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엘리아나는 베르겐에게 내뱉은 말과는 달리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시무스 부인에게 편지를 썼다. 국왕을 직접 만났고, 잭슨 시무스에 대한 처벌은 크지 않을 것이라는 확인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그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가 완전히 밝혀져야겠지만, 가벼운 사기에 엮인 것으로 처리가 가능할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편지를 조셰프 편으로 보냈다.
그러고 나서 곧장 헬렌 허트에게서 선물과 편지를 받았다. 헬렌은 엘리아나가 고생했단 사실을 질리언에게 얼핏 들은 모양이었다. 자세한 내용을 듣진 못했지만, 걱정이 많았다면서 헬렌은 작고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편지지를 가득 채워 보냈다.
엘리아나는 귀여운 여동생 같은 헬렌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선물은 하늘색 드레스였다. 헬렌이 직접 월계수 잎을 금사로 수놓았다. 치맛자락이 흔들릴 때마다 반짝거리는 모습이 마치 여신이 옷처럼 아름다웠다.
엘리아나는 옷을 잠시 살피고선 편지의 마지막 부분을 보았다.
「추신. 오라버니가 엘리아나는 파란색 계열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귀띔해 주었어요.」
엘리아나는 율리시스의 칭찬에 질색하던 질리언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여튼 솔직하지 못해선. 엘리아나는 기쁜 마음으로 옷을 걸어 놓았다.
엘리아나는 헬렌에게 잘 받았다는 답장과 함께 헬렌이 키우던 식물에서 나온 잘 익은 열매 두 알을 편지 봉투 안에 넣었다. 이 식물은 두 사람을 연결해 준 다리나 다름이 없었으니 말이다.
헬렌이라면 분명 뛸 듯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엘리아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멈춘 모자 공방에서 완성된 모자 두세 개를 들고 광장에 다녀올 예정이었다.
중간 상인을 찾기 위해서였다. 베르겐의 말대로 귀족 가문에서 생산한 물품을 어딘가를 거치지 않고 바로 판매하면 장사치로 보일 가능성이 있었다. 아무리 아무것도 없는 로즈 가문이라도 깎일 이미지는 있었다.
이럴 때 귀족들이 잘 사용하는 게 중간 상인이었다. 사실상 떼어먹는 수수료가 많아 엘리아나는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귀족이란 것은 원래 거추장스러운 점들이 많이 따라붙는 자리였으니까.
엘리아나는 베니와 함께 준비를 마치고 나가는 길에 잠옷 위로 카르만의 큰 가운을 걸친 샤르헨이 자신의 방 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샤르헨의 방은 2층이었고, 엘리아나의 방과는 방향 자체가 달랐다. 그녀가 이쪽으로 오는 이유는 하나였다. 지난밤, 카르만의 방에서 잠이 들었다는 걸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이쯤 되니 엘리아나는 질투가 나는 척이라도 해 줘야 하는 건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다들 왜 카르만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미련이 없느냐고 물어 대니 말이다. 특히나 샤르헨은 집요했다.
엘리아나는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게 몹시 피곤했다.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가고 싶을 만큼 말이다. 그러나 샤르헨은 굳이 엘리아나를 불렀다.
“도무지 집에 붙어 계시질 않는군요. 수도에서 베르겐도 왔는데, 얌전한 척이라도 해 주시면 안 되나요?”
“베르겐이랑은 아침 내내 이야기를 나눴으니, 봐줄 거예요. 게다가 이제 진짜 남작 부인이 될 사람이 여기 있는데, 내가 이 집에 계속 있어 뭐 하겠어요?”
“아예 나갈 생각도 없으면서 그렇게 말하네요.”
“조금만 참으세요, 남작 부인. 배가 부르기 전에는 반드시 나갈 테니.”
“지금 날 놀리는 거죠!”
“좋을 대로 생각해요. 난 바빠서 이만.”
“내가 임신해서 내쫓기는 게 아니야. 당신은 교만해! 정숙하지 못하고! 그래서 카르만이 내쫓는 거야! 알겠어?”
“알겠어, 알겠다고.”
엘리아나는 대충 대답하고선 베니와 함께 저택을 나섰다.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단정한 걸음으로 말이다.
샤르헨은 카르만을 조금도 욕심내지 않는 엘리아나의 모습에 약이 바싹바싹 올랐다.
그녀의 그런 여유로운 점이 카르만을 끌리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사실, 임신하지 않았더라면 엘리아나를 쫓아내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카르만은 점점 엘리아나의 매력에 빠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샤르헨은 비참했다. 엘리아나의 방에서 몰래 빠져나오는 그의 모습을 봐야 한다는 게, 그런 그의 마음을 엘리아나가 무시한다는 게 말이다.
그것은 오직 카르만만을 바라봐 온 자신에 대한 모독이었다. 샤르헨은 참을 수 없었다.
“죽여 버릴 거야. 꼭 죽여 버릴 거라고.”
샤르헨은 작은 입술을 떼지 않고 읊조리면서 텅 빈 복도를 걸어갔다. 그런 그녀의 뒤로 긴 그림자가 비쳤다.
***
“정말 저희 가게를 통해서만 판매하시는 겁니까?”
“네. 이것도 인연이잖아요.”
엘리아나는 자신의 화장품을 제조해 준 상인의 가게 한쪽에 모자를 파는 장소를 마련했다. 상인은 독점이라는 말에 다른 상점보다 싼 수수료를 제안했고, 엘리아나는 그것을 깎지 않고 한 번에 수락했다.
“이야, 안 그래도 부인이 조합한 방식의 화장품을 찾으시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때 워낙 독특해서 적어 놨던 게 다행이었죠. 그게 지금 제 보물이랍니다. 저희 가게 매출이 세 배는 넘게 뛰었죠.”
“다행이네요. 이 모자들도 아마 그렇게 될 거예요. 잘 부탁할게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앞으로는 로즈 가문으로 자주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화장품 가게 상인은 처음 왔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로 그들을 대했다. 사교 파티 이후로 젊은 영애들에게 엘리아나의 화장법과 스타일이 대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아나는 모자를 전시하자마자 이곳저곳에서 구경 오는 영애들을 보았다.
“금세 동이 나겠어.”
“응. 싼 가격으로 내놓지 않았으니까 더 고급스러워 보이겠지. 사실 별 게 아니더라도 말이야.”
“별 게 아니라니. 대단한 거야. 엘리아나, 넌 유행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라고!”
“그 옷을 만들어 낸 데엔 베니 너의 노고도 있었다는 걸 잊지 말라고. 가자, 샤르헨 말대로 너무 오래 저택을 비웠다고 또 욕을 먹을지도 몰라.”
“흥. 그것들은 꼭 흠만 잡아내려고 한다니까.”
베니는 약이 오른다는 듯이 말했다. 엘리아나 역시 답답했으나, 이제 곧 끝이었다. 그전까지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질리언에게서 빨리 소식이 와야 할 텐데.”
“계속 그 일에 개입할 거야? 너무 위험해 보여. 엘리아나.”
“어차피 인제 와서 나 혼자 빠질 수도 없을 거야.”
베니는 엘리아나가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보았다는 사실에 걱정이 한가득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이제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깊게 관여해 버렸음을 알고 있었다.
“어이, 엘리!”
그때 골목 안쪽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불렀다. 엘리아나가 고개를 돌리자, 골목에는 아무도 없었다.
“너도 들었지?”
“응. 웬일이래? 먼저 너를 찾고?”
“줄 정보가 있나 봐. 들렀다 가야겠어. 베니 너는 먼저 돌아가.”
“혼자 가도 괜찮겠어?”
“응.”
엘리아나는 골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서 작은 문 앞에서 노크했다. 문이 살짝 열리고 손이 내밀어지자, 엘리아나는 지폐를 꺼내서 주었다. 그러자 문이 완전히 열렸다. 엘리아나는 재빠르게 그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야?”
“두 가지 뉴스. 하나는 너에 관한 거, 하나는 네가 궁금한 것에 관한 거. 어떤 걸로 할래?”
엘리아나는 지갑을 열어서 방금 쥐여 준 돈의 두 배가 되는 금액을 건넸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고를 줄 알았어?”
“물론 둘 다 들을 거라고 생각했지.”
남자는 재빠르게 지폐를 챙겨 넣었다. 그러고선 자리에 앉으면서 말을 이었다.
“하나는 누군가가 너를 죽이려고 해. 킬러를 고용한다는 소문이 인력 바닥에 쫙 퍼졌어. 꽤 많은 돈을 걸었더라고.”
“고용한 사람은?”
“메이라는 이름의 시녀야.”
메이는 샤르헨의 시녀장 이름이었다. 엘리아나는 잠깐 놀랐지만, 이내 그럴 수도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죽일 이유는 없지만, 죽을 만큼 미워하고 있으니 말이다. 대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네.”
“안 알려 줬다고 그냥 죽을 엘리아나 로즈는 아니지만 말이야. 헤이, 난 네가 죽으면 좀 섭섭하다고.”
“그간 비밀을 나누며 다진 우정이 헛되지 않았다니 다행이네.”
“그렇지. 나머지 하나는 디컨 조르디언에 관한 얘기야.”
엘리아나는 디컨 조르디언이라는 이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남자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곳에 온 적이 있어. 표면상으로는 배를 잘못 탔다는 이유였지만, 사실은 목적이 있었지. 그놈이 여길 들른 그 날. 실버스티앙이라는 선박 회사 사장이 죽었어.”
“선박 회사 사장?”
“잭슨 시무스가 물건을 싣고 간 배의 주인이지. 범인은 해고에 앙심을 품고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는데, 그러기엔 좀 비참한 죽음이었어.”
엘리아나도 이미 알고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굳이 내색하지 않고 좀 더 캐물었다.
“네 생각엔 그걸 디컨이 한 것 같다는 거야? 아니면 디컨이 한 걸 목격한 사람이 있는 거야?”
“이제부턴 조금 더 비싼데, 어떻게 할래?”
엘리아나는 남자의 말에 미소 짓고선, 500디온을 남자의 손에 올렸다. 평소의 열 배가 되는 금액이었다.
“이 정도면 어때?”
남자는 엘리아나의 손에서 지폐를 가져가고선 세어 보았다. 그러더니 자신의 안주머니에 돈을 두둑하게 채워 넣고선 말을 이었다.
“기꺼이 부인의 궁금증을 풀어 드려야죠.”
갑자기 정중한 척을 하는 남자에 엘리아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남자는 함께 웃다가 말을 이었다.
“실버스티앙을 죽인 건 디컨 조르디언이야. 직접 작업하는 걸 본 사람이 있어. 뭔가 입막음을 하려고 했나 봐.”
“예를 들자면?”
“잭슨 시무스가 옮긴 의약품의 개수라든지, 창과 검의 종류, 주물 방법 같은 것들.”
“어차피 질리언에게 적발된 거 아니었어? 그 목록이 들키면 안 되는 이유가 뭔데?”
남자가 씩 웃었다. 그러더니 술을 한 모금 마시고선 말을 이었다.
“질리언 자작이 해적들에게 회수한 것에는 무기가 없었거든.”
“……!!”
“여기까지야. 그 무기가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몰라.”
“모르는 척해야 하는 게 아니고?”
“어느 쪽이든.”
남자는 두 손을 들고선 더 이상 줄 정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졸라 봤자 들을 수 있는 건 없을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그에게 싱긋 웃어 주고선 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