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율리시스가 상황을 보고하자, 콘테르 국왕은 수염을 매만지면서 한숨을 쉬었다. 제 생각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그가 생각한 것보다 심각하게 얽혀 있었다.
“그렇게 강하던 존이 후계자 싸움으로 죽다니……. 남 일 같지 않구나.”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율리시스.”
“더 이상의 전쟁도, 더 이상의 음모도 있어선 안 됩니다. 최선을 다해서 막겠습니다.”
“할 수 있겠느냐.”
“이제 콘테르 안에 있는 제 사람들도 함께 움직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존이 죽었으니, 슬슬 형님들도 전쟁 준비를 할 겁니다. 그것을 막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율리시스는 그간 들은 적 없는 단단한 어투로 말했다. 콘테르 국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흔쾌히 허락했다. 그러자 율리시스는 말을 이었다.
“수도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네 개의 성 공작들이 협력할 수 있도록 왕명을 내려 주십시오.”
“그래. 하지만 공격 태세는 갖추지 않겠다. 수도를 중심으로 한 네 개의 성 영지는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고, 비밀 사령관은 기사단장 길리 커스버트로 임명한다.”
“네. 지당하신 선택입니다.”
“전투는 어디서부터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율리시스는 긴 속눈썹을 아래로 깔고선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국경 지역입니다.”
“연합군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네. 그렇습니다.”
“반란 주도자는?”
콘테르 국왕은 이미 보고만으로도 정황을 다 알고 있었다. 국경 지역에 있는 두 개의 성을 탈환하는 것을 중심으로 전쟁이 시작될 것도 말이다.
“콘테르국은 헨리우스 밀 왕자일 것이고, 콘티노국은…….”
율리시스가 입술을 벌려서 그 이름을 내뱉었다. 아니길 바랐지만, 그 사람밖에는 없었다. 콘테르 국왕은 그 이름을 듣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시스, 너의 판단은 나의 판단과 같다. 국경 지역에서 전투를 준비하는 것을 허락한다. 군수 물자의 유통은 시드 블랙 백작이 미리 준비해 두었다.”
“네. 폐하.”
“국경 지역 내전 총사령관은 율리시스 밀, 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공식적인 콘테르 왕국의 후계자가 되어서 돌아와라. 그게 나의 진짜 명이다.”
“네. 폐하.”
율리시스는 인사를 마치고선 일어서면서 말을 이었다.
“폐하.”
“또 할 말이 있느냐.”
“전쟁 전에, 제 생의 가장 중요한 협력자를 선택하려고 합니다.”
그전까지는 조금의 웃음기도 없던 국왕이 입꼬리를 올렸다.
“애덤 노튼 공작이 말한 그녀인 모양이구나.”
“네.”
“네 선택을 존중하마. 단, 제안은 기회가 왔을 때 하는 것이다. 제안해서 기회를 만드는 것은 비겁한 것이고, 남의 동료를 빼앗는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율리시스는 힘 있게 대답하고선 알현실을 나섰다. 그가 궁을 완전히 떠나자, 알현실 커튼 뒤에 있던 도미누스 왕자가 끌려 나왔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고, 손과 발은 포박되어 있었다.
“이것이 내가 율리시스를 선택한 이유다. 알겠느냐.”
콘테르 국왕은 싸늘하게 말했다. 도미누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침만 질질 흘렸다.
그는 잭슨 시무스의 암살 시도 직후에 잡혔다.
그의 군대와 부하들은 이런 그의 상황을 모르는 듯이 거만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콘테르 국왕이 철저하게 숨겼기 때문이었다. 도미누스 밀은 처형일이 정해진 사형수였다.
그다음은 헨리우스 밀이었다. 콘테르 국왕은 자비 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첫째 아들을 바라보았다. 도미누스의 눈에서 분노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할 말이 많아 보였으나, 입을 벙긋할 수조차 없었다.
콘테르 국왕은 그 원망 어린 눈빛을 무시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엘리아나는 피곤한 몸을 일으켜 마차에서 내렸다. 수도에 다녀오는 일은 생각보다 피곤했다. 원래는 하루를 예상했었는데,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삼 일이 지나서야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지친 몸으로 자신의 방에 들어섰다. 베니는 따뜻한 물에 부드러운 허브들을 띄워서 피로를 풀 수 있게 해 주었다.
“고마워. 베니.”
“차라리 한숨 자. 몸은 내가 씻겨 줄 테니까.”
“아니야. 할 수 있어. 하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지도 못하겠네.”
“정말 끔찍했어. 한숨 자고 일어나면 다 얘기해 줄게.”
엘리아나는 반쯤 꾸벅꾸벅 졸면서 목욕을 마치고선 침대에 눕자마자 그대로 잠이 들었다.
카르만은 엘리아나가 돌아왔다는 말에 그녀의 방에 찾아왔으나, 그를 맞이한 건 순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엘리아나뿐이었다.
카르만은 그녀가 잠든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여행으로 지친 엘리아나는 소음에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손질되지 않은 채 풀어 헤쳐진 풍성한 머리카락과 새하얀 피부, 화장기 없이 선이 뚜렷한 얼굴은 카르만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쓰다듬어 주고 싶고, 만져 보고 싶었다. 그 첫날밤, 자신이 다른 말을 내뱉었더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날로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는 것일까.
베르겐은 엘리아나를 이 집에 두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 단정했다. 무엇보다도 샤르헨이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미 마음에 들어왔다면, 별장을 물색해 그곳을 그녀의 공간으로 만든 뒤, 정기적으로 그녀를 찾는 것은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많은 귀족이 그런 식으로 정부를 두고 있으니 말이다.
‘샤르헨을 정부로 두고, 아이를 엘리아나가 키워 준다면 그것보다 좋은 선택지는 없을 텐데…….’
카르만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엘리아나가 소리를 지르면서 싫다고 했던 방법을 떠올렸다. 베르겐도 그것이라면 신분 세탁도 쉽고, 괜찮을 것 같다고 동의했다. 하지만 샤르헨과 엘리아나 둘 다 그것을 원하진 않을 것이었다.
카르만은 때늦게 찾아온 사랑이 힘겨웠다. 뜨겁고, 강렬한 끌림이었다. 그녀의 이지적인 면모와 아름다운 눈동자가 자신을 자꾸만 이끌었다.
이미 그녀는 자신의 것이었다. 부인이었으니까. 그러나 가질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이 초래한 일이라는 걸, 카르만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카르만은 달빛에 비친 엘리아나의 얼굴을 보며 괴로워하다가 방을 나섰다.
복도에는 잠옷 차림의 샤르헨이 우뚝 서 있었다.
“샤르헨.”
“카르만. 어떻게 사랑이 변할 수 있나요? 당신의 아이를 가진 나를 어떻게 이렇게 비참하게 할 수 있어요?”
“고된 여정을 끝내고 왔다기에 얼굴을 보러 왔을 뿐이야.”
“이름뿐인 인형에게 그런 관심이 왜 필요하죠?”
“엘리아나는 살아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지.”
“나와 아이를 내칠 건가요?”
“아니, 그런 일은 없어. 샤르헨, 이런 소비적인 말싸움은 그만두지.”
카르만은 얼굴을 피곤한 듯이 쓸어내리고선 샤르헨을 지나쳐서 가려고 했다. 샤르헨은 그런 그를 뒤에서 껴안았다.
“엘리아나는 당신이 없어도 되겠지만, 나는 당신이 없으면 안 돼요. 그걸 잊지 말아요, 카르만.”
카르만은 자신을 껴안은 샤르헨의 손을 쓰다듬었다. 그러고선 뒤돌아서 울먹이고 있는 샤르헨을 안아 주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질문 하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내가 그녀가 없으면 안 된다고 한다면, 너는 뭐라고 말할까?’
카르만은 차마 그 말을 내뱉지 못하고 샤르헨을 토닥토닥했다.
“카르만의 방에서 자고 싶어요.”
“그래.”
카르만은 순순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샤르헨은 알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닫힌 엘리아나의 방에 계속 머무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샤르헨은 마음속에서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분노를 겨우 참으면서 카르만의 품에 더 깊게 안겼다.
***
엘리아나는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 개운한 기분이었다. 침대 옆에 있는 의자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대로 치워 버리곤 활기차게 아침을 시작했다.
아침을 먹으면서 삼 일간 있었던 일을 알려 주자, 베니는 입을 쩍 벌렸다. 엘리아나는 너무 징그럽거나, 자세한 것은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충격받은 베니의 표정에 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시무스 남작에 대한 처벌은 조금 가벼워질 것 같아.”
엘리아나는 따뜻한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선 말을 마무리했다.
“네가 없는 동안 이곳은 공방이 다 멈춰 있었어. 베르겐이라는 집사가 새로 왔는데, 이런 식의 수익 창출은 헌터 가문과 맞지 않대.”
“그래? 그럼 로즈 가문으로 옮겨야지. 뭐.”
엘리아나는 깔끔하게 포기하면서 말했다. 베니는 그녀가 화를 낼 줄 알았다며 눈을 깜빡였다. 엘리아나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화낼 게 뭐가 있어. 이 집안에서 거부하는 건데. 이미 모자 주문이 여러 건 들어왔지?”
“응.”
“로즈 가문으로 옮겨서 처리하자. 페페에게서 받아 낼 금액으로 재료비와 하녀들의 급료를 처리하면 돼. 그래도 우리에게 남는 게 훨씬 많을 거야.”
“벌써 돌아갈 준비를 하는 거야?”
“베르겐은 수도에 있는 헌터 가문의 본가 소속 부집사야. 그가 내려왔다는 건 이 상황을 제리크 헌터도 알았다는 뜻일 거고. 명예를 중요시하는 그들 입장에선 나를 빨리 처리하는 게 이득이겠지. 살인 사건의 목격자가 되질 않나, 이상한 추문을 뿌리고 다니질 않나. 제리크 헌터가 좋아할 만한 며느리는 아니잖아.”
엘리아나는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말하고선 기지개를 켰다. 전쟁이니 왕위 찬탈이니 하는 복잡한 일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제 일로 돌아오니 마음이 한결 나았다.
그러나 동시에 걱정이 되었다. 질리언은 그 해적과 잘 만났을까? 콘테르국으로 돌아간 율리시스는 무사할까? 제데이아는 갱스턴 블러 백작에게 들키지 않았을까?
한 발자국 물러났지만, 엘리아나는 여전히 그 문제의 핵심에 있는 인물이었다.
“우선 로즈 가문으로 돌아가자고.”
엘리아나는 스스로 외치듯이 말했다. 그러자 베니가 “응.”이라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엘리아나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오랜만에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