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잠깐의 웃음이 잦아들자, 제데이아가 말했다.
“먼저 정해야겠죠. 우리가 알고 있다는 걸 적에게 노출할 건지, 아니면 몰래 움직일 것인지.”
“우리가 알았다는 것을 티 내는 순간 본격적으로 움직일 거예요. 저쪽은 벌써 준비가 다 끝났으니, 급하게 움직일수록 우리가 불리해지겠죠. 선동도 쉬울 거고요.”
율리시스가 답하자, 질리언도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확실히 이대로라면 루스 윈 경과 제리크 공작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이렇게 모이지 않았다면 나라도 당했을 테니.”
제리크 헌터와 루스 윈은 그 정도로 명망과 신뢰가 두터운 인물들이었다. 아마도 마음만 먹었다면 국왕까지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 수 있었으리라. 물론 제리크 헌터의 목표가 그의 목을 겨누는 것이기에 그를 제외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럼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속아 주는 척 천천히 준비를 해야 된다, 이 말이네요.”
엘리아나는 농담기를 거둬 내고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문제를 파악했으니 해결책을 빠르게 찾아야 했다. 제리크 헌터에 맞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테니 말이다.
제데이아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말을 이었다.
“우선 저는 이 서류를 폐하께 전달하고 폐하의 답신을 받아 오겠습니다. 왕자님께는 어떻게 전달하면 좋죠?”
“엘리아나에게 주세요. 그러면 제가 받으러 가죠. 저는 오늘 밤 바로 콘테르국으로 돌아가서 국경 지대의 민간인을 천천히 이동시키고, 그 자리에 군인들을 잠입시켜 놓을 예정입니다. 소수로 은밀히 움직일 예정이라 속도는 느릴 수 있겠지만, 적어도 비무장한 민간인의 피해는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좋은 생각이오. 전 일단 그 해적 놈의 탈옥을 도와야겠소. 나 참. 내 인생에 이런 일을 하게 될 줄 몰랐지만, 탈옥을 도와 주면 디컨과의 접선 장소를 알려 주겠다고 하더군. 해적 놈이야 다 믿을 게 못 되지만, 알려 주지 않더라도 놈을 끝까지 쫓아갈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일단 상부의 의견대로 움직이는 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시키겠소. 믿을 만한 놈으로요.”
질리언은 지금 당장이라도 제리크 공작을 때려눕힐 것처럼 강한 말투였다. 엘리아나는 그 의견에 동의하면서 말을 이었다.
“질리언을 가장 먼저 설득하려고 할 거예요. 요즘 떠오르는 영웅인 데다가, 진중하고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이미지니까요.”
“칭찬은 됐소, 엘리아나. 부끄럽군.”
“그만큼 사람을 잘 신뢰하고 의외로 단순한 면도 있으니, 속이기가 쉽기도 하고요.”
“그것도 알고 있으니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괜찮소.”
“미안해요. 너무 콕 찔렀나요? 하지만 그런 사람이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면 더 무서운 법이에요. 제리크 헌터가 거짓말을 할 거라고 감히 누가 생각했겠어요?”
사실이었다. 질리언 허트 같은 사람일수록 말에 진정성이 더 강하게 실리는 법이었다. 평판도 좋은 편에 속했고, 자작의 작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왕실의 측근이라는 이미지도 강했다. 충성도가 높은 편에 속하는 그가 제리크의 편에 선다면 다른 가문들도 그쪽으로 몸을 틀기가 쉬웠다.
엘리아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했다. 이혼은 반은 진심, 반은 농담이었다. 자신이 헌터 가문에 더 머무는 것이 도움이 될지, 아닐지는 조금 더 판단해 봐야 했다.
‘다른 가문들이라…….’
엘리아나는 조용히 생각하다가 입을 뗐다.
“나는 루스 윈을 설득하겠어요.”
“루스 윈 경은 만나는 것조차 어렵소. 그리고 제리크 헌터가 감시하고 있을 텐데 그게 쉽게 가능할 것 같소?”
“마지막 목표가 루스 윈이에요. 그 전에는 주요한 가문들을 움직이겠어요. 첫 번째는 허트 가문. 이미 해낸 것 같네요. 두 번째는 테네브 가문. 이것도 해낸 거겠죠?”
엘리아나는 질리언과 제데이아를 한 번씩 가리켰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엘리아나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이어질 일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다음은 잉그 오델리. 조금 어려울 순 있겠지만 잘 접근해 볼게요. 시무스 가문을 통한 살롱 모임에서 수도의 명망 있는 가문들을 더 만날 수 있어요. 그들을 조금씩 포섭하겠어요.”
“엘리아나의 설득에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요.”
율리시스가 말을 덧붙이자, 제데이아가 답했다.
“폐하께 밀서를 받아 오겠습니다. 다만 복사본을 만들 순 없으니 꼭 엘리아나가 계속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새어 나가면 즉시 제리크가 움직일 테니까.”
“알겠어요. 나 자체가 밀서가 되어 보죠.”
“…몸조심하십시오.”
제데이아가 작은 목소리로 덧붙이자, 엘리아나는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악착같이 살아남아야죠. 여러분도 여러분의 자리에서 몸조심하세요. 우리가 이렇게 넷이 만나게 될 날이 또 오려면 꽤 걸리겠네요.”
“그때까지 잘 속여 보자고요. 우리를 속이려고 했던 자들을.”
네 사람은 잔을 부딪치지도, 손을 모으지도 않았다. 다만 서로 눈짓을 교환할 뿐이었다. 그 눈빛에는 불안과 신뢰가 뒤섞여 있었다.
엘리아나가 먼저 걸음을 뗐다.
“난 먼저 들어가 볼게요. 안타깝게도 아직 가정이 있는 여인이라서.”
“그 집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게 괜찮겠소? 카르만 헌터도 개입되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차피 사이가 좋지 않으니 큰 상관은 없어요. 내가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더 문제가 되겠죠. 유감스럽게도 당분간 이혼은 미뤄야겠네요. 아무리 제리크 헌터라도 며느리를 죽이진 않을 테니까요.”
“제가 모시죠, 엘리아나 양.”
율리시스가 제일 먼저 앞으로 나와 엘리아나의 앞으로 손을 뻗었다. 엘리아나는 그 위로 가볍게 손을 올리면서 대답했다.
“사양하지 않을게요. 그럼 모두들 또 뵈어요. 따로, 또 같이.”
“위험하면 언제든 신호를 보내요. 헬렌이 있는 곳으로 대피해도 좋고요. 허트 가문은 언제나 열려 있소.”
“허트 가문보다는 테네브 가문이 더 안전할지도 모르니… 이곳으로도 도망 와도 좋습니다. 에일린과 어머니가 당신을 예뻐하니…….”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여러분이 노력하는 만큼 나도 잘 버텨 봐야 하지 않겠어요?”
엘리아나는 경쾌하게 말하고선 걸음을 뗐다. 응접실에 남은 질리언과 제데이아의 눈빛이 율리시스와 나선 그녀의 등 뒤에 머물렀다.
***
율리시스의 마차는 여전히 아름다운 백마가 이끌고 있었다. 엘리아나는 우아하게 마차에 오른 후에 치마 겹을 정리하면서 평범히 물었다.
“그래서.”
“…….”
“무슨 할 말이 있어서 날 여기에 태운 거죠?”
마치 율리시스가 어떤 용건이 있어서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율리시스는 크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저 아름다운 여인과 조금이라도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뿐이랍니다.”
“그렇다면 실망인데요. 난 조금 더 거창한 이야기가 있을 줄 알고 설렜다고요.”
엘리아나는 대담한 성격이었다. 어차피 상황이 이렇게까지 와 버렸으니, 엘리아나는 자신이 쌓을 수 있는 업적의 크기를 보았다. 로즈 가문에 이득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말이다.
율리시스는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도 야망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엘리아나의 모습이 좋았다. 그녀는 진취적이었다. 두렵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고, 도망가지도 않았다.
그녀가 선택하는 건 항상 정면 승부였다. 헌터 가문에 들어간 순간부터 마주한 귀족 사회의 모든 면에서 말이다. 율리시스는 그런 그녀를 자신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로 두고 싶었다. 정치적으로, 그리고 사적으로.
“이혼은 언제쯤 진행될 것 같아요?”
“글쎄요. 제리크의 움직임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실 집안에 일이 있어서 조금 당겨질 수도 있어요. 남편의 애인이 아이를 가졌거든요.”
“저런.”
“그래서 일 년 안에는 이뤄져야만 하죠. 아기가 나올 때까지 버틸 수는 없으니까요.”
“그 전에 전쟁은 끝날 겁니다.”
“그래요. 내일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니까요.”
엘리아나는 흔들리는 마차 창 밖을 보았다. 불이 꺼진 거리는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이곳을 포탄과 총소리, 그리고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채운다고 생각하니 괴로움에 눈이 저절로 감겼다.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부터 죽을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그것에 로즈 가문이 아직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일에 필사적인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전쟁은 일어나선 안 된다. 그녀는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것이었다.
엘리아나의 옆 얼굴을 바라보던 율리시스가 말을 이었다.
“엘리아나의 이혼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된다면요?”
“콘테르국에 와 줄 수 있겠습니까?”
“가면 뭘 해 주실 건가요? 어떤 작위를 주실 건지 들어 보고 결정하죠.”
엘리아나가 장난스레 답했다. 그러자 율리시스는 망설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마어마한 작위죠.”
엘리아나는 눈썹을 일부러 과장되게 올렸다가 내리면서 말을 이었다.
“장차 왕이 되실 분이 거짓을 말하진 않으실 테고, 어떤 작위인데요? 어마어마하단 건 너무 주관적인 수식어에요.”
“그건 그대의 이혼 후에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내가 아직 헌터 가문 소속인 게 찝찝한 모양이군요?”
“어떻게 해석해도 좋아요. 아무튼 지금은 말해 줄 수 없어요.”
“사람을 궁금하게만 해 놓고 떠나는 건 비겁하지만, 좋은 술수죠. 나는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거든요. 제리크 헌터 건이 조금 정리만 된다면, 바로 이혼을 해야겠어요. 그 어마어마한 작위가 탐이 나기도 하고요.”
“부디 그대의 마음에 들었으면 하는군요.”
“내가 거절할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마요. 나로선 로즈 가문 전체가 콘테르국으로 넘어가야 하는 큰일인 만큼 남작 이하의 작위로는 어림도 없을 거예요.”
엘리아나는 무리해서라도 높은 작위를 말했다. 율리시스는 물론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아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콘티노의 밤은 아직 총성 하나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마치 폭풍이 몰아치기 전의 고요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