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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72/121)

71화

“내리기 전에, 엘리아나가 허락한다면 내 쪽에서 경호를 조금 더 붙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사람을 맨손으로 때려잡는 그분 말인가요?”

엘리아나는 트로이 조르디언을 창으로 던졌던 투리스를 떠올렸다. 트로이 역시 건장한 체격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마치 작은 돌처럼 휙 던져 버리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율리시스는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투리스는 너무 티가 나요. 덩치도 크고, 은신에 적합하지 못하죠. 답답하면 일단 사람을 던져 버리기도 하고요.”

“일단은 내 쪽에서 경호 인력을 두 배로 늘리긴 했어요. 율리시스가 도와준다면 좋겠지만, 누군가 율리시스가 날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건 좋지 않죠. 차라리 조금 다치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율리시스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엘리아나가 다칠 수도 있는 상황임을 상기하면서 현실 감각이 돌아온 듯했다.

“다쳐선 안 돼요. 엘리아나.”

“다치고 싶진 않지만,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노릇이니까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이 나를 걱정하고 있으면 어떡해요. 자기 몸이나 신경 쓰세요, 왕자님.”

“다치면 전쟁이고 뭐고 데리러 올 거예요.”

“푸흐흐.”

엘리아나는 소리 내 웃었다. 마차는 마법처럼 순식간에 헌터 가문에 도착한 참이었다. 엘리아나는 마차 문이 열리자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그럼 그때 봐요. 백마 탄 왕자님.”

“다치지 않겠다고 해야죠!”

“아무리 나라도 미래를 장담할 순 없는 법이니까요. 몸조심해요, 올리버.”

엘리아나는 오랜만에 율리시스를 그 이름으로 불러 보았다. 율리시스는 자신과 엘리아나 사이에 암호처럼 자리 잡은 그 이름에 피식 웃으면서 멀어지는 그녀의 손등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대의 말이라면 내 무엇이든 못 지키겠소?”

“조금 느끼했네요.”

엘리아나는 손을 쏙 빼고선 유유히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마차가 섰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베르겐이 몸을 숙여 인사를 했다.

“귀가가 늦으셨군요. 분명 테네브 가문에 가셨다고 들었는데, 타고 오신 마차는 다른 가문의 마차인 것 같습니다만.”

“콘테르국의 노튼 공작이에요. 근처 별장에 놀러 오신 김에 테네브 가문에 방문하셨어요. 지난 파티에서 즐거웠거든요. 오늘 테네브 부인과 에이린 양과 함께 만찬을 즐겼죠.”

“부인. 정숙함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난 항상 헌터 가문이 내게 정숙을 요구할 때 기분이 이상해요.”

“…….”

“난 떳떳해요, 베르겐. 결혼으로 인생 펴 보려고 했던 건 이게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성공이자 실패이거든요.”

엘리아나는 그렇게 말하고선 유유히 베르겐의 곁을 떠났다.

베르겐은 제리크 헌터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엘리아나가 누굴 만나고 다니는지를 꼼꼼히 점검하고 있다는 건 그녀의 애인을 찾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마도 쓸모있는 애인이 있다고 생각되면 자신에게도 특별한 제의를 할지도 몰랐다.

‘질리언 아니면 노튼 공작이라고 생각하겠지.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은 상대야. 나를 그냥 내보내진 않겠군.’

엘리아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의 방을 향해 걸었다. 앞으로 만약 베르겐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야 하는 순간이 있다면 질리언과 함께 있는 모습을 노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율리시스는 노튼 공작의 가문을 빌려 쓰고 있었다. 정체가 들키는 건 순식간일 것이었다.

때문에 에이린 테네브에게는 미안한 얘기였지만, 질리언을 조금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애초에 그런 순간이 왔을 때 이용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친해진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질리언도 아마 이해할 것이었다.

‘그런 순간이 가능하면 안 와야겠지만.’

연락은 서신으로 충분했다. 서로가 위험을 무릅쓰고 만나는 건 상황이 좋지 않을 때였다.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서로가 얼굴을 보면서 하는 말만 믿을 수 있는 순간. 엘리아나는 그런 때가 자주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때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들의 일을 해야지. 엘리아나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의 무게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

엘리아나는 양산 밑에서 손을 휘저었다.

“옆으로. 더 옆으로요.”

“여기 괜찮을까요?”

“네, 좋아요!”

전쟁이 코앞인 상황이었지만, 카르만 헌터의 부인 엘리아나는 정원의 나무 심기를 지휘해야 했다. 귀족들의 얼굴과도 같은 것이 정원인데, 헌터 남작가의 정원은 대충 몇 가지 종의 식물만 있을 뿐 제대로 조경이 되어 있지 않았다.

엘리아나는 이것을 문서에 썼고, 이에 동의한 베르겐이 오자마자 정원사들을 고용하고, 나무들을 주문한 것이었다. 정원은 인부 셋이 들어서 겨우 옮길 수 있는 커다란 나무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모양을 잡아 꾸밀 계획이었다.

“부인, 중앙에 심을 꽃은 무엇으로 하실 것입니까?”

“샤르헨에게 물어봐야죠. 내가 쓸 것도 아닌데.”

“…대외적으로는 말조심을…….”

“여기 남작가 사람들은 다 알아요, 베르겐. 모든 걸 꿰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건 몰랐나 보네요?”

엘리아나는 정원사들이 열심히 돌을 바닥에 박아 길을 내고, 정원의 구획을 나누는 것을 보았다. 각 구역별로 들어갈 만한 것들을 써 두긴 했지만, 완전히 정한 것은 없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잠이 많아져서…….”

그때 샤르헨이 베르겐의 눈치를 보면서 걸어 나왔다. 그녀는 일부러 배를 쓰다듬었다. 품이 큰 드레스를 입고서 움츠러든 그녀는 누가 봐도 가련한 여인 같았다. 아이를 갖고도 구박받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베르겐에게 동정심을 구하는 건 무리일 텐데.’

베르겐은 철저히 헌터 가문을 위해서만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제리크 헌터의 눈으로 남작가를 바라보았다. 그게 그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명예, 영광, 귀족성에 집착하는 그에게 출신이 불분명한 샤르헨은 예쁘게 보일 리 없었다. 그 말은 불쌍하게 보일 리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려 주거나, 조언해 줄 의무는 엘리아나에게 없었다. 엘리아나는 얼른 이 일을 샤르헨에게 던져 버리고 도서관에서 전쟁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싶었다. 헌터 가문의 역사에 대해서도, 콘티노와 콘테르국의 국경 지역이 어떻게 생겼고, 어떤 식의 전술이 승리에 유리한지도 말이다.

아무래도 정원 꾸미기보다 자신의 흥미를 끄는 쪽은 그런 쪽이었다. 엘리아나는 들고 있던 종이를 샤르헨에게 건넸다.

“구역을 나누는 건 끝났고, 뭘 심을지는 샤르헨이 정해야 해요. 구역별로 심을 만한 걸 베르겐과 내가 찾아 놨으니, 보고 정해서 알려 주면 베르겐이 알아서 할 거예요. 난 들어가 볼게요.”

“저, 저 혼자 이 큰 정원을 다 꾸미라고요?”

“네. 당연하죠. 앞으로 이 정원을 꾸준히 관리하는 것도 샤르헨의 일이니까요.”

엘리아나는 이것도 저것도 다 관심 없다는 말투로 대답하고 뒤돌아섰다. 사실이기도 했다. 괜히 카르만과 얽혀서 시샘을 받거나, 남작가의 위신을 위해서 이것저것 시키는 대로 하는 것도 싫었다.

베르겐이 온 이후로는 페페의 지갑에서 돈을 더 뺄 수도 없었다. 협상은 끝났고, 엘리아나는 전략을 세우는 일로 바빴고, 베니는 로즈 가문의 공방을 운영하느라 바빴다.

‘공방에도 한번 다녀오긴 해야 하는데. 그 김에 본가에 들를까. 더 정신이 없어지기 전에 갔다 오는 게 나을지도 몰라.’

엘리아나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걸음을 떼는데, 샤르헨은 엘리아나에게 소리쳤다.

“엘리아나! 돈을 줄게요! 정원 일을 도와줘요!”

“…….”

“엘리아나는 돈이 필요하잖아요?”

“샤르헨 님. 그런 말은…….”

“정말이에요, 베르겐. 엘리아나는 돈이 필요해요. 이제 원조가 끊기면 정말 가난해질 거거든요.”

엘리아나를 위하는 척 그녀를 대놓고 무시하는 말이었다. 엘리아나는 몸을 돌려서 샤르헨을 보았다. 카르만으로 질투를 유발하는 게 안 되니, 엘리아나의 가장 큰 약점인 가난을 건드는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피식 웃었다.

“왜, 왜 웃는 거죠?”

“헌터 가문에서 나에게 한몫을 단단히 챙겨 준 것도 모르는 모양이네요. 베르겐은 가르칠 게 많겠어요?”

“단단히 챙겨 줘……?”

“샤르헨이야말로 돈이 필요하면 나한테 얘기하라고요. 이제 의복사를 부르는 횟수도, 하녀도 줄어들고, 말하지 않아도 뇌물을 갖다 바치는 집사도 없으니까.”

엘리아나는 샤르헨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지도 않고 다시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엘리아나는 계단을 오르면서 고개를 저었다.

가난은 엘리아나의 커다란 약점이자, 이 모든 상황을 견뎌야만 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샤르헨은 단단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누구나 영원히 부자일 수는 없다.

상업 활동에 있어서 경계심이 강하고, 콧대가 높은 베르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헌터 가문이 자꾸만 재산이 줄어 가고 있는 이유는 비단 전쟁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전쟁이 없는 시대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단지 카르만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제리크 역시 마찬가지로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반역을 저지르려는 것이었다.

왕이 된다고 해서 영원히 부자일 수 있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이런 현실 감각이 없는 귀족들은 결국 가난해지게 되어 있다. 왕족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반역이 실패로 돌아가면 헌터 가문의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질 것이었다. 샤르헨은 몰락하여 가난해진 카르만도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이란 그 얼마나 연약한가.”

엘리아나는 어느 시집에서 읽었던 구절을 중얼거리면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녀가 저택 안으로 돌아오자, 그림자처럼 조용히 조셰프가 그녀를 따랐다.

그는 엘리아나가 읊조린 시구를 따라서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새기고 있었다. 그녀가 말하는 저 사랑의 대상이 누구일지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엘리아나는 아무 생각 없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도서관의 문을 열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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