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엘리아나는 채비를 마치자마자 응접실로 베르겐을 불렀다. 그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도 아까워서, 검토하지 못했던 자료들을 다시 살폈다. 베르겐이 내려와서 정리했다는 문서들도 훑었다.
베르겐은 페페와는 완전 다른 성향으로, 꼼꼼하게 남작가를 돌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다만 수입 활동에 대해서 보수적인 면이 강할 뿐이었다.
‘그 헌터 가문이라 이거지.’
엘리아나는 이렇게 가다간 이름만 남고 굶어 죽기 딱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서류를 넘겼다.
엘리아나가 베르겐의 서류를 모두 읽었을 즈음, 그가 나타났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베르겐이라고 합니다. 부인.”
“아니에요. 딱 마침 다 읽었네요. 엘리아나 로즈에요.”
베르겐은 작은 수첩을 들고선 엘리아나의 앞에 섰다. 엘리아나는 앉으라고 했지만, 베르겐은 고개를 저었다.
“서서 듣겠습니다.”
“그게 편하면 그렇게 하세요. 두 번 묻진 않을게요. 성격이 그런 것 같으니까.”
“네, 감사합니다.”
“남작가 운영 인력 개선에 대한 서류부터 봤어요. 이렇게 급작스럽게 변하는 것에 남작과 샤르헨의 반발이 없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시행하고 싶어요. 이렇게 되면 한 달에 허공으로 흩어지는 급료를 몇백에서 몇천 디온까지 아낄 수 있죠.”
“남작님께는 허락받은 사항입니다.”
“샤르헨은요?”
“샤르헨 님은 이런 서류를 보실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엘리아나는 그 말에 눈을 찡그렸다.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베르겐이 돌아간 뒤 또 다른 페페가 나타나길 바라나요? 읽을 실력이 안 된다면 가르쳐야죠. 남작가뿐만이 아니라 곧 헌터 가문 전체의 안주인이 될 사람이라고요. 제리크 헌터 공작이 무시한다고 해서 베르겐도 그녀를 그렇게 무시해도 되나요?”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샤르헨 님의 학습 상태로 이 정도의 서류 독해는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럼 운영 인력이 줄어든 자리에 샤르헨의 교양 수업을 주재할 사람을 넣어야겠네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베르겐은 엘리아나를 유심히 보았다. 그녀는 질투심도 없이 순수하게 남작가의 운영을 위한 해결책만을 생각했다. 미래에 대한 대비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곧 쫓겨날 부인이 아니라, 외부에서 데려온 사람 같았다.
무엇보다 베르겐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현명한 여자였다. 샤르헨이 카르만의 방에서 늦잠을 자고 그를 침대에서 못 나오게 하고 있다면, 그녀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서류를 다 살펴보고선 잘못된 지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만 하루도 안 된 시간이었다. 그동안 베르겐이 정리한 서류를 모두 훑고 의견을 낼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그 정도의 직관력과 지성을 겸비한 여성이라면 제리크 헌터도 만족할 것이었다.
“부인.”
“네.”
“부인께서는 남작 부인의 자리에 대해서는 조금의 미련도 보이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첫날부터 카르만이 그런 건 기대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나는 학습 능력이 빨라요.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죠. 어차피 이혼당할 거, 있는 동안 내 살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녀는 자기 말이 헛되지 않다는 듯이 페페가 저지른 횡령 건에 대한 회수를 자신이 하기로 했음을 증명하는 서류를 내밀었다. 그녀는 기존의 6,000디온에 더해서 페페가 샤르헨에게 상납한 4,000디온어치 장신구의 가격까지, 총 10,000디온을 페페의 개인 재산에서 회수할 생각이었다.
“여기서 더 캐물으면 20,000디온, 30,000디온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그런 짓까지는 하지 않겠어요. 이젠 페페의 개인 재산이긴 하지만 원래는 남작 가문의 것이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10,000디온은 우리 로즈 가문이 가져가겠어요.”
“협상의 여지가 있다면요?”
“모자 공방에 대한 건이 있겠죠.”
“제가 반대 의견을 냈을 텐데요.”
“로즈 가문에서 그 공방을 사겠어요.”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베르겐은 눈을 크게 떴다. 엘리아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모자 공방의 하녀들을 고용하고, 재료, 도구, 미완성품 일체를 사 가겠어요. 그 가격은 10,000디온에서 제하도록 하죠.”
“양초 공방까지 해서 5,000디온으로 합의를 보는 게 어떻습니까?”
“양초 공방은 아직 설비가 다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4,000디온에 양초 공방까지 가져가겠어요.”
“좋습니다. 어차피 치워 버렸어야 했으니, 이쪽에서는 그 금액도 만족합니다.”
엘리아나는 명문 가문일수록 흥정에 약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굳이 더 깎거나 푼돈으로 말다툼을 길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풍요로움을 과시하는 수단 중 하나였다.
4,000디온은 현재 제작 중인 모자를 완성품으로 만들어 전부 팔기만 한다면 어느 정도 충당할 수 있는 돈이었다. 엘리아나는 그 돈으로 양초 공방의 설비를 만들고 시작까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했다. 머릿속은 매우 빠르게 돌아갔다.
“오늘 당장 옮기겠어요. 6,000디온은 언제 주실 수 있죠? 이혼 서류가 정리된 이후에 가능하다면, 거절하겠어요.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되면 약속은 무의미해지니까요.”
“페페와 어제 연락이 닿았습니다. 오늘 내로 당장 현금으로 드리죠. 대신 이 거래가 외부에 새어 나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이전까지의 장부와 분석한 서류도 함께 보는 자리에서 불태워야 하고, 사본은 없어야 합니다.”
“좋아요. 내겐 의미 없는 것들이니까요.”
엘리아나는 조금의 미련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상쾌해 보이기까지 했다. 엘리아나는 위병에 관한 부분을 짚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 부분은 대대적인 개선이 필요해요. 이대로 전쟁이라도 일어났다간 헌터 남작가는 망신만 당할 거예요. 훈련 수준은 형편없고, 복지와 봉급 수준도 다른 가문에 비해서 낮은 편이죠. 개국 공신이라는 이름으로 명문 반열에 올라 있는 만큼, 이런 점에서는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해요.”
“동의합니다. 위병 단장을 호출하도록 하죠. 군사 운영 정책은 헌터 가문에 잘 마련되어 있으니 그것에 따라서 재훈련시키는 쪽으로 하겠습니다.”
엘리아나와 베르겐은 대화가 잘 통했다. 특히 둘 다 현재 남작가의 행정에 대한 불만 지점이 비슷한지라 더욱 잘 풀리기도 했다.
의견이 다른 지점은 남작가의 수입에 대한 부분이었다. 엘리아나는 적극적으로 이윤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베르겐은 본가에 의지해도 된다는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엘리아나는 베르겐을 설득하는 대신 수긍하는 쪽을 택했다. 의미 없는 논쟁은 질색이었다. 어차피 자신과 더 이상 연관이 없는 가문이라고 생각하니 포기는 쉬웠다.
베르겐은 오히려 그녀의 미련 없는 부분들이 내심 아쉬웠다.
어째서 이 헌터 가문에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카르만은 잘생겼고, 능력이 있고, 헌터 가문은 그 어떤 가문과도 겨룰 수 없는 명문 가문이었다.
“그런데, 부인.”
“네.”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렇게 똑똑하신데, 이혼하지 않고 샤르헨 님을 내칠 방법은 왜 생각하시지 않는 것입니까?”
베르겐의 순수한 궁금증이자, 이 헌터 가문을 위한 질문이기도 했다. 엘리아나는 해괴한 말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허무맹랑한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말이다.
“베르겐, 무서운 소리 말아요. 그녀는 카르만의 아이를 가졌어요. 어떻게 할 생각이라면 그만두라고 제리크 헌터 공작께 말해요. 카르만이 네 번이나 결혼하면서 지킨 여자예요. 다퉈 봐야 나만 손해 아닌가요?”
“카르만 님께서 원하신다면요?”
“그건 그것대로 기분 나쁜데요. 나를 유모로 생각하는 건지, 공짜 집사로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탐탁지 않아요.”
엘리아나는 카르만에 대한 불쾌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 가문에 들어온 첫날부터 포기했어요. 그렇게 만든 사람이 카르만이에요. 인제 와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질리언 허트 때문입니까?”
“글쎄요. 제가 만나는 남자가 질리언 허트뿐일까요?”
엘리아나는 아리송한 미소를 짓고선 문으로 향했다. 대화는 이제 끝이었다. 베르겐은 여전히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엘리아나는 없었다.
“그래도 베르겐이 와 줘서 다행이네요. 내 손으로 남편의 애를 가진 수양딸의 신분 세탁까지 해 줘야 하는 건가 싶어서 곤란했었는데.”
“부인, 말씀을 조심하시지요.”
“너무 솔직했나요? 미안해요. 얘기는 끝났으니 나는 먼저 실례할게요. 이혼은 생각보다 준비할 게 많더라고요.”
베르겐은 엘리아나가 우아하게 응접실을 나서는 모습을 보았다. 어떤 모습이 카르만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도련님, 조금의 여지를 남겨 두시지 그러셨습니까. 너무 늦은 것 같습니다.’
베르겐은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오로지 떠날 생각뿐이었다. 카르만이 고뇌하는 순간에도 말이다.
베르겐은 수첩을 열어서 자신의 특명을 확인했다. 제리크 헌터가 직접 내린 명령이었다.
「엘리아나 로즈의 재혼 상대를 알아내라.」
본인에게 물어서는 얻을 수 없는 답이었다. 워낙 염문을 뿌려 댄지라 후보로 있는 남자들도 많았다. 그들 중 누구일까. 그리고 그것은 헌터 가문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베르겐의 머릿속에는 그 질문뿐이었다.
엘리아나 로즈의 모자 공방이니, 양초 공방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장사꾼을 흉내 내는 저급한 가문에서나 하는 것들로 느껴질 뿐이었다.
베르겐은 그 사업이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킬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에겐 그저 여자들의 사치품 중 일부를 귀족 가문에서 만들어 낸다는, 말도 안 되는 일로 치부되었으니 말이다.
베르겐은 수첩을 접고선 정보원들을 보낼 가문들을 추렸다. 의심이 가는 곳은 허트 가문, 테네브 가문, 오델리 가문, 노튼 가문. 이렇게 네 개의 가문이었다.
“어마어마한 가문의 사내들만 골라서 꼬셔 냈군.”
거기에 카르만 헌터도 포함된다는 사실에 베르겐은 옅게 한숨을 쉬면서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