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엘리아나는 시무스 가문의 마차를 타고 헌터 남작가에 도착했다.
그녀는 곧장 짐을 싸러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도착하자마자 샤르헨의 시녀장 메이에게 붙잡혀서 카르만의 방으로 끌려가야 했다.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남작님과 샤르헨 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일 말하면 안 될까? 난 지금 몹시 바쁜데.”
“안 됩니다.”
메이는 단호하게 말하면서 미소를 숨겼다.
‘내일이면 당신은 이 남작가에 없을지도 몰라요. 샤르헨 님이 아이를 가졌으니까.’
그녀가 미소를 숨겼음에도 엘리아나는 뭔가 새로운 일이 생겼음을 짐작했다. 메이의 걸음걸이는 당차고, 꼿꼿했다. 이 남작가를 전부 총괄하는 시녀장 메이로 돌아간 것처럼 말이다. 베니가 들어온 이후로 조금 위축되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무슨 일인지 굳이 질문하지 않고 카르만의 침실로 들어섰다.
샤르헨은 카르만의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 앞에는 의사와 카르만이 앉아있었다.
의사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고, 엘리아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만의 표정은 어두웠고, 샤르헨은 눈은 부어 있었으나, 표정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
엘리아나는 종합적인 분위기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임신. 그것 말고는 이 분위기를 설명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엘리아나는 샤르헨 쪽으로 가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말을 내뱉었다.
“임신 축하해요, 샤르헨.”
“메이, 벌써 말을…….”
“아닙니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분위기 보니 뻔하네요. 의사도 있고, 샤르헨은 벌써 출산할 기세로 포근하게 누워 있으니. 뭐 뻔한 거 아니겠어요.”
엘리아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는 듯이 카르만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의사에게 말을 이었다.
“산모의 상태는 어떤가요?”
“건강합니다. 다만, 전체적으로 몸이 왜소하신 편인지라, 출산일까지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합니다.”
“다행이네요. 이 남작 가문에 지속적으로 드나들었으니 알고 있겠지만, 이 사실은 출산 시까지 어디에도 발설해선 안 돼요.”
“네, 알고 있습니다.”
“의사는 이만 나가 보게 해도 될까요? 이제 가족회의가 필요한 시간인 것 같은데.”
“그렇게 하시오.”
카르만이 처음으로 입을 뗐다. 의사는 왕진 가방을 챙겨서 나갔고, 엘리아나는 메이마저 내보냈다.
“이렇게 내쫓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이거라면 제리크 공작님도 어쩔 수가 없겠군요.”
“당신을 내쫓으려고 내린 결정이 아니오.”
“그렇죠. 하지만 아기가 찾아온 건 축복이니까 표정 좀 펴요. 카르만.”
엘리아나는 집안의 행정을 정리하듯이 딱딱하게 말을 이었다. 당황하긴 했으나, 지금은 그것보다 더 급한 사정이 있었다. 애초에 이혼은 언제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었으니.
“내가 밝혀낸 페페의 6,000디온은 약속대로 받아 가겠어요. 이혼은 천천히 준비하죠. 당분간은 이야기가 새어 나가선 안 돼요. 샤르헨의 신분 세탁도 필요하고요. 아무리 신분을 세탁해도 이미 얼굴을 여러 차례 사교계에 내민지라 말이 많을 거예요. 스타일을 조금 바꾸고 우기는 수밖에 없죠.”
“…그대는 이혼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하는군.”
“그럼 뭐 갖지도 않은 애를 낳은 척이라도 하라는 거예요?”
“…….”
“그런 생각을 했다면 정말 파렴치하군요.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를 조금 더 소중히 여기세요. 하나밖에 없는 정인이니, 뭐니 떠들어 댈 땐 언제고요.”
“그런 문제가 아니잖소. 지금은 당신이 이 남작가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오.”
“이혼 시기는 조정하면 되죠. 샤르헨의 배가 부르고, 아이를 낳을 때까지 바깥에만 안 보이면 돼요. 대신 샤르헨의 새로운 이름과 출신 같은 것들을 준비해야겠죠. 공식적으로는 다섯 번째 부인이 될 테지만, 어차피 샤르헨이 가질 자리였잖아요?”
엘리아나에게선 남작 부인의 자리에 대한 미련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샤르헨은 오히려 카르만보다 더 제 편에 서서 말하는 엘리아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무슨 음모를 꾸미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녀는 초연했다.
“난 지금 바로 수도로 넘어가 봐야 해요. 이렇게 길게 말하고 있을 수가 없어요. 이혼 관련해서는 갔다 와서 얘기 나눠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수도에는 또 무슨 일이오?”
“잭슨 시무스 남작과 관련한 일은 들으셨겠죠. 저도 그에 대해 증언할 일이 있어요. 왕실에 방문해야 해요.”
“엘리아나, 내가 시무스 가문과는 더 이상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그만두려고 했을 때는 이미 얽혀 있었어요. 질리언 허트 경의 명령이에요. 따라야 해요. 최대한 헌터 가문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도록 할게요.”
엘리아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로 한시가 급해 보이는 모습에 샤르헨도, 카르만도 모두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적어도 그녀가 화라도 한번 낼 줄 알았건만,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일에 엮여서 바쁜 모양이었다.
“다시 한번 축하해요. 카르만, 샤르헨. 부모가 된 거에 대해서는요. 나는 아쉽게도 곧 물러나겠지만, 빈털터리로는 안 나갈 거예요. 페페의 주머니를 확실히 털어 갈 거니까, 날 한순간에 쫓아내는 멍청한 선택은 하지 말아요. 우선 다녀올게요.”
엘리아나는 쌩하니 인사를 마치고는 카르만의 침실을 나서려 했다. 카르만은 그녀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대는 분하지도 않소? 여자로서 수치스럽지도 않냔 말이오!”
“수치?”
엘리아나는 수치라는 단어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수양딸과 놀아나서 아이를 가진 주제에 나한테 수치?”
“엘리아나! 말을 삼가시오!”
“그렇잖아요. 지금 상황을 말하자면 딱 그렇게 된다고요. 하지만 두 사람은 연인이라고 내게 말했었고, 연인 사이에 아이가 생긴 것은 축복 아닌가요? 그래서 난 축하의 말을 전했고요. 내가 수치스러울 게 뭐가 있죠?”
“…….”
“난 당신과 아무런 사이가 아니에요. 곧 서류상으로도 그렇게 되겠죠. 그러니 난 그전까지 내가 할 도리를 다할 뿐이에요. 로즈 가문을 위해서 말이죠.”
“당신은 아직 헌터 가문의 남작 부인이오.”
“하.”
엘리아나는 크게 비웃고선 말을 이었다.
“웃기는 소리 말아요. 난 한순간도 헌터 남작 부인이었던 적이 없어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나 역시도 그래요. 안 그래요, 샤르헨?”
“…….”
샤르헨은 왜인지 모르게 분함을 느꼈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인 카르만 헌터를 그녀가 아무것도 아닌 걸로 치부하는 순간, 정말 그 남자의 매력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누구를 꼬셨길래 저렇게 당당한 거지? 질리언 허트? 아니야. 그 사람과 에이린 테네브를 연결해 줬잖아. 누구야, 누굴 꼬신 거냐고!’
샤르헨은 카르만이 있어서 차마 내뱉지 못하는 질문에 입술이 근질근질했다.
엘리아나는 대답 없는 샤르헨과 자신을 노려보는 카르만을 차례로 보고선 미련 없이 발을 돌렸다. 그러고선 짐을 챙기려 자신의 방으로 당당히 걸어갔다.
그래.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 수도에 가는 이 길에 자신의 모든 걸 걸어야 했다. 돌아오면 쫓겨나는 일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보장된 재산은 6,000디온이 전부였다. 페페의 비리를 더 캐낼 수도 있었지만, 그럴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6,000디온이면 적어도 한동안 굶어 죽을 걱정은 없었다. 아버지의 약값도 충분했다. 다만 이름뿐이긴 하나 남작 부인이라는 권위를 더 이상 누릴 수 없단 게 문제였지만, 잭슨의 일이 원만하게 풀린다면 그 부분도 기회가 있을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면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
율리시스는 자신이 바랐던 엘리아나가 아닌 질리언의 방문에 놀랐다. 하지만 그의 손에 든 서신을 연 순간, 모든 의문은 해소되었다.
엘리아나는 제 생각보다 훨씬 통찰력 있게 이 상황을 보고 있었다. 율리시스는 서신을 빠르게 한 번 더 정독하고선 품 안에서 천 쪼가리를 꺼냈다.
“현장에서 발견된 조르디언 상단의 표식입니다.”
“이걸 왜 그날 제게 주지 않으신 겁니까?”
“나로서는 질리언 허트 경도 믿을 수 없으니까요. 내가 지금 믿을 수 있는 콘티노국의 사람은 엘리아나 로즈뿐입니다.”
율리시스는 이전과 달리 제게 깍듯이 예를 갖추는 질리언에게 편하게 하라는 듯 손을 저어 보이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형님 중 누군가는 지금 콘티노국의 고위 귀족과 손을 잡고서 왕국을 집어삼키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걸 알아보는 게 제 임무고요. 하지만 그것이 전쟁의 형태가 된다면, 콘티노국에서도 피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를 나라를 팔아먹을 놈으로 봤다는 거요?”
“루스 윈, 잉그 오델리, 제리크 헌터. 이들 중 나라를 팔아먹을 놈으로 보이는 자가 있나요?”
“없소. 모두 뛰어난 분들이오.”
“그러니까 말입니다.”
“…….”
“그러니 누구도 믿을 수가 없다고요.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니면 움직일 수 없는 규모의 사건들입니다.”
질리언은 찝찝했지만,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충분히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걸로 뭘 어쩔 셈이요?”
“존 조르디언을 압박하는 것이 제일 좋겠죠. 그가 콘티노국도 콘테르국도 모두 놓치게 된다면 망한다는 사실을 국가적 차원에서 보여 줘야 합니다. 아니라면 전쟁뿐이죠.”
“도미누스와 헨리우스 중 어느 쪽이 더 위험하오?”
“칼과 창 중에 어떤 것이 더 위험하냐고 묻는 것과 같아요. 형님들은 호전적인 성향도 비슷하고, 왕권에 대한 욕심도 노골적이죠.”
“젠장. 큰일이군.”
“어쩌면 형님들이 콘티노국을 두고 내기를 벌인 건 아닌가 싶기도 해요.”
율리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을 이었다.
“내기?”
“누가 먼저 전쟁을 유도할 수 있는지, 누가 더 업적을 쌓을 수 있는지를 말이죠.”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짓을…….”
“4년 전에는.”
“…….”
“도미누스 형님이 이겼었어요.”
“…….”
“그들에게 이 다툼은 왕위가 걸린 문제임과 동시에 유희입니다. 그걸로 붕괴하는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지 않죠.”
“…….”
“그것이.”
율리시스가 질리언을 보았다. 소년 같았던 남자의 눈동자는 맹수의 눈동자와 비슷할 정도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들이 왕이 되어선 안 되는 이유입니다.”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질리언은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