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70/121)

69화

정적을 깬 건 율리시스였다.

“우리 이야기는 동화가 아니니까, 계모가 끝내는 승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겠죠? 그렇게 만들 거잖아요.”

싱긋 웃는 율리시스의 모습에 엘리아나가 답했다.

“그럼요. 우린 심심한 이야기는 싫어하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모인 거고요. 내가 아는 얘기는 여기까지에요. 이제 각자 모은 정보를 알려 줘요. 나만 알아 온 건 아니겠죠?”

“나 먼저 할게요. 실버스티앙 사장 얘기가 나왔으니까요. 다들 알겠지만, 실버스티앙 사장을 죽인 범인은 이미 자수했어요. 그러나 아마도 돈을 받고 꾸며진 것 같고, 수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죠.”

“나도 보고받은 바가 없었소.”

“윗선에서 잘랐으니까요.”

“나보다 윗선에서 움직였다면…….”

질리언이 말하자, 율리시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루스 윈.”

“기사단장께서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데이아가 바로 말했다. 그러자 율리시스는 그런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이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는 사람은 없어요. 나는 내 형제들이 나라를 배신한 걸 믿어야 하는 상황이라고요.”

“그쪽은 왕위 계승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까.”

“콘티노국도 마찬가지라면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누군가 왕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면 어떻게 할 거냐는 말입니다.”

율리시스의 말에 제데이아가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이번엔 질리언도 말을 보탰다.

“우리는 왕위 계승자가 진즉에 정해졌소. 왕자님은 잘 자라고 계시고, 전쟁 없이 평화가 유지된 지 오래요. 콘테르처럼 잦은 영역 분쟁도 없고, 해적이나 민중 시위도 적은 편이란 말이오.”

“왕위 계승자만 왕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죠.”

“율리시스, 제대로 말해 줘요. 누군가 반역을 도모하고 있나요?”

엘리아나가 차분하게 묻자, 율리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스 윈은 왕권에 관심이 없어요. 그는 명예로운 왕실 기사단장입니다. 자신의 자식들도 이 나라를 지키는 데 종사하길 원하고, 콘티노의 영원한 수호자로서 신께 맹세하신 분이란 말입니다.”

“제데이아. 당신의 대부이신 루스 윈을 욕보여서 화가 난 건 알겠지만, 율리시스의 말을 끝까지 들어 보자고요.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헛소리라면 그때 주먹을 날려도 아무도 말리지 않을 거예요.”

엘리아나의 말에 제데이아가 작게 ‘젠장’이라고 말했다. 제데이아의 아버지인 테네브 공작과 기사단장 루스 윈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막역한 사이를 넘어서 서로의 아이의 대부가 되어 주기도 했다.

그러니 제데이아 입장에선 예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율리시스는 제데이아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루스 윈은 그 정의감 때문에 이용당하고 있는 겁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요.”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입니까? 알아듣게 좀 설명해 보시오, 왕자.”

질리언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화를 냈다. 율리시스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데이아. 만약 당신이 루스 윈이라고 칩시다.”

“…….”

“콘테르국의 왕자들은 영토 분쟁을 통해서 자신의 실력을 뽐내곤 했죠. 왕자들은 장성했고, 왕위 계승자는 여전히 미정입니다. 다들 더할 나위 없이 날카롭죠. 그때, 공격하지 않은 국가가 딱 하나 있습니다. 이웃 나라라는 이름으로요.”

“설마 콘테르에서 콘티노를 공격할 거라는 뜻인가요?”

율리시스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선 제데이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자, 루스 윈. 나는 당신의 오랜 친구에요 그리고 이 사실을 알아냈다면서 당신을 불러냈습니다.”

“…….”

“조르디언, 그 망할 놈들이 콘테르 놈들과 손을 잡았어. 갑자기 무기 관세를 올리자고 얘기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젠장, 전쟁이야. 전쟁이 곧 시작될 걸세, 루스 윈.”

율리시스는 마치 연극배우처럼 말하면서 제데이아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갔다.

“그렇게 말하면 루스 윈은 무기를 국가에 압수시키거나, 조르디언에게 돌려주자고 말할까요? 아니면 일단은 우리가 갖고 전쟁을 대비하자고 할까요?”

율리시스는 문제를 맞춰 보라는 듯이 말했다. 제데이아는 진지한 눈동자로 율리시스를 마주 보았다.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겠죠. 하지만.”

“하지만?”

제데이아는 뒷말을 얼른 들어야겠다는 듯이 조급하게 말을 반복했다. 그에게 있어선 중요한 문제였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이 나라를 세운 개국 공신의 집안인 헌터 가문이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죠.”

율리시스는 허를 찌르듯이 말을 이었다. 엘리아나는 헌터 가문이라는 소리에 입을 작게 벌렸다.

“제리크 헌터 공작은 이 나라를 세운 가문의 가주입니다. 어떻게 반역을 생각한다는 거죠?”

제데이아는 재빨리 반박했다. 그러자 율리시스는 그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을 이었다.

“왜 생각을 못 하죠? 개국 공신이라고 잘해 주는 게 뭐가 있습니까? 하나 있는 아들은 왕실에 그럴듯한 자리 하나 못 받았죠. 명예는 있지만, 있는 재산은 점점 줄어만 갑니다. 실력을 인정받으려면 전쟁을 해야 하는데, 콘티노국의 왕은 무력보다는 대화를 선호하죠. 그의 외교 실력은 지금 현존하는 어떤 국가의 왕보다 출중합니다.”

“전쟁이 없어서 군인들이 실력 발휘를 못 한다는 거군요. 그에 대한 포상도 받지 못하고요. 그래서 없는 전쟁을 일으키는 무모한 짓까지 벌인다는 건가요? 그렇게 얻은 포상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엘리아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율리시스는 몸을 돌려 엘리아나를 보며 말했다.

“그 대가로 왕이 된다면요.”

“…….”

“이야기는 많이 달라지겠죠? 심지어 콘테르국의 현명한 왕자, 헨리우스가 친절히 판까지 깔아 주겠다며 유혹했다면 어떨까요? 절친한 친구도 속일 수 있고, 아들도 속일 수 있죠. 가문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며느리에게는 말할 필요도 없고요.”

율리시스의 말에 격분한 질리언이 외쳤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어 내지 마시오! 제리크 헌터 공작은 누구보다도 이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오!”

율리시스는 그의 말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칠 뿐이었다.

“내 형제들도 누구보다도 콘테르국을 사랑해요. 그러니까 왕이 되고 싶은 거예요. 바로잡고 싶은 거죠. 엘리아나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그랬죠? 콘티노 사람들은 콘테르 사람들과 달리 성미도 급하고, 다혈질이라고요.”

“맞아요, 내가 그런 말을 했었죠.”

“내가 만난 제리크 헌터는 누구보다 호전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입니다. 도미누스 형님과 헨리우스 형님보다 더하면 더했지, 모자라지 않죠. 그는 누누이 주변 국가들을 무력으로 제압해야 한다고 했지만, 국왕에게 묵살당하지 않았나요?”

질리언은 이마를 짚더니 말을 이었다.

“분명 헌터 공작이 그런 성향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폐하의 말에 거역한 적은 없었소.”

“그동안 참아 왔던 것을 이젠 참을 필요가 없어진다면요? 그런 기회를 손에 쥐여 주겠다고, 자신과 같은 성향의 옆 나라 왕자가 와서 연합하자고 그를 끈질기게 설득했다면요?”

엘리아나는 손을 들었다. 그러고선 말을 이었다.

“증거요. 증거가 있나요?”

“헨리우스 형님의 군대가 콘티노국의 국경 지역에 터를 잡았습니다. 질리언은 보고받은 바가 있나요?”

“…그럴 수는 없소.”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군복만 갈아입으면 잡입하긴 쉽더군요. 첩자를 한두 명 보내서 직접 눈으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살아서 돌아올 수 있는 자들로요. 그들이 콘티노 군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칼과 무기만 봐도 알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콘티노국보다 무겁고, 둔탁한 무기를 주로 쓰니까요.”

율리시스는 평소의 장난기가 완전히 사라진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앳된 청년의 모습보다는 한 군대를 총괄하는 사령관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단호한 어투로 콘테르국의 현재 대응 상황에 대해 말했다.

“콘테르국에서는 이에 대비하여 국경 지역으로 왕실군을 배치하고 있어요. 전쟁은 일촉즉발인 상황이고, 아무 죄 없는 콘티노 국민들도 다칠 수 있는 상황이죠.”

율리시스는 품속에서 잘 밀봉된 서신 하나를 꺼내서 제데이아에게 내밀었다.

“이건 콘테르 국왕의 이름으로 온 밀서입니다. 제데이아, 이걸 콘티노국의 국왕께 전달해 주세요. 우리는 콘티노국을 공격할 생각이 없어요. 이웃 나라의 명문 가문들을 속여서 연합군을 형성하고, 그 연합군으로 반역을 도모하려는 헨리우스 밀 왕자를 처벌하려는 겁니다.”

제데이아는 좀처럼 보여 주지 않았던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난 아직도 이해가 안 됩니다. 기사단장 루스 윈은 그런 상황을 지켜보지 않을 거예요.”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그렇겠죠.”

율리시스는 차갑게 답했다. 그는 질리언과 엘리아나, 제데이아를 한번 훑어보고선 천천히 말을 이었다.

“테네브 가문, 허트 가문, 오델리 가문, 윈 가문.”

“…….”

“가장 먼저 칼날이 향할 가문들의 이름입니다. 이 네 가문은 콘티노국의 근간이고, 가주들 모두 제리크 헌터와 막역한 사이들이죠.”

“…….”

“믿는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는 건 너무도 쉬운 일이죠.”

엘리아나는 피를 토하며 죽었던 존 조르디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를 독살한 건 트로이 조르디언이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낸 건 디컨 조르디언이었다. 헨리우스와 손을 잡고 더 큰 명예를, 더 빨리 손에 넣기 위해서 말이다.

율리시스가 입을 다물자, 응접실에는 정적만이 맴돌았다. 엘리아나는 숨을 길게 내쉬고선 말을 이었다.

“자, 이제 무슨 상황인지 대충 알겠어요. 제리크 헌터와 헨리우스 밀은 전쟁을 통해 왕이 되고 싶어 하고, 우린 그걸 막으면 되는 거네요.”

“말은 쉽죠.”

제데이아가 냉랭하게 대답했다. 엘리아나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요. 말은 쉽죠. 어려울 거예요.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

“이기는 싸움을 만들어 봐요. 사실 우리 편이 더 강하다고요. 콘테르의 국왕도, 콘티노의 국왕도 우리 편이에요. 우리는 하찮은 반역자들이 거짓과 선동으로 날뛰지 못하게만 하면 된다고요.”

잠시 침묵하던 제데이아는 율리시스가 내민 밀서를 받아 들었다. 그러고선 말을 이었다.

“위조 여부를 철저히 조사할 겁니다.”

“콘테르 국왕의 필체와 직인은 누구보다 콘티노의 국왕께서 잘 아실 겁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에 엘리아나가 손뼉을 한 번 크게 쳤다. 그러고선 자신을 보고 있는 세 남자를 향해 말했다.

“자, 이제 뭘 하면 되죠? 일단 난 이혼을 먼저 해야겠네요. 반역자의 며느리로 죽고 싶지 않으니까.”

명랑한 목소리에 바람 빠진 웃음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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