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60/121)

59화

“망측스러워라! 샤르헨이 임신했다고?”

“쉬이.”

“정말 징글징글한 연놈이야.”

“우리 입장에서야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생명이 찾아온 건데.”

엘리아나는 작은 짐 가방에 옷을 챙겨 넣었다. 왕실에 방문할 때 입을 옷은 상앗빛 드레스였다. 평범한 프린세스 드레스(Princess dress)였지만, 여기에 수없이 많은 모조 진주를 체인으로 연결했다. 가는 금색 체인 사이사이에 진주들이 작은 별처럼 매달려 있었다.

엘리아나는 그 드레스와 함께 신을 구두를 챙겼다. 어차피 오늘 출발해도 바로 궁에는 들어갈 수 없을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이전에 로즈 가문에서 입었던 옷을 꺼내 입었다. 머리를 높게 질끈 묶었고, 율리시스가 준 핀으로 잔머리를 정리하여 찔렀다.

베니는 중요한 색조 화장품을 골라서 따로 가방에 담아 주었다. 파우더 같은 것이 새 버리면 큰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아나는 시무스 부인이 여비로 준 돈 일부를 꺼내서 베니에게 건넸다.

“모자와 장신구 판매를 시작해 줘. 초기에 필요한 비용이 있을 거야, 그건 이걸로 처리해. 나중에 남작가에서 다시 돌려받을 것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안 좋으니까.”

“세상에, 어디서 이렇게 큰돈이 난 거야?”

“시무스 부인이 챙겨 준 여비야. 아끼지 않고 써 버려야지.”

사실, 샤르헨의 임신에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조급해진 건 사실이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쫓겨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엘리아나는 최대한 남작가를 현실적으로 바꿔 놓고, 페페의 비상금들을 찾아내야 했다.

카르만이 자신을 위해서 위로금을 주진 않을 것이었으나, 남작가의 체계를 정상적인 궤도로 어느 정도 진입시킨 후에 빠져야만 자신의 명성에도 누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 이후는 카르만과 샤르헨이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자신의 알 바는 아니었다.

엘리아나는 시무스 부인이 준 여비도 최대한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투자할 곳에는 과감하게 투자하고, 아낄 곳에서는 최대한 아낀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 또다시 과감하게 투자한다.

만일 남작가에 머무는 기간이 조금 길어지고 돈에도 여유가 더 생긴다면, 양초 장인과 모자 공방의 하녀들을 그대로 데려갈 수도 있었다. 로즈 가문에서도 자체적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가 생기면 또 다른 결혼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아도 되었다.

엘리아나는 거기까지 생각을 굴려 가면서 행동했다. 나라와 나라 사이라는 대의도 매우 중요했지만, 자신과 가정을 먼저 지켜야만 했다. 그래야만 국가도 있고, 가문도 있었다.

창밖에서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질리언 일행이 도착했다는 신호였다. 엘리아나는 바로 짐을 들고선 걸음을 옮겼다.

“정말 같이 안 가도 괜찮겠어?”

“응,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금방 다녀올게.”

“엘리, 네 몸이 가장 소중하다는 걸 잊지 마.”

“응. 다녀올게, 베니.”

엘리아나는 일부러 밝게 웃어 보이고선 방을 나가 남작가의 대문을 향해 뛰었다.

도서관 창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카르만은 그곳에 서서 엘리아나가 낯선 이의 마차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끊임없이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당장 저 마차를 부수고, 엘리아나를 꺼내 오고 싶은 욕망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샤르헨이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 그리고 엘리아나는 이혼을 준비하겠다고 선언했다.

모든 게 결혼 이후에 자신이 말했던 대로, 어쩌면 원했던 대로 가고 있었다. 그러나 카르만은 어느 하나 만족하지 못하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

“엘리아나!”

“올리… 아니, 율리시스! 무사했군요. 팔은요?”

“덕분에 괜찮아졌어요.”

“질리언과는 얘기를 잘 나눴나요?”

“그럭저럭이요. 상의해야 할 부분이 많을 것 같아요.”

“엘리아나에게 그 표식을 보여 주시오, 왕자.”

반가움에 눈을 빛내던 율리시스는 질리언의 말대로 조르디언 상단의 표식을 건넸다.

“조르디언 상단의 표식이군요.”

“현장에서 발견되었다고 했소.”

엘리아나는 금세 알아보고선 섬세하게 뜯어보았다. 마차가 흔들렸으나, 엘리아나의 시선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자수가 되어 있는 부분을 주의 깊게 살피다가 말했다.

“이건 가짜네요.”

“네?”

“여기요. 조르디언 상단의 문양 끝부분은 이렇게 세모로 뾰족하게 빠지는 게 아니라 동그랗게 빠져야 해요. 자수로 표현하기가 쉽진 않죠. 이건 가짜예요.”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이오?”

“평민들 사이에서는 이렇게 위조한 표식이 자주 유통돼요. 조르디언 상단의 물건이 질적으로 보장된 만큼 조금 더 비싼 값을 받을 수 있거든요.”

조르디언이라고 하면 거의 무조건 신뢰하기 때문에 자주 일어나는 사기였다. 그러나 엘리아나나 베니처럼 자수를 오래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무리 없이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조르디언 상단을 의심하기를 바랐다는 뜻이 되겠군요.”

“존 조르디언에게 이걸 가져가면 알겠죠.”

“그가 실토하려고 하겠소? 헨리우스 왕자와 손을 잡은 게 사실이라면 더 입을 다물 것이오.”

질리언이 부정적으로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존 조르디언은 다름 아닌 장사꾼이었다. 손익에 따라 움직이는 그가 손해 보는 말을 할 리 없었다. 엘리아나는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상인이에요. 돈이 되는 쪽으로 기울게 되어 있어요. 당장 콘티노국에서 모든 교류를 끊겠다고 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양쪽 국왕이 함께 압박한다면 실토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러기 전에 형님들 쪽에서 미리 손을 쓸지도 모르죠.”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엘리아나는 그럴 수도 있겠다며 질리언을 바라보았다. 질리언 역시 동의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존 조르디언의 호위를 조금 더 강화해야 해요.”

“수도에 도착하는 대로 군사들을 보내도록 조치해 두겠소.”

엘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잭슨 남작의 집에서 가져온 서신을 율리시스에게 보여 주었다.

“잭슨 남작에게 도미누스가 계속해서 협박 편지를 보내왔다고 해요. 이게 도미누스 밀의 필체가 맞나요?”

율리시스는 가늘게 눈을 뜨고선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건 형님의 필체가 아닙니다. 이건 헨리우스 형님의 필체네요. 이렇게 끝이 길게 빠지는 건 헨리우스 형님의 특징이거든요. 도미누스 형님의 글씨체를 따라 쓰려고 한 것 같지만, 도미누스 형님은 글자가 더 또렷하고 힘이 들어가 있어요.”

“존 조르디언과 헨리우스가 협력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거군요.”

“협력이 깨졌을 수도 있고요. 잭슨 시무스는 비싼 값을 주고서라도 계약을 지키려고 했으니까요.”

마차 안은 고요해졌다. 상황은 자세히 파헤쳐 볼수록 심각했고, 저마다 가지고 있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해관계도 얽혀 있었고, 외교 문제와 군사 문제도 있었다. 질리언은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하듯이 말을 이었다.

“잭슨은 도미누스와 거래를 했지만, 해적의 약탈로 전달에 실패했다. 그리고 나서부터 협박 편지를 받았는데, 이것이 헨리우스에게서 조작된 것이었다.”

질리언의 말에 엘리아나와 율리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가 밝혀진 사실의 전부였다. 엘리아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얹었다.

“헨리우스가 잭슨뿐만 아니라 도미누스에게도 거짓된 서신을 보냈을 수도 있다고 봐요.”

“그렇담 서로가 오해했고, 도미누스 형님은 배신자를 죽이고 입막음을 하려고 한 것일 수도 있겠군요.”

“정확하게는 그렇게 만든 거죠.”

“헨리우스 형님이요.”

“아마도요.”

질리언은 잠시 손을 뻗어서 두 사람의 대화를 멈췄다.

“그럼 도미누스 왕자는 진짜 잭슨 남작과 꾸준히 거래했을 거란 거요?”

“아마 당분간은요. 몰래 군수 물자를 비축해 두고 동생을 칠 수도 있고. 여러모로 민간 군수 물자를 더 가지고 있는 건 나쁜 선택이 아니니까요. 특히 육탄전이 특기인 도미누스 왕자의 군대 같은 경우는 군용 의약품이 필요해요. 왕국에서 동등하게 배분해 준 것만으론 터무니없이 부족하죠.”

“그렇다면 왕국 내에 도미누스와 손을 잡은 사람은 확실히 존재하겠군.”

“맞아요, 질리언. 두 분은 의심 가는 사람이 없나요?”

질리언과 율리시스는 모두 고개를 저었다. 엘리아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서체와 표식을 다시 한번 보고선, 말을 이었다.

“그럼 남겨진 것들로 추적하는 수밖에는 없겠군요.”

“폐하를 알현하는 시간 동안 존 조르디언에게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지가 제일 걱정이군.”

“제 쪽에서도 기사들을 움직이겠습니다. 출중한 자들이니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지난번에도 큰 신세를 졌는데, 이번에도 부탁드리겠소.”

“아닙니다. 양국이 함께해야 하는 문제인걸요.”

엘리아나는 손에 쥔 표식과 서체를 보았다. 콘티노국의 왕을 만나고, 콘테르국에 소식을 전하기까지 한 후에 존 조르디언을 만나면 너무 늦는다. 그가 죽지 않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전 왕실로 가지 않을래요.”

“엘리아나? 지금 수도까지 가는 길인데 무슨 소리요.”

“두 분은 이대로 왕실로 가세요. 전 존 조르디언을 만나러 갈게요.”

“그 사람은 아주 독한 장사꾼이요. 아무리 엘리아나라도 상대하기가 버거울 것이오.”

“귀족보다는 나을지도 몰라요. 장사꾼은 돈이 되는 쪽으론 편견 없이 얘기를 들어 주거든요. 이젠 돈뿐만 아니라 목숨 줄까지 달렸으니, 내 말을 더 잘 들어 주겠죠.”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해요.”

율리시스가 딱 잘라서 말했다. 엘리아나는 그를 보며 환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율리시스, 질리언.”

“…….”

“결혼 이후 내가 한 선택 중에 위험하지 않은 건 하나도 없었어요.”

“…….”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뿐이에요.”

“엘리아나. 헌터 가문에서 이 일을 꼬투리 잡아서 당신을 곤란하게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오? 그 교활한 카르만 헌터라면 그러고도 남을 거요.”

질리언이 걱정된다는 듯이 말했다. 엘리아나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그렇지 않아도 곧 이혼당할 예정이거든요.”

“…….”

“뭐,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이 조금 당겨진 것뿐이지만요.”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밝게 웃었다. 질리언과 율리시스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혼’이라는 말에 잠시 몸이 굳었다. 그러나 엘리아나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두 남자의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뛰었는지도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