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샤르헨은 뒤에 시립해 있던 시녀장 메이를 보면서 날카롭게 물었다.
“엘리아나 로즈와 사이가 좋은 가문이 어디지?”
“현재 확인된 바로는. 허트 가문과 오델리 가문, 시무스 가문, 콘테르국의 노튼 가문입니다. 또 테네브 가문에서도 초대받은 것으로…….”
“어떻게 전부 다 콧대가 높은 자들만 족족 골라 친해진 거야? 대체 무슨 방법으로? 그들은 분명 나를 귀여워했어!”
샤르헨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발을 굴렀다.
그녀는 작고 아름다웠다. 첫 사교계 데뷔 이후로 모든 귀족에게 사랑을 듬뿍 받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모두 새장 안의 예쁜 새를 구경하러 왔다가 갈 뿐이었다.
샤르헨은 중요한 소통에 끼지 못했다. 그들이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으니까. 그들의 집에 초대하거나, 정원을 보여 준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런 사교적인 행위들도 사실상 정치적으로 관계를 맺기 위한 만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저 파티에서 잠시 잠깐 만날 작은 새로 취급할 뿐, 샤르헨을 이용하려 들지 않았다. 그녀가 남작 부인이 된 이후라면 말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또한 오델리 가문이나 테네브 가문처럼 명예를 중시하는 곳에서는 이런저런 구설수를 무시하고선 수양딸에서 남작 부인으로 탈바꿈한 샤르헨을 본체만체할 가능성이 컸다.
시녀장인 메이는 어째선지 점점 승패가 명확해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샤르헨과 자신이 엘리아나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있음에도 말이다.
‘혹시 그 죽음을 질리언 경이 자세히 파고들면 어떡하지? 시무스 부인이 다른 부인들을 동원해서 샤르헨 님을 따돌린다면? 테네브 부인은 아마도 살인이 일어난 가문과는 상종도 하지 않으려고 할 테지. 혹시나 오델리 가문에서 왕실에 조사를 요청하진 않겠지?’
메이는 순식간에 무서워졌다. 엘리아나가 짧은 시간에 만들어 놓은 그녀의 편이 너무 많았다. 가벼운 단계의 사교라고 해도 그들과 몇 년을 더 보고 지냈던 샤르헨보다 깊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필요한 정치적 동료였으니까. 엘리아나는 똑똑하고, 꼼꼼했다. 게다가 샤르헨보다 사교성도 좋았고, 행동력도 있었다. 샤르헨이 방에서 카르만의 관심이 줄어드는 것에 격분할 동안, 엘리아나는 발 빠르게 다른 귀족들을 만나고 다녔다.
어찌 보면 그녀는 일관되게 행동하고 있었다. 카르만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로즈 가문을 살리기 위해서 행동하는 것 말이다.
그러나 엘리아나가 그러면 그럴수록 샤르헨은 자극을 받았다. 샤르헨은 그녀를 통해서 자신이 살아온 모든 시간을 통째로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고 있었으니 말이다.
메이는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샤르헨의 모습에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럴 때 괜히 상황에 대한 조언이나 말을 꺼냈다가는 뺨을 한 대 더 얻어맞을 뿐이었다.
샤르헨은 화를 가라앉히려고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그러나 요즘 들어 감정이 쉽게 오르락내리락하는지라,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심호흡을 여러 번 하다가 겨우 말을 이었다.
“페페는 아직도 고민 중이야?”
“네. 하지만 이번에 올라온 문서에 따르면 6,000디온 이상을 뱉어 내야 할 수도 있어서 아마도 고민은 금방 끝날 것 같습니다.”
“바보 멍청이 뚱보. 그런 것도 제대로 못 숨기고 꾸미면서 내 장신구 명단은 왜 적어 둔 거야? 정말 내 뒤를 치려고 했던 거 아니야? 그리고 정말 음식 맛이 역겨워졌단 말이야. 토할 것 같다고.”
샤르헨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엘리아나의 말을 듣고 나니 페페도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샤르헨은 자신의 방을 향하는 복도로 걸어가면서 말을 이었다.
“메이.”
“네, 부인.”
“다른 적임자를 찾아야겠어.”
“생각해 둔 사람이 있으십니까?”
“하나 있잖아.”
샤르헨이 가리킨 사람은 다름 아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기 바쁜 하녀 르잔이었다. 메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멍청이는 지금 남작님 쪽에 붙어 있는데 괜찮을까요?”
“페페에게 시키게 해야지. 페페는 절대 못해. 하지만 남 시키는 건 평생 해 온 자기 일이잖아?”
“현명하십니다.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그래. 빨리 처리해 버려야겠어. 매일 스트레스를 받으니 머리도 아프고, 입맛도 없고, 피곤하니 잠만 쏟아져. 피부도 엉망이 된 것 같고.”
샤르헨은 방으로 들어와 피곤하다는 듯이 침대에 풀썩 누웠다. 메이는 그런 샤르헨의 신발을 벗겨 주려고 무릎을 꿇었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인!”
“아, 깜짝이야! 뭐야!!”
“그걸 하실 날짜가 한참 지나시지 않았습니까?”
“그거?”
샤르헨은 무슨 말을 하냐는 듯이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메이의 얼굴에는 한 줄기 희망이 퍼진 듯이 미소가 번졌다.
***
엘리아나는 시무스 남작가에 도착하자마자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도착 소식에 시무스 부인도 복도를 가로질러서 달려왔다.
“엘리아나!”
“시무스 부인!”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서 서로의 두 손을 잡았다.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듯이. 마치 전쟁을 함께 겪은 사람들처럼 말이다.
데이지 시무스는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머리를 한쪽으로 묶어 내렸지만, 표정은 훨씬 밝아 보였다.
“너무 이른 아침부터 내가 연락을 넣은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어제 인사도 없이 간 게 마음에 몹시 걸려서…….”
“전 괜찮아요. 그나저나 시무스 남작께서는요? 괜찮으신가요?”
“너무 괜찮아서 문제에요. 엄살은 꼭 죽을 것처럼 부려 놓고선, 후유증은커녕 사는 데 아무런 지장도 없대요. 총알도 잘 빼냈고요. 몇 주 쉬면 걷는 것도 무리가 없을 거래요.”
시무스 부인은 얄미워 죽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도 그녀의 목소리에는 안도가 섞여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큰일이 없어서요. 질리언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저택 안에 숨어 있던 사람들도 있었대요. 계속 있었으면 위험했을 거예요.”
“어머나, 세상에.”
“천만다행이죠. 자세한 조사는 아마 왕실 차원에서 나서서 할 모양이에요.”
엘리아나는 시무스 부인이 가장 궁금해할 점을 먼저 알려 주었다. 성격이 급한 그녀를 위해서였다. 시무스 부인은 대충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에 대한 감이 잡힌 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렇군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더 얘기 나눠요.”
“네, 그렇게 해요. 듣는 귀가 많지 않은 곳이면 좋겠어요.”
“그럼요.”
시무스 부인은 남작의 서재로 엘리아나를 안내했다. 남작은 침실에서 쉬는 중이라고 했다. 하녀가 차와 디저트를 내어 주고 돌아가자, 시무스 부인이 입을 뗐다.
“그래서 어떤 자들이죠? 그이가 정확히 어떤 일에 연루된 거예요?”
시무스 부인은 표정을 굳히고선 물었다. 엘리아나는 모든 것을 다 밝힐 순 없을지언정, 조사 과정에서 알게 될 내용들은 미리 알려 주자고 마음먹었다. 물론 율리시스에 관한 내용은 제외였다.
“예상했던 대로 콘테르국의 왕실이에요.”
“맙소사, 정말로 그이가 그들의 왕권 싸움에 개입했다는 건가요?”
“개입하게 되어 버린 게 맞겠죠.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에요. 조르디언 상단을 통해서 군수 물자를 납품하려고 했었나 봐요. 아마도 도미누스 왕자와 헨리우스 왕자 싸움에 낀 모양인데, 중간에 물자를 해적에게 약탈당했던 거예요. 그것 때문에 납품이 곤란해졌고요.”
“아니, 그렇게 어이없는 일이…….”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아마 조금 더 깊은 음모에 빠진 것 같아요. 그래서 부군과 거래하려고 했던 왕자 쪽에서 입을 막으려고 살해를 시도한 걸 테고요.”
시무스 부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들의 추적은 끝난 건가요?”
“그럴 순 없지만, 꼬리가 밟혔으니 쉬이 움직이진 못할 거예요.”
“이런 바보 같을 데가. 언제든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는 걸 고작 그런 작위 때문에…….”
“스스로 얻은 작위로 부인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으셨을 거예요. 부인은 워낙 사교계에서도 높은 분들과만 교류하시잖아요. 그 가운데에서 남작 부인이 높은 지위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아마 잭슨 남작님의 그런 마음을 누군가 교묘하게 이용한 것 같아요.”
시무스 부인은 고개를 숙였다. 울진 않았지만, 어두운 표정이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 그녀는 참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독한 고문을 받게 될 수도 있겠죠? 어쩌면 내란을 일으키려고 했다거나, 첩자라든가 그런 오해를 살 수도 있잖아요.”
“아마도요. 하마터면 전쟁으로도 번질 수 있었던 것이라서……. 쉽게 넘어가려고 하진 않을 것 같아요. 부인이 아시는 분은 없을까요?”
“이런 정치적으로 예민한 문제까지 사교로 해결할 순 없어요. 그이가 고통받는 걸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뭐든 할 텐데……. 방법이 없을까요?”
시무스 부인은 파티 때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로 엘리아나를 대했다. 그녀에게 답이 있을 거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태도였다. 엘리아나는 그런 그녀의 변화와 신뢰가 기뻤지만, 안타깝게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부인도 아시겠지만, 제겐 그리 큰 힘은 없어요.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 보겠습니다. 먼저 질리언 경과 한번 얘기는 해 볼게요. 아마도 그가 현장을 발견하고 수습한 만큼 어느 정도 관여할 수 있을 거예요.”
“질리언 경은 이미 여러 번 잭슨에게 상황을 들었지만, 내내 표정이 굳어있었어요.”
“앞뒤 상황을 조금만 더 설명하면 내란을 꾸몄다든지, 반역하려고 했다든지 하는 오해는 충분히 해명할 수 있을 거예요. 그것만으로도 중형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미안해요. 사실 그것조차 엘리아나에게 큰 부담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사랑하는 남편의 일인 만큼 염치 불고하고 부탁하게 되네요.”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해 봐야죠.”
시무스 부인은 결국 눈꼬리에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평민 출신의 가문이라서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는 게 마음에 걸렸을 거예요. 그래서 조금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했던 것 같아요. 바보 같은 사람, 그런 건 다 무시하면 되는데.”
“부인 역시 남작님이 무시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 자리까지 올리셨잖아요. 같은 마음이었을 거예요.”
시무스 부인은 손수건을 내려놓고선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엘리아나에게 입을 열었다.
“엘리아나.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약속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