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약속이요?”
엘리아나가 되묻자, 시무스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헌터 가문에서 쫓겨나게 되더라도, 우리의 신뢰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예요. 내가 주최하고 있는 모임에도 계속 참석할 수 있을 거고요.”
“부인.”
“이대로 이혼하게 되면 작위도, 뭣도 없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잭슨과 나도 그렇게 시작했답니다.”
“그 말은…….”
“로즈 가문의 부흥을 도울게요. 우리 가문이 멸문할 뻔한 것을 엘리아나가 도와 준 것처럼요.”
시무스 부인의 말은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순간의 충동으로 말한 게 아니었다. 그녀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는 이 말이 이전부터 그녀가 다짐하고 있었던 것임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아마도 엘리아나가 잭슨을 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움직였을 때부터였을 것이었다.
엘리아나에게는 이만큼 든든한 지원군은 아직 없었다. 질리언과 헬렌이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 허트 가문이 로즈 가문을 지지하겠다는 선언으로 이어지진 않기 때문이었다.
엘리아나는 처음으로 생긴 정치적 동료에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노력에 대한 성과가 드디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무조건 잭슨 시무스를 중형에서 구해 내야 한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시무스 부인과 자신의 동맹도 더 단단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시무스 부인은 의리도 있지만, 이것으로 승부수를 띄운 것일지도 몰랐다. 스스로에게 잭슨을 구해 낼 방법이 없으니, 자신의 사교 인맥과 시무스 가문을 쥐고 엘리아나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좋아요, 부인. 그렇다면 최대한 헌터 가문에서 버티면서 시무스 가문의 멸문을 열심히 막아 봐야겠군요.”
“카르만 헌터가 도와 줄 일은 없겠죠?”
“방해나 안 되면 다행이에요. 자신의 가문 말고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거든요.”
엘리아나의 솔직한 독설에 시무스 부인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잭슨과 달라요. 실패할 일에는 손을 내밀지 않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물론이죠. 그리고 전 부인이 이번에도 그 말을 지키게 될 거라고 믿어요.”
“…….”
“로즈 가문은 반드시 일어설 것이거든요. 모두에게 각인될 만큼 뚜렷한 존재감으로요.”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점점 세를 늘려 간다면, 자신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가능했다. 엘리아나는 지금만큼 적합한 시기는 없다고 생각했다.
카르만 헌터는 제게 경제적인 기회를 주었고, 다른 사람들은 제게 정치적인 기회를 주고 있었다.
‘기회가 왔을 때 잡지 못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야.’
엘리아나는 스스로 다짐하면서 시무스 부인과 눈을 마주쳤다.
“잭슨 남작님을 몰래 만날 수 있을까요?”
“네. 물론이에요.”
두 사람의 눈동자가 공통의 대상을 향한 투쟁심으로 빛났다.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길을 향하는 방향은 같았다.
***
율리시스는 책상 위에 놓인 찢긴 표식을 보았다. 조르디언 상단의 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진 천 쪼가리였다. 그와 마주 보는 의자에 앉아 있던 멜번이 입을 열었다.
“존 조르디언과 손을 잡은 건 헨리우스 왕자님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도미누스 형님의 수하야. 그것도 멜번이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을 보냈어. 왜 그랬을까?”
“그자가 배신했을 가능성은 적습니다. 도미누스 왕자님께 충성을 맹세한 자이니까요. 기사들은 자기 주인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올바른 기사는 그렇겠지.”
“왕자님.”
“무기도 없는 사람에게 총을 쏘는 게 기사의 정신이라고 말하진 않겠지, 멜번?”
“…….”
총이 보급된 건 한참이 지났지만, 여전히 기사의 실력을 논할 때 사용하는 건 검과 창, 주먹과 같은 전통적인 방식의 무기였다. 몸을 쓰고, 온몸의 근육을 쓰는 것 말이다. 그렇기에 모든 국가에서는 총기 사용을 전쟁 외에는 불가하도록 법을 제정해 두었다.
총과 유사한 형태의 무기가 종종 민간에서 개발되어 유통되기도 했지만, 적발 시엔 무조건 사형이었다. 그 정도로 중범죄에 가까운 총기 사용이 일어났다. 그것도 율리시스의 눈앞에서 말이다.
“왕자님, 혹시 양쪽에서 모두 움직인 게 아닐까요?”
투리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까? 그 잭슨 시무스라는 남자가 가진 정보가 고급 정보라면 두 왕자님의 성격상 그냥 넘어가셨을 리 없죠. 두 분 다 호전적이고 적극적인 분들이니 사람을 보내셨을 겁니다. 우연히 겹쳤을 수도 있겠죠. 먼저 그 잭슨 시무스를 발견한 쪽이 도미누스 왕자님 쪽이었던 것뿐이고요.”
투리스의 말에 멜번도 고개를 끄덕였다.
“투리스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도미누스 왕자님의 성격상 죽여서 입막음하려고 보내셨을 수 있습니다. 콘티노국에서도 움직이고, 저희 쪽도 눈치를 챈 것 같으니까요. 그리고 헨리우스 왕자님은 도미누스 왕자님이 처리하기 전에 잭슨 시무스가 가지고 있던 정보를 빼돌리려고 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율리시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르디언 상단의 표식을 만지작거렸다.
“도미누스 형님 쪽에서는 죽이려고 사람을 보냈고, 헨리우스 형님 쪽에서는 납치하려고 사람을 보냈다는 뜻이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질리언이라는 군인이 잡은 사람 중 절반은 잠복하고 있던 이들이었고, 그들 중 한 명에게서 이것이 발견된 것이니까요.”
조르디언 상단의 표식은 저택 안에 잠입해 있던 사람이 떨어뜨린 것이었다. 군인들이 한차례 사람들을 잡아간 뒤에 주변을 살피던 투리스가 발견한 것이었다.
율리시스는 천이 찢어진 모양을 보면서 계속해서 고민을 이어 갔다. 투리스와 멜번의 추리는 그럴 듯했지만 뭔가 의문스러운 점이 있었다.
“어떤 점이 마음에 걸리십니까, 왕자님.”
멜번이 율리시스에게 물었다. 율리시스는 가만히 표식을 바라보다가 찢어진 부분을 가리켰다.
“이건 찢어진 게 아니라, 가위로 자른 거야. 찢어지게 보이려고 노력했을 뿐이지.”
율리시스는 가운데 부분에 일직선으로 직물이 갈라진 부분을 가리켰다. 선이 몇 개 되지 않았지만 어떤 날카로운 것으로 자른 것 같은 티가 났다. 아주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부분이었다.
덩치가 큰 투리스는 목을 쭉 빼고 살피다가 보고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멜번은 율리시스에게 천 쪼가리를 받아서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가위나 칼로 자른 다음에 가장자리 부분을 뭉개려고 한 것 같습니다. 마치 떨어진 것처럼 만들려고 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투리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율리시스는 의자에 푹 기대고 있던 몸을 단번에 일으키면서 말을 이었다.
“아주 다르지. 누군가 조르디언 상단의 표식을 남기려고 했다. 조르디언 상단이 이 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더 명확하게 표시하려고 한 거지.”
“일부러 조르디언 상단을 곤란하게 하려고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응.”
율리시스는 단언했다. 애초에 섬세함이 떨어지는 편인 투리스가 발견할 때까지 콘티노국의 군인들이 이걸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도 이상했다. 누군가 조르디언 상단과 헨리우스, 도미누스가 얽혀 있고 이들이 협력 또는 대립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 뒤늦게 꾸며 낸 것이었다.
누굴까. 지금의 세 세력 중 하나일까. 아니면 또 다른 세력일까. 율리시스는 이것을 들을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입은 잭슨 시무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총상 때문에 자택에서 보호 및 감금을 당하고 있는 그 말이다.
“잭슨 시무스를 만나야 해. 그의 입을 통해서 듣는 게 가장 정확한 진실에 가까울 거야.”
“콘티노국의 왕실에서 경호하고 있어서 가족을 제외하고는 출입이 어려울 겁니다.”
“우리는 어렵겠지. 하지만 누군가는 해낼걸.”
“누구요?”
투리스가 자신들 셋 중엔 없는 것 같다고 덧붙이면서 물었다. 율리시스의 시선이 깨끗하게 세탁된 머릿수건으로 향했다.
“엘리아나 로즈.”
“헤엑? 부인이 아무리 똑똑하시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파고드셨을까요? 본인도 위험해지실 텐데요! 게다가 그 군인과 가까우시니, 그렇게 나서서 정보를 파악하지 않아도 곧 알게 되실지도 모르고요.”
“아니. 분명 먼저 알려고 할 거야.”
율리시스는 확신했다. 남들보다 더 빠르게 정보를 습득해야만 더 좋은 전략을 짤 수 있으니까. 그녀는 훌륭한 전략가였다. 그러니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게다가 바로 다음 날 아침에 시무스 부인을 위로하러 시무스 남작가에 방문했다는 소식을 이미 들은 터였다.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녀를 만나야 해.”
“그때처럼 헌터가의 옆문으로 가서 부를까요?”
율리시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먼저 접촉하는 건 위험했다. 질리언이 감시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섣불리 움직임을 보였다간 자신이 올리버 노튼이 아니고 율리시스 밀이라는 사실도 밝혀질지 몰랐다.
율리시스는 엘리아나 로즈의 얼굴을 떠올렸다. 약간은 흔들렸지만, 마음을 다부지게 잡으려고 애쓰던 얼굴이었다.
―꼭 범인을 잡아요. 더 이상 다치지 말고요. 곧 지원군을 보낼게요.
그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질리언이 도착했다. 하지만 그에게 더 도움이 되었던 건 군인 질리언이 아니라, 엘리아나 로즈였다.
‘당신이란 지원군이 한 번만 더 나를 찾아와 줄 수 없나요?’
율리시스는 엘리아나 로즈를 만나고 싶었다. 전략을 떠나서 그녀가 무사한지 두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터였다. 그의 피를 잔뜩 묻히고 있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그 장면은 그리 유쾌한 기억이 아니었으나, 오래 남아 지속되고 있었다.
율리시스는 평범한 엘리아나의 모습이, 미소가 보고 싶었다. 그것은 어떤 정치적인 이유도 없는 율리시스의 순수한 사심이었다.
보고 싶다.
“심각하네.”
율리시스는 제 생각보다 더 깊숙이 그녀에게 빠져 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헌터 가문의 네 번째 부인이자, 사교계의 뜨거운 감자인 그 엘리아나 로즈에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