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아침이 되자마자, 카르만 헌터는 엘리아나를 찾아왔다. 엘리아나는 늦은 아침을 먹다 말고, 그를 맞이했다.
“남작께서 이곳까지는 어쩐 일이시죠?!”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오?!”
“오델리 백작 가문에 초대받아서 다녀왔을 뿐이에요.”
엘리아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카르만은 물러서지 않고선 말을 이었다.
“행적을 보니 오델리 백작 가문만 갔던 것이 아니던데. 귀가할 때는 옷차림도 뒤바뀌어 있었고, 피까지 묻히고 있었잖소.”
“화병이 깨지는 소동이 있었을 뿐이에요.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크게 다쳤고요. 그나저나, 날 미행했어요?”
“경호를 붙인 것이오.”
“언제부터 그렇게 나를 아꼈다고요? 내 뒤를 밟지 말아요. 헌터 가문에 피해가 가는 일은 하지 않으니까.”
“그건 당신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당신의 모든 행동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평가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특히 정숙하지 못한 행동 같은 것들은 더욱.”
엘리아나는 그의 말의 속뜻을 알아차렸다. 자신의 옷이 바뀐 것으로 누군가 꼬투리를 잡을 것이란 말이었다. 그리고 그 처음은 다름 아닌 카르만 헌터 본인이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엘리아나도 할말이 없었다. 부적절한 소문이 날 수 있는 건 사실이었다.
“내 옷은 시무스 부인께 빌려 드렸어요. 시무스 부인이 한번 입어 보고 싶다고 해서요.”
“두 사람은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닐 텐데?”
“파티에서의 모습 때문인가요? 사람은 오히려 그렇게 싸우다가 친해지기도 하는 거예요. 마치 아이들처럼요.”
“누군가는 당신의 변명에 고개를 끄덕여 주겠지만, 누군가는 헛소리라고 일침을 놓을 것이오.”
카르만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엘리아나는 이쯤에서 자신이 접고 들어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엘리아나는 고개를 수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건 제가 조심하지 못한 부분이네요. 앞으론 유의할게요.”
“시무스 가문에서 나와선 어디로 향했던 것이오?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하던데.”
“제 일거수일투족을 그렇게 알고 싶으신 건가요?”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요.”
엘리아나에게 가문의 명예는 핑계 같아 보였다. 이건 단순한 카르만의 호기심이 아닌가? 하지만 저 냉랭한 표정을 보면 따져 묻기도 어려웠다. 엘리아나는 한숨을 내쉬고선 말을 이었다.
“시무스 남작 부인과 테르메우스 산으로 놀러 갔다 왔어요. 아무래도 사람들 시선이 있고 하니 편안하게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요. 격식 없이 말이에요.”
“시무스 부인에 대한 점은 여전히 납득할 수 없소. 그녀는 파티에서 당신에게 매우 적대적이었소.”
카르만은 엘리아나에게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어떻게 친분이 생긴 것인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떤 일에 개입되어 있는 것인지 말이다.
그러나 엘리아나는 그 많은 이야기를 모두 카르만에게 얘기해 줄 수 없었다. 자칫 일을 그르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가문의 명예를 중시하는 그에게 자신의 이런 행보는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할 것이었다.
“실례합니다, 부인. 시무스 부인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그래? 마침 잘됐네. 여자들 간의 우정을 죽어도 못 믿겠다고 하는 남작께서 계시는 와중에.”
베니의 말에 엘리아나는 안도했다. 겉으로는 당당한 척 걸어가서 서신을 열었지만, 심장은 쿵쿵 뛰고 있었다. 적힌 내용에 따라서 카르만에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실토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아나 로즈 남작 부인에게.
어제는 경황이 없어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네요. 괜찮다면 오늘 잠시 티타임을 가질 수 있을까요? ―데이지 시무스」
엘리아나는 편지를 카르만에게 건넸다. 그녀는 편지를 읽자마자 시무스 남작 부인이 남편의 처분과 현재 상황에 대한 부분을 궁금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서신에 그런 내용은 없었다. 앞뒤 상황을 모르는 카르만은 유추하기 힘들 것이었다.
“봐요. 이제 내 말을 좀 믿겠나요?”
카르만은 편지를 읽고선, 봉투를 다시 보았다. 접합부에는 분명히 시무스 가문의 인장이 왁스에 새겨져 있었다.
“시무스 가문은 욱하는 기질이 있는 평민 출신이오. 그리 질 좋은 가문이 아니니 가까이해서 좋을 게 없음을 명심하시오.”
“하지만 같은 남작의 지위에 있는 집안이에요. 그리고 시무스 부인 같은 경우는 사교계에서 인정받고 있고요.”
“같은 지위라고 해서 같은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오. 출신은 생각보다 많은 것의 장애물이 되지. 특히 이 헌터 가문에서는.”
카르만이 엘리아나에게 서신을 건넸다. 엘리아나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걸 알아서 수양딸로 정인을 입양한 건가요?”
“이 문제는 샤르헨과 관련이 없소. 그 이름을 함부로 올리지 말라고 나는 몇 번이고 경고했소.”
“카르만, 당신은 본질을 해결하지 못해요.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늘 정해진 틀에 사람을 구겨 넣어서 맞추려고 하죠. 그것이 귀족 사회의 룰이라면.”
“…….”
“전 그 룰을 거부하겠어요.”
“엘리아나.”
“어차피 기한이 정해진 남작 부인이잖아요. 그 기간 안에는 조심할게요. 남작님의 충고는 마음에 새기도록 할 테니 이제 그만 돌아가 주세요.”
“내일이라도 당장 내가 이혼을 선언할 것처럼 하는 그 말투 좀 어떻게 할 수 없겠소? 남들이 들으면 어떡하려고.”
“어차피 이 남작가에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요. 밖에선 조심하겠어요. 그리고 나와 대화가 하고 싶다면 예의를 갖추고 와요. 싸우려고 칼을 들고 오는 사람에게 웃으면서 손을 내미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당신과는 아무런 대화가 되지 않는군……!”
카르만은 제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것에 성이 나는 듯이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문이 ‘쾅’ 하고 닫히자 베니는 무슨 일이냐는 듯이 엘리아나에게 다가왔다.
“몰라. 갑자기 와서 어제 뭐 하고 다녔냐고 캐묻더니 실컷 뭐라고 하고만 갔어. 정말 재수 없어.”
엘리아나는 입맛이 싹 사라져서 아침 식사를 그대로 물렸다. 그러고서는 곧장 나갈 채비를 하였다. 시무스 부인과 대화를 마치고 돌아와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카르만은 생각보다 멍청하지 않았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엘리아나가 남작가의 재산을 가져가지 못하게 할 수도 있었다. 그 전에 어서 페페의 주머니에서 돈을 빼내야 했다.
그가 엘리아나에 대한 생각을 하나로 결정 짓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한다면 더더욱 말이다.
엘리아나는 카르만이 자신에 대한 연정과 시기 둘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으며, 그것이 그에게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 것이라 생각했다.
아마도 그 극단적 선택은 이혼일 것이었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 알아낸 페페의 횡령금인 6,000디온을 받아야 이혼을 진행할 수 있었다.
“회수 절차를 서둘러야겠어.”
“집사가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소리가 있어.”
“섣불리 움직였다가 더 많은 게 밝혀질까 봐 몸을 낮게 숙이고 있는 거야. 카르만이 부르면 나타날 수밖에 없겠지.”
엘리아나는 집사 페페와 같은 성향의 사람을 잘 알았다. 그들은 대체로 겁이 많았다. 그렇기에 대담한 일을 벌이지도 못했고, 도망가지도 못했다. 도망에도 일종의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베니. 옷을 입는 걸 도와 줘. 이렇게 이른 시간에 편지를 한 걸 보면 지금 바로 방문해도 괜찮을 거야.”
“응.”
엘리아나는 드레스 룸으로 들어섰다. 카르만 헌터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단 사실을 알자, 오히려 더 요란하게 움직이고 싶었다. 그녀는 머리를 높게 올리고 화려한 장식의 모자를 얹었다. 그러고선 짙은 화장을 마치고 진한 회색 드레스를 꺼냈다.
붉은 립스틱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두 사로잡을 정도로 밝았다. 엘리아나는 거울을 바라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붉은 피에 겁을 먹었던 어제의 자신은 새까맣게 잊은 듯이 환하게 말이다. 하지만 속은 여전히 거북하고, 혼란스러웠다. 엘리아나는 그 모든 것을 꾹 누르면서 자신의 방을 나섰다.
***
엘리아나는 마차에 오르기 전, 다시 걸음을 붙잡혔다. 이번에는 카르만이 아닌 샤르헨이었다.
그녀는 몹시 화가 나 있으나 참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입술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엘리아나, 외출이 너무 잦은 것 아닌가요? 집안을 이렇게 들쑤셔 놓았으면, 책임을 지셔야죠.”
“오늘따라 나한테 괜히 시비 걸고 싶은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을까.”
“괜한 시비라니요? 장차 이 집안의 안주인이 될 내가 이런 말도 못 하나요?”
“할 수 있죠. 그런데 갔다 와서 하면 안 될까요, 샤르헨? 난 지금 몹시 바쁜데.”
“남작가의 일보다 바쁜 일이 어디 있어요? 당신이 나선 뒤부터 음식은 맛이 없다 못해 구역질이 나요. 그리고 내 하녀들은 전부 다 어디로 보내 버린 거예요? 시중들 사람이 없어서 온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어요. 부인은 내 손발을 묶고 싶은가요? 이런 유치한 방식으론 카르만의 애정을 받을 수 없어요!”
샤르헨은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말했다. 살을 꼬집듯이 얄미워 죽겠다는 말투였다. 엘리아나는 잠시 귀를 막고 싶었으나, 인내심을 발휘해 그러지 않고 들어 주다가 이내 하나하나 답해 주었다.
“식재료에 손을 댔단 소리를 들은 모양인데, 양을 대폭 줄인 거지 품질을 낮추진 않았어요. 오히려 이전에 터무니없이 줬던 금액만큼 더 좋은 품질의 것으로 바꿨고요. 요리사도 그대로이니 맛이 변할 리는 없을 텐데?”
“그럴 리가 없어요. 내 시녀장에게 물어봐요. 난 지금 며칠째 구역질을 하고 있다고요. 한 입도 제대로 먹은 음식이 없어요.”
“샤르헨의 입맛이 바뀌었나 보죠. 주방장에게 음식을 다른 방향으로 만들어 보라고 지시하세요.”
“아뇨. 그건… 남작 부인의 일이잖아요.”
샤르헨은 최대한 온화하게 웃으려고 애를 썼다. 입꼬리가 떨렸지만 말이다.
“잠깐 나 대신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이렇게 마음대로 구는 건가 본데, 어디 할 만큼 해 봐요. 그래 봤자 당신이 이 남작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변하지 않아요. 나 샤르헨 헌터가 있는 한은요.”
샤르헨은 당돌하게 말했다. 엘리아나는 갈 길을 가로막히고, 훈수를 듣는 것에 지쳤다. 카르만에 이어 샤르헨까지……. 둘이 날짜라도 다르게 해서 오면 좀 좋았을까.
엘리아나는 욱하고 올라오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 이야기를 굳이 지금 여기서 해야 하는 이유가 뭐야? 내가 행정을 맡고 나니 주기적으로 네 주머니에 들어가던 장신구가 줄어들어서 화가 난 거야?”
“말조심해요, 엘리아나! 난… 난 그런 걸 받아먹은 적이 없어요!”
“과연 그럴까? 페페는 그렇게 똑똑한 성격이 아니야. 다른 건 종종 빼먹었어도 네게 매달 무엇을 바쳤는지는 꼼꼼히도 적어 뒀더군. 아마도 네게 겹치는 장신구를 바치지 않으려고 그런 것이겠지? 아니면 나중에 너를 협박할 용도거나?”
“날 모욕하려는 당신의 음모겠죠!”
샤르헨이 발작하듯이 빽 소리치고 몸을 돌리자, 엘리아나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끝났다는 걸 느끼고선 마차로 향했다. 샤르헨은 저택으로 들어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더 이상 카르만에게 질투를 유발하는 짓은 하지 말아요. 어리석으니까.”
“안 해. 몇 번을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네. 안 한다고. 난 지금 시무스 남작 부인의 초대를 받아서 차를 마시러 가는 길이야.”
“시무스 남작 부인? 당신을 술집 접대부라고 했던 그 여자를?”
“그사이에 사이가 좋아졌거든.”
“…도대체 무슨 수로…….”
“그건 영업 비밀이지.”
엘리아나는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선 말을 이었다.
“네가 사교계에서 귀여움을 떨며 사랑받는 존재라면, 나는 그런 건 못해도 각자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어. 사람들은 예쁜 인형보다는 쓸모 있는 도구를 원해. 앞으로 남작 부인이 되거든 그걸 명심해야 해. 곧 나는 쫓겨날 거 같으니까.”
엘리아나는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하다는 듯이 마차에 올랐다.
“건방져.”
샤르헨은 그녀를 붙잡지 않고 노려보았다. 마차는 망설임 없이 굴러갔다. 샤르헨은 입술을 깨물며 분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