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엘리아나는 남작저에 돌아오자마자 두 통의 서신을 받았다. 한 통은 시무스 남작 부인에게서 온 것이었고, 한 통은 테네브 공작 부인이 보낸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시무스 남작 부인의 것부터 뜯었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다음 살롱 모임에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날짜와 장소를 확인한 엘리아나는 곧장 테네브 공작 부인의 서신을 열었다.
봉투엔 공작 부인이 보낸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사실은 제데이아가 보낸 것이었다.
「엘리아나.
밤 8시. 테네브 가문으로.
제데이아, 질리언, 율리시스.」
편지는 매우 짧았다. 그야말로 용건만 간단히 써져 있는 것이었다. 유추해 보건대, 테네브 가문에 밤 8시까지 가면 마지막 줄에 적힌 세 사람이 모여 있을 거란 소리 같았다.
“불친절하긴.”
엘리아나는 잠시 투덜거리고선 편지를 깨끗하게 태웠다. 그러고선 베니를 불렀다.
“베니, 장식이 적고 고급스러운 느낌의 모자 두 개가 필요해. 지금 공방에서 작업하고 있는 게 있을까?”
“어느 부인에게 선물할 건데?”
“어거스타 테네브 부인과 에일린 테네브.”
“잘 어울리는 게 있어. 라일락색으로 고상하게 뽑힌 게 있거든. 금방 포장해 올게.”
“고마워.”
엘리아나는 베니를 보내고 나서 조셰프를 불렀다. 조셰프는 오랜만에 제대로 보는 엘리아나의 얼굴에 걱정스레 말을 건넸다.
“못 뵙는 사이에 얼굴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나도 이렇게 고생하게 될 줄은 몰랐어.”
엘리아나는 피곤하다는 듯이 이마를 꾹꾹 누르고선 말을 이었다.
“다름 아니라 경호를 세 배로 늘렸으면 해서.”
“세 배로요?”
“누군가 내 목숨을 노리고 있대. 노예를 사고파는 녀석들 쪽에서 들은 거라서 꽤 믿을 만한 정보야.”
“아니……. 대체 누가.”
엘리아나는 조용히 위층을 가리켰다. 샤르헨의 방이 있는 곳이었다. 조셰프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남작께 말씀드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남작이 누구 편이겠어.”
“…그래도 이런…….”
“당분간은 위험한 일에 휘말릴 수 있으니까 실력 좋은 사람들로 부탁할게. 남작저 안에 있는 위병들 말고 다른 소속으로.”
“네. 민첩한 녀석들로 구성하겠습니다.”
“응. 내가 따로 경호 비용도 두둑히 챙겨 줄 거야. 웬만하면 두 사람 정도는 잠복하고 있고, 겉으로는 조셰프만 보였으면 좋겠어.”
“네, 명심하겠습니다. 바로 찾겠습니다.”
“좋아.”
엘리아나는 조셰프를 내보내고선 단장을 했다. 아무리 제데이아가 부른 것이라고 해도, 표면적으로는 테네브 부인을 만나는 자리이니 제대로 꾸며야 했다.
헬렌이 보낸 드레스를 입고선 머리를 단정하게 올렸다. 머리에는 많은 장식을 하지 않고 율리시스가 선물한 머리핀을 꽂았다. 작은 모조 진주 목걸이와 귀걸이로 허전함이 없도록 했다.
엘리아나는 율리시스가 선물한 신발에 발을 넣었다. 편안하면서도 튀지 않아서 좋았다. 게다가 어차피 드레스가 길어서 신발은 잘 보이지 않았다.
엘리아나는 단장을 마치고선 드레스 룸 밖으로 나왔다.
때마침 문이 열리고 카르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카르만은 하늘하늘한 드레스에 단정하게 단장을 한 엘리아나의 모습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화려한 화장을 한 엘리아나도 강렬하고 아름다웠지만, 본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드러낼 때의 엘리아나는 흡사 천사처럼 고결해 보였다.
“남작께서는 제 방을 너무 자신의 방 드나들듯이 하시는 버릇이 있는데, 고치셔야 할 것 같네요. 샤르헨이 매우 불쾌해한다고요.”
“아직은 그대의 방에 내가 마음대로 들어올 권리가 있는 것 같소만.”
“이리저리 치이는 건 저라는 점만 잊지 말아 주시길 바라요. 저는 지금 목숨이 위험한 처지가 되었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암살자가 저택에 들어올 수도 있겠어요.”
“샤르헨은 그렇게 잔혹한 짓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오. 약간의 질투가 있다고 해서 그렇게 매도하는 것은 참을 수 없소.”
“네, 네. 남작께 보호해 달라거나 도와 달라는 말은 아니었어요. 제 목숨은 제가 알아서 챙길 테니, 저를 향한 관심을 제발 줄여 주세요. 여자의 질투는 그 어떤 검보다 날카로워질 수 있다고요.”
“엘리아나, 당신의 말을 믿을 수 없소.”
카르만은 표정을 찌푸렸다. 엘리아나는 별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선 말을 이었다.
“믿을 거라고 기대도 안 했지만요.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 참석하시오.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게 있소.”
“오늘은 힘들어요.”
“어째서지?”
“테네브 부인께서 초대를 하셨어요.”
엘리아나는 테네브 가문의 문장이 찍힌 편지 봉투를 흔들었다.
테네브 공작 부인이라고 하면 아무리 카르만이라도 말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존경받는 귀족 중 하나였고, 헌터 가문의 이름으로 테네브 가문에 드나드는 것 자체가 명예로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테네브 가문은 폐쇄적으로, 누구나 드나들 수 없는 곳이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럼 내일 저녁은 꼭 참석하시오. 중요한 일이니까.”
“내일 이혼 선언이라도 하나요?”
“난 그대가 이혼을 그렇게 가볍게 입에 올리지 않았으면 좋겠소.”
“가볍게 생각한 적은 없어요. 오늘도 베르겐과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고요.”
“엘리아나.”
“네.”
“난 그대와 이혼하지 않을 것이오.”
엘리아나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카르만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오.”
“이혼 시기에 관한 건이군요. 말을 제대로 해야죠. 휴, 알겠어요.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녁 식사에 참석할게요.”
이른 이혼은 카르만의 평판을 더 떨어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샤르헨이 배가 완전히 부르기 전에 해야 할 것이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내일 얘기합시다.”
“네, 알겠어요. 그럼 저는 테네브 부인께 갈 준비를 마저 해 볼게요.”
나가 달라는 말은 돌려 말한 것이었다. 카르만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엘리아나를 한 번 더 눈에 담았다. 조각상에서 방금 뛰쳐나온 것처럼 아름다웠다.
카르만은 그녀에게 아름답다는 말을 건네고 싶었으나, 입술이 딱 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몇 초를 망설이다가 결국 그냥 돌아섰다. 어젯밤에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엘레아나에겐 그런 카르만이 이상하게 보일 뿐이었다. 문이 닫히자, 엘리아나는 못마땅하단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 집에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가, 당장 이혼하겠다고 했다가, 이제는 바로 못한다고? 어쩜 저렇게 이기적인지…….”
저런 남자를 사랑하게 된 샤르헨이 불쌍할 지경이었다. 엘리아나는 혀를 짧게 차곤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
테네브 가문에서 보낸 마차가 도착했다. 짙은 남색에 은색으로 테두리를 둘러서 고풍스러운 느낌이 나는 마차였다. 엘리아나는 그 마차에 올랐다. 투리스와 조셰프는 마차의 양옆에서 말을 타고 엘리아나를 경호했다.
어두운 밤이었고, 어디에서 화살이 날아올지도 몰랐지만 양쪽에 든든한 방패처럼 있는 두 사람 덕분에 엘리아나는 불안하지 않았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생각할 수도 없는 삶이었다.
엘리아나는 아직도 어색한 이것들을 익숙하게 만들겠다고 다짐하면서 허리를 더 꼿꼿하게 세웠다. 가볍게 조인 코르셋의 촉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엘리아나가 놓을 수 없는 긴장의 끈 같았다.
***
테네브 가문은 수도에 가장 가까운 지역에 있었다. 엘리아나는 엊그제 오갔던 거리를 둘러보고선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 밖에는 테네브 부인의 시종이 기다리고 있었다.
“만찬 장소로 모시겠습니다, 부인.”
“네. 고마워요. 이건 부인과 에이린 양에게 드릴 선물인데, 전달해 주겠어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엘리아나는 활짝 웃어 보이고선 다른 시종을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테네브 부인을 만나러 온 것이었지만, 부인은 만나지 못할 것이었다.
시종은 엘리아나를 만찬 장소가 아니라 응접실로 안내하였다. 그곳에는 쪽지에 써진 세 남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잘 지냈죠? 표정들이 좋지 않네요.”
“엘리아나 없이 잘 지낼 수 있을 리가요. 엘리아나는 오늘도 아름답군요.”
율리시스가 장난스레 말을 내뱉자, 엘리아나가 웃으면서 질리언을 툭 쳤다.
“어떤 무뚝뚝한 남자가 내게 푸른색이 잘 어울린다고 헬렌에게 귀띔을 해 줬다고 하더라고요.”
“흠. 흠. 나는, 나는 아니오.”
질리언이 어색하게 거짓말을 하자, 엘리아나는 다른 말 없이 웃고선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 먼저 말해도 돼죠?”
“새로 알게 된 정보가 있소?”
“네. 실버스티앙이라는 선박 회사 사장을 죽인 게 디컨 조르디언이라는 정보예요. 죽이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있더군요. 무기를 몰래 빼돌린 모양이에요. 질리언이 습격하기 전에요.”
“이런 젠장.”
질리언이 미간을 찌푸리자, 엘리아나가 말을 이었다.
“아마도 입막음을 위해서 그런 것 같다더군요. 도미누스를 자극해서 잭슨 남작을 죽이려고 했던 것도 같은 이유 같아요. 경비가 삼엄해지면서 시도를 못 했지만요.”
“해적도 유언장을 보고선 디컨에게 돈을 받고 일부러 항로를 변경했음을 인정했소. 하지만 무기 얘기는 하지 않던데.”
“해적에게 털리기 전에 옮겼나 보죠. 아니면 그들 입도 막아야 하니까요.”
엘리아나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고선 손가락을 하나 들었다.
“그리고 하나 더.”
“…….”
“샤르헨 헌터가 나를 죽이려고 암살자를 구하고 있어요. 꽤 거금을 걸었대요. 내일이라도 죽을 수 있으니, 내 얼굴은 지금 실컷들 봐 두도록 해요.”
엘리아나의 농담에 누구도 웃지 않았다. 책상에 기대어 앉아 있던 제데이아가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계모라고 하더니, 너무 당하기만 하는 거 아닙니까?”
“원래 착한 동화의 마지막엔 항상 계모가 당하잖아요.”
엘리아나가 푸흐흐 웃었다. 그러나 제데이아와 질리언의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