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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52/121)

51화

베니가 향한 곳은 시무스 가문이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기도 했다. 베니는 시종들의 호위를 받아서 은밀히 시무스 부인의 방에 도착했다.

“엘리아나 로즈 부인께서 보내셨습니다.”

“무슨 일이 있나요? 그를 찾았나요?”

“가까이 가도 좋을까요? 은밀히 드릴 말씀입니다.”

“네. 어서요.”

베니는 시무스 부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데미테우스 산맥 끝에 있는 루크 오델리의 별장을 찾았습니다. 질리언 경과 군사들이 먼저 움직일 수 있게 연락을 넣었고, 곧 로즈 부인께서 시무스 부인을 데리러 오실 겁니다. 그때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하시라 하셨습니다.”

“믿을 수 있는 건가요? 그이가 정말 거기 있는 거예요?”

시무스 부인이 울먹이자, 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 오델리에게 유도 신문하셔서 얻어 낸 답입니다. 다른 분들의 도움도 받았고요. 로즈 부인께서는 어제 내렸던 비를 쫄딱 맞으실 만큼 진심이셨습니다.”

“세상에. 몸이 아프진 않나요?”

“로즈 가문의 사람들은 그 정도로는 끄떡없으니 걱정하지 마셔요. 부인의 채비를 제가 도와 드려도 괜찮을까요? 로즈 부인께서 당부하셨습니다.”

“네. 그렇다면 부탁할게요.”

베니는 시무스 부인의 침실에 있는 괘종시계를 한번 보고선 서둘러 그녀를 일으켰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

조셰프는 질리언이 있는 허트 가문으로 향했다. 그곳에 율리시스가 사람을 하나 대기시켜 두었기에 그곳으로만 가면 두 사람 모두에게 의견을 전할 수 있었다.

허트 가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율리시스 쪽 사람은 멜번이었다. 멜번은 소식을 듣자마자 말을 타고 움직였다. 조셰프는 그가 떠난 뒤에야 질리언이 있는 곳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엘리아나의 당부 때문이었다.

―기동력이 더 강한 것은 올리버 쪽이야. 질리언은 아무래도 왕국을 위해 일하는 군인이다 보니 절차가 있을 거야. 올리버의 기사에게 먼저 말하고 나서 질리언을 찾아가.

엘리아나는 짧은 시간에 빠른 판단력으로 베니와 조셰프에게 지시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질리언은 듣자마자 상관에 보고해야 한다고 움직였다. 조셰프는 그와 함께 허트 가문의 저택을 나왔다.

“자네는 어디로 가는가?”

“부인께 돌아갑니다. 부인께서는 중간에 빠져나오셔서 시무스 부인과 함께 움직이실 겁니다.”

“현장으로 온다고? 너무 위험한 일일 텐데!”

“부인께서 내리신 결정입니다. 제가 호위를 맡기로 하였습니다.”

“위병 둘을 붙여 줄 테니 함께 움직이게. 너무 큰 규모는 티가 날 테지.”

“네, 감사합니다.”

조셰프는 질리언이 붙여준 두 명의 위병을 데리고선 오델리 가문으로 향했다. 보슬보슬 내리던 빗방울이 굵어지고 있었다. 조셰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이건 제 선물이에요.”

헬렌은 작은 손수건을 꺼냈다. 붉은 튤립이 수놓아진 것이었다. 손수건의 테두리에도 꼼꼼하게 금실로 자수를 둘러 놓은지라, 한결 고급스러워 보였다.

“저, 저를 위해서요?”

레이 오델리는 손수건을 받고선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귀한 보석을 쥔 듯이 행복한 얼굴이었다. 엘리아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나는 이만 빠져 줘야 할 것 같군요. 질리언이 알면 난리가 나겠지만요.”

“엘리아나!”

“부, 부인! 아닙니다. 제가 불편하게 해 드렸나요? 아, 아닙니다! 전혀!”

“불편하긴요. 두 분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즐겁답니다. 그러나 저는 한 가문을 꾸려 가야 하는 몸.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요. 하지만 제가 헬렌 양을 데리고 함께 떠나면 두 사람이 너무 아쉽지 않을까요?”

“아니에요. 엘리아나. 저, 저도 가도 좋아요.”

“…….”

레이 오델리는 입술을 움찔거렸다. 엘리아나는 헬렌의 손등을 쓰다듬으면서 레이 오델리를 보라는 듯이 턱짓했다.

“헬렌, 조금 더 눈치채 주세요. 사랑에 빠진 청년은 아직도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모양인데.”

“…….”

헬렌의 볼이 붉어졌다. 레이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아나는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을 이었다.

“이렇게 즐거운 자리에 나를 함께하게 해 줘서 고마워요. 멋진 정원도 보여 주고요. 무엇보다 나의 친구인 헬렌에 대한 마음이 진심인 것 같아서 기쁘군요.”

“한, 한 번도 진심이 아닌 적은 없었습니다!”

“좋아요. 하지만 조금이라도 헬렌에게 무례한 짓을 한다거나, 선을 넘는다면 나와 질리언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그녀를 소중하고 정중하게 대해 주세요.”

“물론입니다! 오델리 가문의 이름을 걸고, 그건 약속드립니다! 저는 누구처럼… 소중한 헬렌 양을 함부로 하지 않을 거예요.”

레이 오델리가 분하다는 듯이 말했다. 엘리아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웃으면서 헬렌을 보았다.

“헬렌, 나 먼저 떠나도 되겠어요?”

“…네. 그, 그래도 조만간 다시 만나요.”

“좋아요. 질리언과 함께 또 즐거운 시간을 가져요. 오델리 군. 그럼 먼저 인사드릴게요.”

“잠깐만요, 부인!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딱 맞춘 듯이 조셰프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엘리아나는 조셰프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선 다시 레이를 보았다.

“저의 든든한 경호병이 함께할 거라 괜찮아요. 우리 헬렌을 잘 부탁해요.”

“네! 늦지 않게 집까지 잘 모시겠습니다!”

바짝 긴장한 듯한 모습이었다. 엘리아나는 헬렌의 어깨를 부드럽게 한 번 쥐었다 놓고선 걸음을 뗐다. 미소를 띤 여유 있는 모습이었으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 잭슨 시무스가 있을까? 그곳에 없다면 어디에 있을까? 모두를 움직여서 그곳에 가기로 한 제 판단이 맞길 바랐다.

엘리아나는 살아 있는 잭슨 시무스를 원했다. 그의 생사 여부는 이제 두 나라의 외교적인 문제로까지 번질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잭슨 시무스의 죽음이 일종의 공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군수 물자와 관련된 부분이니 더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잭슨 시무스를 생포하여 그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알아내고, 각자의 진영에서 대비하는 것이 가장 현명했다. 율리시스는 율리시스의 방식으로 콘테르국에 전달한다. 콘티노국은 질리언이 담당한다. 그런다면 두 국가는 눈 뜨고 당하진 않을 것이었다.

이 배후에서 조르디언을 조종하는 것이 도미누스이든, 헨리우스이든. 아니면 둘 다이든 간에 말이다.

엘리아나는 질리언이 준비해 준 마차를 타고선 시무스 가문으로 향했다. 입가에 있던 미소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마차를 이끄는 말은 흙탕물을 거칠게 박차고 나갔다.

***

엘리아나는 시무스 가문에 도착하자마자 몰래 작은 마차로 갈아탔다. 질리언의 마차에는 질리언이 보내 준 위병 두 명과 시무스 가문의 시녀 둘을 태웠다. 그중 한 명에겐 시무스 부인인 척 옷을 입히기도 했다.

자신을 따라붙은 이가 있다면 혼란을 주기 위해서였다. 엘리아나는 질리언의 마차가 떠난 뒤에야 뒷문으로 조용히 움직였다. 조셰프와 시무스 부인만을 데리고선 말이다.

베니는 엘리아나와 옷을 바꿔 입고선 시무스 부인의 방에 남았다. 엘리아나는 머리를 하나로 단정하게 묶고선 하녀들이 쓰는 머릿수건을 썼다.

“엘리아나, 그곳에 정말로 잭슨이 있을까요?”

“그러길 바라야죠. 지금으로선 가능성이 가장 커요. 오늘 찾지 못하면, 내일은 더 위험해질 거예요. 반드시 오늘 찾아야 해요.”

“이 인간 대체 몇 명을 고생시키는 건지……. 어휴, 이 바보 같은 사람. 그깟 작위가 뭐라고.”

시무스 부인은 눈물을 보였다. 엘리아나는 자신의 손수건으로 시무스 부인의 뺨을 닦아 주었다.

비가 더 쏟아지면서 마차의 속도는 더뎌졌다. 작은 마차는 덜컹거리고, 흔들림이 심했다. 엘리아나는 시무스 부인의 어깨를 안고선 조셰프를 보았다.

“조셰프, 다 젖었네요.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고생이 많았죠.”

“아닙니다, 부인.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밤이 되기 전에는 모두 안락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시무스 가문도, 우리도.”

그곳을 마냥 안락하다고 할 순 없었지만, 엘리아나는 뒷말을 삼켰다. 말하지 않아도 조셰프도 그 속뜻을 눈치챘을 테니 말이다. 전쟁이 없는 내일. 엘리아나는 그것을 생각하면서 떨고 있는 시무스 부인을 더 꼭 안았다.

강해 보이는 이 여인은 남편이 죽음의 위기 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 엘리아나는 하루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

루크 오델리의 별장은 몹시 찾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엘리아나 일행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이미 누군가에 의해서 난도질당한 듯이 파헤쳐진 진흙 길을 따라가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먼저 도착했을까.

엘리아나는 입술을 물어뜯었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헌터 가문이었다. 카르만 헌터와 사이가 좋았다면, 그를 동원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랬다면 잭슨 시무스를 살릴 가능성은 더 커졌을 텐데…….

하지만 그 생각은 의미가 없었다. 카르만 헌터는 지금 상태에서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기 때문이었다. 엘리아나는 한숨을 삼키고선 마차에서 내렸다. 이미 별장 입구는 어지러운 발자국들이 가득했다.

“부인. 제가 앞서겠습니다.”

“부탁할게요, 조셰프.”

조셰프가 앞에 서고, 엘리아나는 시무스 부인과 뒤를 따랐다. 철문으로 된 별장 문은 이미 반쯤 부서져 있었기에 들어가는 게 어렵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진흙 자국을 따라 걷는 순간이었다.

탕. 탕. 탕.

총성이 세 발 울렸다. 세 사람의 걸음은 얼어붙은 듯이 멈췄다. 조셰프가 먼저 총성이 울린 곳으로 뛰어갔다. 엘리아나와 시무스 부인도 그 뒤를 따랐다.

“세상에…….”

대리석 바닥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엘리아나는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선 입을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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