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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61/121)

60화

수도에 도착하자, 엘리아나는 여관을 먼저 잡았다. 그러고선 그곳에서 옷을 재빨리 갈아입고, 단장을 했다.

존 조르디언 같은 이들은 차림새를 중요시했다. 그것이 돈이 될 일인지 계산하는 척도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화장은 아주 옅게, 품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만 했다. 머리 역시 아주 높게 올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밀랍을 녹여 머리카락들이 흩날리지 않게 한 올 한 올 고정했다.

밖으로 나오자, 율리시스의 부하인 투리스와 멜번이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아나는 그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또 다른 마차에 올랐다.

“부인의 모습 봤어?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완전 다른 사람이야. 원래도 아름다우셨지만, 이건 무슨 공주님 같잖아.”

“조용히 해.”

“여자들의 변신은 정말 신기하다니까.”

엘리아나는 마차 밖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투리스는 목소리가 큰 편이었다. 멜번은 여러 번 투리스에게 질책을 한 뒤에 마차를 움직였다.

조르디언 가문에는 질리언의 이름으로 기별을 해 둔 터였다. 연락하기가 무섭게, 존 조르디언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로 방문을 허가했다.

엘리아나는 작은 가방을 꼭 쥐었다. 그 안엔 중요한 증거들이 있었다. 잭슨에게 도착한 서신과 조르디언 상단의 표식이 있는 천 쪼가리였다.

왕을 알현하는 질리언과 율리시스는 그 자신들이 증거가 되겠다고 했다. 한편 엘리아나는 조르디언과의 대화에서 증거가 없으면 안 되었다. 그를 설득할 만한 권력이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마차가 덜컹거리면서 존 조르디언의 집으로 향했다.

마차 안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엘리아나는 지난 밤 설친 잠을 조금이나마 보충하고자 눈을 가벼이 감았다. 하지만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

엘리아나는 조르디언 가문의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낯익은 이를 만났다. 그리 달갑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제데이아.”

제데이아 테네브였다. 그는 회의를 끝내고 나오던 길인 모양이었다. 제데이아는 노골적으로 찌푸린 얼굴로 엘리아나를 보았다.

“남작 부인이 여긴 웬일이십니까?”

“질리언 허트 경에게 부탁받은 일이 있어서요. 존 조르디언 단장님을 만나기로 했어요.”

“부탁받은 일이 무엇인데요?”

“당신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에요. 그럼 이만.”

“…잠깐. 나도 참석하겠습니다. 당신이란 여자가 꾸미는 일은 모두 수상하니까. 존은 당신이 그렇게 대할 사람이 아닙니다. 두 나라 간의 외교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이건 존 단장님과 저의 약속이에요. 제데이아는 마저 하던 일을 하는 게 어떻겠어요?”

“이게 내 일입니다.”

제데이아는 고집을 부렸다. 엘리아나는 그를 떼어 놓으려고 했다. 제데이아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둘의 대화 소리를 들은 집사는 존 단장에게 이 사실을 전했고, 결국 엘리아나는 제데이아와 함께 응접실로 향하게 되었다.

“존 조르디언이 내가 혼자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인물 같아요?”

“어떻게 할 순 없어도, 혼란을 줄 순 있겠죠. 당신을 만나고 난 후 어머니가 당신 얘기를 빼놓은 적이 없습니다.”

“이건 권력 남용이에요.”

“권력은 대의를 위해서 사용하라고 있는 거니까요.”

엘리아나는 차라리 벽과 대화를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데이아 테네브는 정말 꽉 막힌 인간이었다.

응접실에 들어서자, 존 조르디언이 노골적으로 엘리아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었다. 엘리아나는 그 시선에 맞대응하듯이 그의 용모를 훑었다.

존 조르디언은 나이가 육십이 넘었다. 머리는 온통 새하얗게 변했지만, 운동으로 다져진 몸은 웬만한 젊은이도 때려눕힐 것만 같았다.

존은 호탕하게 웃었다. 자신이 그녀의 외양을 훑자마자, 곧장 그 시선을 되갚아 주는 배짱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헌터 남작이 웬 가난한 가문과 결혼했나 했더니, 외모와 배짱을 보고 반했던 모양이군요.”

“과찬이세요. 단장님이야말로 청년이라고 해도 믿겠군요. 반갑습니다, 엘리아나 로즈에요.”

“단장 존이요.”

엘리아나는 그와 가볍게 악수하고선 자리에 앉았다. 제데이아는 아무런 말 없이 엘리아나와 한 칸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하녀가 조용히 들어와 각자의 자리에 찻잔을 놓고 나갔다.

“제가 왜 찾아왔는지는 아시겠죠?”

“잭슨 시무스 때문이 아니오? 질리언에게 잘 전해 주시오. 그와 거래는 한 번뿐이었고, 그 이후에는 줄곧 거절했소. 우리 상단은 언제나 정치적 중립을 지향하고 있소. 그의 행태와 우리는 아무런 관련이 없소.”

존은 한 번에 깔끔하게 정리하려는 듯이 말했다. 골치 아픈 것은 질색이라는 듯한 말투였다. 엘리아나는 그가 이 사건을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도미누스 밀이 여기에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군요.”

“정확하게는 알게 된 것이지. 잭슨이 해적에게 물건을 약탈당한 후, 콘테르국의 도미누스 왕자와 헨리우스 왕자 둘 모두에게서 연락이 왔소. 군수 물자를 납품하라고 하더군. 하지만 난 둘 다 거절했소.”

“왜죠?”

“내가 그런 아둔한 짓을 왜 하겠소? 조금만 기다리면 왕위 계승은 끝날 테고, 나는 그 왕과 거래하면 되는데. 벌써 줄타기를 해서 내 사업을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소. 난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소. 돈에 속해 있지.”

그는 다시 호탕하게 웃었다. 그의 손가락마다 끼워진 화려한 보석 반지들은 그의 그런 재력을 상징하는 듯했다.

그는 틴 케이스를 열고는 시가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엘리아나는 그가 담뱃불을 붙이기 전에 말을 이었다.

“도미누스는 당신이 헨리우스를 선택한 줄 알던데요.”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존은 누가 무슨 오해를 하든 상관없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굴하지 않고 가방에서 표식을 꺼내서 보여 주었다.

“누군가 조르디언 상단의 표식을 사건 현장에 떨어뜨렸어요. 물론 가짜지만, 일반 귀족들은 알아보기 어렵죠.”

존은 시가를 내려놓고선 가짜 표식을 들어서 확인해 보았다.

“확실히 가짜군. 그것도 형편없는 가짜야. 이런 가짜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소. 그리고 내가 사건 현장에 우리 가문의 표식을 떨어뜨리는 얼간이로 보이오? 이런 장난은 우릴 시기하는 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지.”

“그래도 왕국의 조사를 피할 순 없을 거예요.”

“그런 것이야 예전부터 흔했소. 두 나라를 연결하는 상단을 운영하는 것이 그런 것이라오. 걸핏하면 이런 복잡한 일에 연루되어 버린다니까.”

존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선 말을 이으려 했다.

“질리언도 꽉 막혀서는… 콜록, 콜록. 고작 이런 걸로……. 콜록… 콜록. 켈.”

“존!”

“켈록, 켈록, 헬……. 켈록…!”

존 조르디언은 갑작스럽게 피를 토해 냈다. 기침과 함께였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파랗게 질렸다. 눈이 금세 까뒤집어지더니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엘리아나의 상앗빛 드레스에는 그가 뱉은 피가 적나라하게 튀어 있었다. 엘리아나는 곧장 그가 마신 찻잔의 냄새를 맡아 보았다. 묘한 약초 냄새가 났다.

“제데이아. 절대 차에 입을 대지 말아요.”

엘리아나는 경고하고선 존에게 가까이 가서 그의 숨을 확인했다. 그의 몸은 아직 체온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는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죽었어요…….”

“어떻게 이런…….”

엘리아나가 말하자, 마찬가지로 놀라 일어선 채였던 제데이아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엘리아나는 밖으로 나가면서 말을 이었다.

“이봐요! 거기 누구 없어요? 이 방에 찻잔을 들인 하녀를 잡아들여요! 존 조르디언을 독살했어요! 어서요!”

“네? 다, 단장님이……?!”

“놀랄 시간 없어요! 빨리 그 여자애를 잡아 와요!”

“네, 네!!”

시종들이 뛰쳐나가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멜번과 투리스가 들어왔다.

“부인, 이게 무슨.”

“차에 독을 탔어요. 바깥에선 이상한 일이 없었나요?”

“전혀 없었습니다. 한 번 더 확인해 보겠습니다.”

멜번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와선 존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확실히 숨이 끊어졌다고 말했다.

엘리아나는 뒤늦게 머리가 아찔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은 것이었다. 피 냄새가 어지럽게 올라왔다. 엘리아나는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엘리아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으나,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놓치고 말았다. 제데이아는 손수건을 주워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받아 얼굴과 목덜미에 튄 피를 닦아 내면서 입을 열었다.

“존 단장의 후계자는 누구죠?”

“두 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트로이 조르디언과 디컨 조르디언.”

“한 명으로 정하지 않았나요?”

“내가 알기론 그렇습니다.”

엘리아나는 눈을 감았다. 조르디언 상단의 후계자 문제와 콘테르국의 후계자 문제가 각자의 힘겨루기로 변모했을 가능성이 컸다.

“엘리아나, 내게 조금 더 자세히 이 상황을 알려 줄 수 없겠습니까? 내 눈앞에서 존 단장이 죽었어요.”

“설명할게요. 우선 그 하녀를……. 하녀를 찾고 나서요.”

엘리아나가 그렇게 말한 순간, 하인 중 한 명이 뛰어왔다.

“차, 차를 가져다 준 하녀가 죽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주, 주방에 있던 하녀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뭐라고요?”

엘리아나는 정신이 아찔해짐을 느꼈다. 그녀가 비틀거리자, 제데이아가 그녀의 팔을 단단하게 잡았다.

“엘리아나.”

“고마워요. 제데이아.”

“…….”

“눈을 뜨고 당했어요, 젠장.”

엘리아나는 분하다는 듯이 의자를 손으로 내리쳤다. 멜번과 투리스는 주변을 조사하겠다며 뛰어나갔다. 제데이아는 사건의 실마리를 잡지 못해서 화가 난 엘리아나의 옆모습을 보았다.

피를 뒤집어쓰고도 심각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그녀의 옆모습은 그 어느 여자보다도 지적이고 아름다웠다. 오늘은 두꺼운 화장도 없었고, 옷도 야하지 않았다. 우아한 모습이었다.

엘리아나는 제데이아의 시선이 자신에게 길게 닿는 것도 모르다가 번뜩 제데이아를 보았다.

“존의 서재를 폐쇄해 줘요. 질리언이 조사하기 전까지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해요. 지금 당장!”

엘리아나의 단호한 외침에 제데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신의 시종에게 눈짓을 한 번 하자, 그는 제데이아만큼 단정한 태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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