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엘리아나!”
엘리아나는 자신에게 달려오는 율리시스를 보았다. 그는 조르디언 저택의 응접실에 멍하니 앉아있는 엘리아나의 모습을 보고 몹시 놀란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상앗빛 드레스에 엉망으로 피가 튀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친 데는 없는 건가요?”
“난 괜찮아요.”
“제데이아한테 들으니 독약을 맨손으로 찾아냈다면서요! 손을 다시 한번 닦아요. 몸에 안 좋을 것이 분명하니.”
질리언은 물에 적신 천을 건넸다. 엘리아나는 고맙다고 말하고선 손을 다시 한번 닦았다.
질리언과 율리시스가 도착한 것은 저택의 사건이 한바탕 정리된 이후였다. 군인들이 도착해서 조르디언 가문의 저택 곳곳에 배치되었고, 트로이 조르디언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치료가 끝나면 바로 감옥으로 가야 하는 신세였지만 말이다.
“트로이는 의식을 되찾았나요?”
“아직이요. 투리스의 힘이 워낙 세서……. 오늘 내론 돌아올 거예요.”
율리시스는 민망하다는 듯이 말했다. 엘리아나는 질리언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디컨 조르디언은요?”
“콘테르국에서 오고 있소. 새벽에 출항했었다더군. 오래전부터 공들여 온 계약이 있는 날이었다나.”
“디컨이 집을 비우는 날을 목표로 삼았나 봐요. 공교롭게 우리가 오늘 방문한 거고요.”
“제데이아가 회의를 끝내고 나간 뒤면 될 줄 알았던 모양이오. 그런데 동선이 꼬이고 말았던 거지.”
“두 사람이 친한가요?”
“트로이가 제데이아의 학교 선배요. 흠… 친하다고 할 수 있나? 제데이아는 워낙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으니까.”
질리언이 볼을 긁적였다. 그도 자세히는 모르는 듯했다. 엘리아나는 한숨을 내뱉었다.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우선 자리를 옮깁시다. 여기는 듣는 귀도 많고, 아직 안전하지 않으니.”
“그래요, 엘리아나. 폐하께서 왕궁 안에 있는 귀빈실을 내주신다고 해요. 옷을 갈아입고 그쪽으로 이동하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이 안 돼요. 너무 많은 일들이 얽혀 있어요.”
“천천히 풀어가 봐요. 해답은 분명 아주 쉬운 곳에 있을 거예요.”
율리시스는 엘리아나를 위로하듯이 말하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엘리아나는 겨우 일어났으나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잠시 비틀거렸다. 하지만 이내 자기 뺨을 몇 번 약하게 내리치고선 눈을 바로 떴다.
“시간을 좀 줘요. 궁에 이 꼴로 들어갈 순 없어요. 새 드레스를 사 입어야 하고, 이 피비린내 나는 몸도 좀 씻어야 해요.”
“경호를 붙여 주겠소.”
“그래요. 단장을 마치는 대로 두 분이 계신 곳으로 갈게요.”
“엘리아나. 당신 괜찮은 거죠?”
“사실대로 말하자면 하나도 안 괜찮아요. 눈앞에서 건장한 남자가 피를 뿜으면서 죽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정신을 안 차리면 다음 차례는 내가 될 것 같아서요.”
“…….”
“그건 싫어요. 난 여기까지 와서 개죽음당하고 싶진 않거든요. 그래서 괜찮아져야겠어요.”
엘리아나는 말을 마치고선 두 사람 사이를 빠져나왔다. 그러고선 당당하게 조르디언 저택의 홀을 가로질러서 나왔다. 조르디언 가문의 현관 앞에서 수사관과 얘기를 나누던 제데이아는 그녀를 보고 물었다.
“어디 가는 겁니까? 사건 조사는 아직입니다.”
“내가 어딜 도망가겠어요? 조사는 궁에서 받을게요. 폐하께서 질리언에게 귀빈실을 내주셨대요. 나는 폐하를 뵙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를 하러 가는 거고요. 이따 봐요, 제데이아.”
“이봐요. 엘리아나.”
“어차피 난 이 저택에 들어온 순간부터 계속 당신과 같이 있었잖아요.”
“그렇게 은밀하다는 듯이 말하지 말아요.”
“은밀하게 말한 적 없는데? 은밀한 게 뭔지 모르나 봐요?”
엘리아나는 손가락 하나로 제데이아의 머리카락을 톡 건드렸다.
“부인!”
“먼지가 붙어서 떼 준 거예요. 먼저 가 볼게요.”
엘리아나는 피식 웃고선 자리를 떠났다. 제데이아는 입을 꽉 다물고선 엘리아나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귓가가 조금 빨개진 채였다.
***
엘리아나가 수도에 간 사이, 헌터 남작가에는 본가의 부집사인 베르겐이 찾아왔다. 카르만의 서신을 보자마자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집사 자리가 비어 있는 동안 남작가를 돌볼 적임자이기도 했다.
베르겐은 오자마자 엘리아나가 작성한 문서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현명하신 부인이군요. 좋은 생각들입니다. 지금 남작가의 사정도 빠르게 파악하셨고요. 다만 값비싼 모자를 판매하는 게 남작가의 평판에 얼마나 좋은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겠네요. 장사꾼 같은 면모는 보이지 않는 게 좋습니다. 적어도 헌터 가문이라면요.”
“종이와 양초를 만들 공방을 운영하기 위한 자금이 필요하다고 설명하더군.”
“이유는 논리적이긴 합니다. 하지만 가문 외적인 요소들을 보는 눈은 아직은 부족하십니다. 헌터 가문에 대한 교육을 조금 더 받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 물론 곧 나가게 되시겠지만요.”
베르겐은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짧게 찼다. 카르만은 그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녀는 남작 부인으로서 어떤가?”
“그녀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샤르헨 님이라면…….”
“아니. 엘리아나 말일세.”
베르겐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선 말을 이었다. 그는 신중하면서도 날카로운 면모가 있는 사람이었다.
“장단점이 분명하긴 하죠. 일단 가문이 기울어 있고, 평판이 그리 좋지 않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하지만 똑똑하고 셈이 빠르며, 사교성이 좋은 것은 나쁘지 않은 점입니다. 도련님께서 다른 가문과 친분을 쌓는 것을 그리 즐겨하시지 않기 때문에 남작 부인께서 그런 부분을 보완해 주시면 좋죠. 특히 오델리 가문이나 테네브 가문과의 인연은 주인님께서도 눈여겨보고 계셨습니다.”
카르만은 ‘주인님’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리크 헌터 공작. 자신의 아버지였다. 그는 샤르헨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언제나 순종적이었던 카르만이 샤르헨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뜻을 굽히지 않자, 제리크는 샤르헨을 죽이려고 두 번이나 시도했었다. 카르만이 그녀를 수양딸로 입적시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하지만 이제 샤르헨 님께서 아기를 가지셨으니, 그런 장단점을 따지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도련님.”
카르만은 자신의 앞에 있던 술잔을 단숨에 다 비웠다. 베르겐은 예상과는 다른 모습에 놀랐다.
그는 막연히 카르만이 사랑하는 여자의 아이가 생겨서 기뻐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 만난 카르만은 어두운 얼굴이었다. 몹시 곤란하다는 듯이 말이다.
카르만은 연거푸 술을 몇 잔이나 마셔 댔다. 베르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카르만을 지켜보았다.
“난 남작 부인으로서 엘리아나를 계속 두고 싶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그녀에게 호감이 생겼어.”
“도련님.”
“부인이 아니라면 정부로라도 두고 싶을 만큼. 아니, 그녀는 아마 학을 뗄 거야. 애초에 그러지 않아도 데려가겠단 남자들이 줄을 설 테지. 젠장.”
카르만은 잔을 격하게 내려놓았다. 그는 머리를 쓸어 올리고선 베르겐에게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젠 샤르헨 님이 아니셔도 되는 겁니까?”
카르만은 혼란스럽다는 듯이 대답하지 못했다. 샤르헨은 오랜 시간 자신만을 바라보며 기다려 준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오래된 마음은 닳아 버린 것만 같았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모든 게 거짓 같았다. 엘리아나의 등장으로 인해서 카르만은 심장이 뛰고, 흥미가 솟고, 같이 있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다. 들끓는 마음은 ‘이것이 사랑이다.’라고 얘기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가 생겼다. 엘리아나는 이혼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샤르헨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카르만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두 사람 모두를 이대로 둘 방법 말이야.”
“욕심이 지나치십니다.”
“샤르헨을 버릴 순 없는 노릇이야. 내 아이를 가졌어.”
“…….”
“하지만 난 엘리아나를 절대 놔 줄 수 없어. 내 마음이, 그렇게 되어 버렸어.”
카르만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밖에서 대화를 엿듣고 있던 메이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안 돼. 이러다간 샤르헨 님이 내쫓기겠어. 그러면 내 신세도 끝이야!’
메이는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복도를 빠져나와선 샤르헨의 방으로 향했다. 이 사실을 어서 알리고 그녀를 부추겨야 했다. 엘리아나를 살해하도록 말이다.
***
엘리아나는 하늘색 비단 드레스를 골랐다. 평소에 입던 것과 완전히 다른 스타일이었지만, 고운 비단의 결이 유난히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엘리아나는 깨끗이 씻은 얼굴에 옅게 화장하고선 그대로 짐가방을 챙겨 발걸음을 옮겼다. 마차는 곧장 왕궁으로 향했다. 질리언과 율리시스는 이미 궁 안에 들어가 있다고 했다.
문지기가 마차의 창문 커튼을 거두고선 엘리아나와 눈을 마주쳤다.
“어디 가문의 부인이십니까?”
“헌터 가문의 엘리아나 로즈 헌터입니다.”
“함께 방문하신 분들의 성함은 어떻게 되죠?”
“율리시스 밀과 질리언 허트입니다.”
“네, 확인되었습니다. 문을 열어라!”
거대한 철문은 한 짝마다 성인 남성 셋이 달려들어야 열 수 있을 정도로 무거웠다. 총 여섯 명의 군인이 열어 놓은 틈 사이로 마차가 매끄럽게 지나갔다.
엘리아나는 마차 창 밖으로 궁전을 살펴보았다. 천상의 자연을 옮겨 놓은 것 같은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져 있었고, 곳곳에는 곧장이라도 움직일 것처럼 정교한 조각상이 있었다. 궁들은 하나같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장식으로 가득했고, 무엇보다도 끝도 없이 넓었다.
입이 절로 벌어지는 장관이었다. 엘리아나는 커튼을 닫고선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왕실. 자신이 사는 콘티노국의 심장이었다. 엘리아나의 심장도 덩달아 뛰었다. 권력의 중심부. 이곳에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을지 두려우면서도 궁금한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