은 그 강이 시작하는 곳이자, 산으로 연결된 곳이기도 했다. 이 산을 통하면 두 나라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운하가 있어서 굳이 쓰이지 않는 길이지만, 만약 전쟁 중이라면 다른 이야기였다.

엘리아나는 곧바로 그 지역의 소유자를 찾아보았다.

“존 조르디언?”

엘리아나는 자신이 보았던 존 조르디언의 유언장을 떠올렸다. 그때 아내인 쥬드 조르디언에게 상속한다고 했던 데미테우스 산 주변 임야가 이 부근이라면, 그렇다면 존 조르디언은 지금 죽어야 했다. 그래야 존의 허락 없이도 이 부분을 군사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이곳은 조르디언 가문의 사유지이기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 정해져 있을 터였고, 거기다 숲이 우거진 산이었으니 다른 목적으로 사용한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울 것이었다.

만약 이곳에 군수 물자를 숨겨 두었다면? 비밀스럽고 빠른 수송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엘리아나는 경계 지역의 소유자가 나와 있는 서류와 지도를 찢어서 급하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책 사이에 끼워 넣었다.

“아버지가 책은 찢지 말라고 누누이 말씀하셨는데, 이 집에 시집와서 몇 권의 책을 망치는 건지…….”

엘리아나는 자신이 찢은 책을 책장의 가장 모퉁이에 집어넣었다. 티가 나지 않도록 다른 책들 사이로 깊이 쑥 넣어 버리기도 했다. 카르만 헌터가 개입했을 확률은 낮았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했다.

모든 건 추측이었다. 엘리아나가 본 그는 너무 연애 문제와 결혼에 얽혀 있었다. 그동안 엘리아나를 대할 때도 정치적인 면보다는 감정적인 면이 많았다. 하지만 속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남작가의 문제에 심각하게 관심이 없었지만, 본가의 일에는 열심이라고 했었으니 말이다. 엘리아나는 책을 들고선 유유히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조셰프.”

“네, 부인.”

“수상한 사람은 없었어?”

“네, 없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이상했습니다.”

“도리어 이상했다니?”

“그래도 한두 사람 정도는 지나가기 마련인데, 누군가 이 주변에 사람을 못 지나가게 한 것처럼 아무도 오가지 않았습니다.”

“그래?”

엘리아나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사방은 고요했고, 지나다니는 하녀 하나 없었으니 말이다. 엘리아나는 누군가 자신의 주변을 감시하거나 통제하려고 하는 것임을 알아챘다. 저택 내에서 암살을 시도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때문에 일단 주변에 목격자가 없을수록 좋았다.

만약 샤르헨이 아니더라도, 베르겐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었다. 엘리아나는 지도가 든 책을 꼭 안고선 조셰프와 발을 맞췄다.

“조셰프가 느낀 게 맞을 거야. 내 주변을 비워 놔야 죽이기도 쉽겠지.”

“그, 그런…….”

“앞으로는 세 명이 함께 근무하도록 해. 시간에 맞춰서 두 명씩 교대만 해도 될 거로 생각했었는데, 주변이 조금 요란할 필요가 있겠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셰프가 다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셰프는 마치 절대 다치지 않겠다는 듯이 답했다. 엘리아나는 웃으면서 그와 대화를 나눴다. 이 모습조차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을 것임을 알았다. 그렇기에 그의 어깨를 괜히 쓸기도 했다.

“가족들은 다 잘 계시고?”

“네. 부인께서 챙겨 주신 덕분에 살림이 많이 나아졌습니다. 매달 약을 짓고, 먹는 것도 좋아져서 부모님도 한결 건강해지셨고요.”

“그래? 잘됐다. 이 집을 나갈 때, 로즈 가문에서 조셰프와 함께하는 위병들을 데리고 갈 거야. 거기선 처음부터 지금 봉급을 맞춰 주진 못하겠지만, 점점 더 많이 줄 수 있도록 노력할게.”

“얼마를 주시더라도 부인 곁이라면 항상 함께하겠습니다.”

충성이 가득 담긴 조셰프의 말에 엘리아나는 살짝 웃고선 주변을 살폈다. 그러면서 조셰프에게 은밀히 속삭였다.

“그대가 구한 위병 중에도 첩자가 있을 수 있어. 그들이 괜스레 과하게 근무를 하려고 한다거나, 열의를 보이거든 의심해. 오히려 게으름을 피운다거나, 자세가 바르지 못하다면 곁에 두고.”

“네, 부인.”

이제 주변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엘리아나는 그 사실이 슬펐다.

하지만 사람의 수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샤르헨의 밑에 있는 수많은 하녀들도 모두 믿음직스럽지는 않을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조셰프와 베니. 이 두 사람이면 이 공간에서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

만찬 시각이 다가오자, 엘리아나는 화려한 빨간색 드레스를 꺼내 입었다.

카르만이 중요한 얘기를 하겠다고 한 날이었다. 반드시 참석하라고 했으므로, 아마도 이혼 얘기를 꺼낼 확률이 높았다. 엘리아나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작아 보이지 않도록 머리와 옷매무새를 잘 다듬었다.

이 집에 오래 머물지 않게 된 이상, 일부러 불쌍하게 보일 필요는 없었다. 임신은 중대사였고, 쉬쉬하긴 했으나 하인들에게도 알음알음 퍼진 상태였다.

엘리아나는 아무것도 없이 쫓겨나는 가난한 부인이 아니라, 얻을 것을 다 얻어 내고 나가는 당당한 여인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 엘리아나의 공방에서 만든 모자는 순식간에 팔려 나가고 있었다. 엘리아나는 그 돈으로 양초 공방을 돌리기 시작했다. 돈이 돈을 부르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엘리아나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다가 샤르헨이 자신을 보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엘리아나는 돈이 필요해요. 이제 원조가 끊기면 정말 가난해질 거거든요.

엘리아나는 그 말이 괘씸하면서도 웃기다고 생각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허리에 리본을 매어 주던 베니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갑자기 웃어?”

“아니, 낮에 일이 떠올라서.”

“나 공방 간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

“샤르헨이 나한테 돈을 줄 테니 정원 일을 대신 해 달라고 하더라고. 엘리아나는 돈이 필요하고, 가난하니까.”

“뭐라고? 뭐 그런 싸가지 없는 계집애가 다 있어?”

“한 치 앞도 못 보는 거지. 나중에 우리가 정원을 가꿀 일이 있으면 걔한테도 기회를 주자.”

“이 헌터 가문의 콧대 높은 남작 부인께? 웃기다.”

베니는 그것도 재밌는 꼴일 것 같다면서 웃었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진심이었다. 이 집안은 반드시 망할 것이다. 망하게 만들 것이었다. 돈이 없어서 젖먹이를 안고 자신에게 찾아와 일을 구걸하게 되는 일이 과연 없을까?

샤르헨에게도 혹독한 가난의 시절이 있었을 것이었다. 카르만을 만난 뒤 지워 버린 시간이겠지만 말이다.

그 시간을 되돌려 줄 자신이 있었다. 감히 자신의 가난을 함부로 입에 올린 자에게 말이다. 엘리아나는 단단히 각오하면서 만찬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이혼은 엘리아나에게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에 불과했다.

***

만찬 자리에는 샤르헨이 가장 늦었다. 그녀는 낮과는 다른 옷을 입고 있었는데, 연한 분홍색 드레스였다. 그녀는 자신의 맑고 가녀린 이미지를 돋보이게 할 줄 알았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엘리아나와는 확실히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을 건가 봐요. 옷이 화려하네요.”

샤르헨은 엘리아나를 일부러 놀리기라도 하는 듯이 말했다.

“좋은 일이 뭐가 있겠어요. 쫓겨날 마당에. 옷이라도 화사하게 입어 봤어요.”

“엘리아나.”

“내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요. 오늘 그 발표를 하려던 게 아닌가요?”

샤르헨은 기대한다는 눈빛으로 카르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카르만은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다.

“그것과 관련된 것은 맞소. 하지만 엘리아나의 추측은 틀렸소.”

“틀렸다뇨? 엘리아나가 뭐가 틀린 거예요? 맞잖아요, 그녀를 내보낼 거잖아요.”

샤르헨이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했다.

“아직 혼인 서약서에 도장도 마르지 않은 시간이오. 다섯 번째 부인을 들인다는 것에 본가에서 반응이 좋지 않았소. 일단 시간을 두고, 아이가 태어난 후에 입적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일 년 정도는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소. 엘리아나는 그동안 남작 부인으로서 이 남작가를 위해서 베르겐과 함께 일을 해 주시오. 샤르헨은…….”

“싫어요!”

샤르헨이 끔찍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녀의 큰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우리 아이를, 아빠도 없는 아이로 세상에 태어나게 할 순 없어요. 전 남작 부인이 될 자격이 있어요.”

“샤르헨. 목소리를 낮춰.”

“아니요. 낮추지 않을래요. 카르만, 부탁이에요. 빨리 그녀를 내쫓아 주세요. 매일매일 머리가 아프고, 힘이 들어요. 그녀가 하는 행동들이 매일 나를 힘들게 한다고요……!”

샤르헨이 울부짖었다. 카르만은 그런 샤르헨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샤르헨은 애처롭게 울면서 말을 이었다.

“한 번쯤은 제리크 공작님의 말을 어겨도 되잖아요. 네 번의 결혼을 참아 왔다고요. 이제는 제게 기회를 줘도 되는 거 아닌가요?”

샤르헨의 말이 옳았다. 엘리아나는 두 사람의 사랑싸움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녀의 입장에서 당장 쫓겨나지 않는 것은 좋은 점이 더 많았다. 사교계에서 활동하는 것도 그랬고, 제리크 헌터의 먹이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카르만의 입에서 믿기 힘든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엘리아나와 이혼하고 싶지 않아.”

그 말에 샤르헨과 엘리아나의 시선이 동시에 카르만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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