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엘리아나는 온통 번쩍거리는 왕궁 안을 둘러보았다. 우아한 곡선으로 떨어지는 건물 장식의 모든 테두리는 금으로 칠해져 있었다. 천장에는 어느 화가가 시력을 잃어 가며 그린 화려한 신들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별들을 모아 놓은 것 같이 반짝거리는 샹들리에, 무수한 수의 하녀들, 그리고 정적. 엘리아나는 궁전은 그 분위기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는 게 있다고 생각했다.
숨을 쉬는 단순한 동작도 눈치를 보게 되었다. 숨소리가 너무 크진 않을지, 여기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어도 되는지 말이다.
그러나 엘리아나는 그 모든 것을 티 내지 않고 궁의 시녀를 따라서 천천히 걸었다. 또각, 또각 하는 구두 소리가 복도에 크게 울렸다.
시녀는 조용히 문을 열어 주고선 엘리아나가 방에 들어가자 문을 닫고 나갔다. 먼저 와 있던 율리시스와 질리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의 여신이 천장 그림에서 빠져나온 줄 알았네요. 엘리아나.”
“…….”
질리언은 달콤한 말을 내뱉는 율리시스를 보면서 ‘뭐 이런 자식이 다 있냐?’는 듯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엘리아나는 그런 둘의 상반된 모습에 웃으면서 다가갔다.
“질리언이 보기엔 별로인가 봐요?!”
“아, 아니요. 아름답소. 아름다운데……. 그 간지러운 말들은… 흠……. 콘테르인들의 특징인가 봅니다.”
“제가 모든 콘테르인을 대표하진 않죠. 그리고 저는 아무에게나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랍니다.”
율리시스는 엘리아나를 보고 장난스레 웃었다. 긴장된 분위기를 풀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이었다.
“다시 그림 속으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얼른 이야기를 시작하죠.”
엘리아나도 장난을 치며 웃자, 두 사람은 그제야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세 사람은 동그랗게 모여 앉아서 아까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이어 갔다.
“트로이 조르디언은 의식을 되찾았어요. 그런데 콘테르국 사람들과 연락한 적은 없다고 진술했어요. 전혀 무관하대요.”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말하더군. 존 조르디언에 대한 배신감으로만 가득 차 있었소.”
율리시스의 말에 질리언이 말을 더했다. 엘리아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버지의 유언장을 어떻게 미리 안 것일까요? 그리고 제데이아에 따르면 중요한 일들은 모두 트로이가 맡고 있었다고 하는데, 어째서 디컨에게 상속을 한 거죠?”
“그 부분은 조르디언 부인에게 답이 있었어요. 트로이는 원래 존의 자식이 아닌 형의 자식이라고 하더군요. 형 내외가 일찍 죽었기에 친아들처럼 키우긴 했지만, 친자식은 아니었던 거죠. 그래서 상속은 자기 핏줄인 디컨에게 하려고 했던 것 같다고 했어요.”
“그럼 애초에 트로이에게 그런 기대를 품지 않게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트로이가 일을 잘하긴 했소. 타고난 뱃사람이었고, 장사꾼 기질이 있었거든. 욱하는 성격이 있긴 했지만, 누가 더 자질이 있냐고 묻는다면 누구나 트로이를 먼저 말했을 것이오.”
질리언의 말이 옳았다. 제데이아조차도 ‘아마도 후계자는 트로이가 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런 트로이에게 그 유언장의 내용은 큰 배신감이 들게 했을 것이다. 모두가 인정하는 후계자임에도 조르디언 가문에서 완전히 쫓겨나야 하는 신세였으니 말이다.
‘존 조르디언도 썩은 인간이군.’
엘리아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디컨에게 노골적으로 사업을 물려줬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트로이는 불안했을 것이다. 누구의 손에도 맡기지 않고 자신이 직접 모든 걸 해결하려 할 정도로 말이다. 수하들이 없는 것이 아님에도 그가 직접 현장에 뛰어든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유언장의 내용을 몰랐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으리라.
“누군가 일부러 트로이에게 유언장을 보여 준 게 분명해요. 존 조르디언을 살해하도록 말이죠.”
“존 조르디언의 이런 계획을 알고 있었던 자일 가능성이 크겠군.”
“네, 그럴 거예요.”
세 사람은 동시에 조용해졌다. 잭슨 시무스에서 시작된 이 일은 콘테르 왕실의 두 왕자와 연관이 있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조르디언 상단, 그리고 나아가서 콘티노국의 고위 관계자까지도 얽혀 있다.
처음보다 훨씬 사건이 복잡해졌다. 엘리아나는 이제까지 나온 자료들을 종이에 쓰면서 말을 이었다.
“도미누스 왕자와 잭슨 시무스는 협력 관계였어요. 그런데 중간에 헨리우스 왕자가 이간질했죠. 잭슨 남작은 이걸 모른 채 도미누스를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했어요. 도미누스는 물건도 받지 못하고 협력자가 배신한 줄 알았겠죠.”
“그래서 남작을 죽이려고 했다?”
“네. 그럼 도미누스가 이렇게까지 나서게 한 헨리우스가 잘못이겠죠. 그런데 헨리우스가 이간질만 해서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중간에 물건이 사라져야 하는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그랬다. 중간에 물자가 사라져서 도미누스가 받지 못하게 된 것이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한 원인이었다. 질리언은 고민을 하다가 말을 이었다.
“만약 헨리우스가 해적들에게 돈을 주고 항로와 규모, 일정을 미리 알려 줬다면?”
“해적들 입장에선 거절할 이유가 없죠.”
“헨리우스 형님은 아닐 겁니다. 우리는 바다와 친하지 않아요. 육지전에 더 강하고, 해적에 대해서는 잘 모르죠.”
“그리고 아무리 헨리우스 왕자라고 할지라도 해적들을 찾아내서 거래에 성공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오. 조르디언 상단이라면 모를까.”
“그게 실버스티앙이었다면요?”
실버스티앙은 살해당한 선박 회사의 사장이었다. 마치 증거를 인멸하듯이 처리되어 버린 사람. 질리언은 그럴듯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실버스티앙이 독자적으로 하긴 어려웠을 거요. 해적들은 이미 조르디언 상단과 암묵적으로 조약을 맺은 게 있고, 그걸 깨뜨리면 큰 손해를 입거든.”
“그럼 그들에게도 조르디언 상단의 차기 단장이 누가 되느냐가 중요하겠군요.”
차기 단장. 그 말에 율리시스가 손으로 딱 소리를 냈다.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말이다.
“질리언, 당신이 해적의 우두머리라고 생각해 봐요.”
“뭐요? 내가 왜 그런……!!”
“조르디언 상단의 차기 단장이 와서 이 거래를 하지 않으면 이후에 협약을 무너뜨리겠다고 협박한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어요?”
“그건.”
“그 항로로 습격하면 바다의 독사라고 불리는 질리언 허트의 추격을 받을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선택할 만하겠죠?”
“질리언, 바다의 독사예요?”
엘리아나가 정말 그런 유치한 별명을 가지고 있냐는 듯이 물었다. 율리시스는 그것과 상관없이 가설이 그럴듯해져서 기뻐하고 있었다.
“바다의 독사라니, 그런 이상한 별명을 짓지 마시오. 율리시스 왕자.”
“존 조르디언이 곧 죽으리라는 것까지 말했다면, 아마 그 말을 승낙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이렇게 대규모로 소탕당하면서까지도요.”
율리시스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질리언은 이번 소탕으로 자작의 지위를 받을 만큼 큰 성과를 올렸다. 그건 꼭꼭 숨어 다니던 해적들이 질리언이 담당하는 구역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질리언은 자신이 한 사건에 휘말렸다는 게 매우 불편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의 공적이 더럽혀진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붙잡은 해적의 우두머리와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소. 그의 입이 가장 진실할 테지.”
“순순히 말하려고 할까요?”
엘리아나가 우려하면서 말했다. 해적들은 교활했고,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움직였다. 아마도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떻게 탈옥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서 잔꾀를 굴리고 있을 터였다.
“무엇을 걸고 협상했냐가 문제일 텐데…….”
세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침묵을 깬 건 엘리아나였다. 엘리아나는 책상을 한번 ‘탁’ 치더니 말을 이었다.
“유언장이요.”
“유언장?”
“그 유언장을 위조해서 가져가 봐요. 디컨과 트로이의 이름을 바꿔서요.”
“왜 바꿔서 가져가야 하죠?”
“디컨 조르디언이 그걸 가지고 가서 협상을 했다면 어땠을 것 같아요?”
“…….”
“근데 그게 위조된 것이고, 사실은 트로이가 이 상단을 책임질 것이라고 질리언이 말한다면요. 해적의 입장에서는 빨리 줄을 갈아타야 하지 않겠어요?”
“유언장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그럼 그를 움직인 게 트로이겠죠.”
“떠보자는 거군.”
“질리언이라면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들을 가지고 노는 건 이 세상에서 가장 잘하잖아요. 바다의 독사.”
“그런 생각은 어떻게 한 거요?”
“헨리우스 왕자가 잭슨 시무스에게 한 짓에서 힌트를 얻었어요.”
헨리우스는 도미누스인 척 필체를 흉내 내 잭슨의 행동을 좌지우지했다. 그 과정에서 약탈도 드러났고, 실버스티앙은 죽었으며, 잭슨도 목숨을 잃을 뻔했었다.
그걸 똑같이 갚아 주는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자신의 머릿속에 빛보다 빠르게 스쳐 간 이 생각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질리언을 설득하기 위해서 말을 덧붙였다.
“때론 그게 거짓이라고 믿지 못할 정도로 급박한 상황도 있는 거죠. 그 해적에게도 지금 상황이 그렇지 않을까요? 존 조르디언의 부고를 함께 듣는다면 더더욱이요. 빠져나올 길이 없어지는 것이잖아요.”
“줄을 잘못 선 게 되어 버리는 거니까요.”
질리언은 한참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내가 그 해적의 입을 열고 오면 그 바다의 독사라는 말을 모두 다 하지 않는 것이오.”
“약속할게요.”
“저도 엘리아나 양이 그렇게 하신다면야, 따르겠습니다.”
엘리아나는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그 유언장을 똑같이 위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일단 제데이아의 손에서 빼내야 하는데…….”
“제데이아는 걱정하지 말아요.”
율리시스가 웃어 보였다. 엘리아나와 질리언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그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