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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50/121)

49화

“올리버, 잭슨 시무스 남작은…….”

“살아 있어요.”

“…….”

그 말에 엘리아나가 눈을 감았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율리시스는 그녀를 뒤쪽에 세워 둔 마차로 안내했다. 파티 때 썼던 화려한 마차와 달리 검은 말이 모는 작고 까만 마차였다.

엘리아나가 앉자마자 율리시스는 밖을 살폈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죠?”

“우선 잭슨 시무스의 안전부터 말해 줘요. 내 정보는 그다음이에요.”

“도망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빠져나가고 있어요. 오늘까지도 어디로 움직였었는지가 잡혔지만, 또 빠져나갔어요. 중요한 건 살아 있다는 거예요. 다치지도 않았고요.”

“직접 눈으로 확인한 건가요?”

“물론이에요.”

엘리아나는 빗물이 떨어지는 턱 끝을 한 번 닦아 내고선 말을 시작했다.

“잭슨 시무스가 조르디언을 통해서 유통하려던 군수 물자는 의약품이에요. 중간에 조르디언 상단이 변심하기도 했고, 있던 물건마저 해적에게 약탈당했어요. 그 물건은 회수하지 못했고요. 질리언이 해적들을 소탕해 버렸거든요.”

“의약품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죠?”

“해적들이 분해해서 마약으로 쓰고 있었다더군요. 군용 진통제는 마약으로 분류될 정도로 강한 약품들이 많잖아요. 중간 상인은.”

“실버스티앙.”

“맞아요. 3일 전에 죽었고 범인은 자수했지만, 그 사람이 진짜 범인이 아닐 거예요.”

“범인은 조르디언 상단 내부에 있어요. 잭슨 시무스와 관련된 걸 모두 지우려고 하고 있죠. 도미누스 형님이 화가 많이 났거든요.”

도미누스에게 적발될까 싶어서 모든 걸 은폐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앞뒤가 맞았다. 범인도 조르디언 소속이었다.

“실버스티앙의 가족도 감쪽같이 사라졌고요. 죽은 건 아닐까 싶어서 찾아봤는데, 아무래도 강제 이주를 당한 것 같아요. 이주된 곳에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요.”

엘리아나는 도미누스의 끔찍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완벽하게 한 가족의 삶을 도려내 버리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누군가 잭슨 시무스를 도와주고 있어요. 이번에는 꼬리도 잡히지 않게 도주시켰는데……. 어디로 향했는지 모르겠네요.”

“오델리. 루크 오델리일 거예요.”

“루크 오델리?”

“시무스 부인에게 들었어요. 그와 어렸을 때부터 친한 친구였다고 하더군요. 오델리 백작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해서 소문이 크게 나거나 자주 어울리지는 못했던 모양이지만요.”

“그에 대해서 조금 더 말해 봐요.”

“시골에 있는 귀족과 결혼했어요. 그 귀족 가문은 콘티노국 이곳저곳에 땅이 많아요. 시무스 남작도 그중 한 곳에 아마 숨겨 뒀을 거예요. 난 곧 오델리 백작의 저택에 방문해요. 거기서 최대한 정보를 얻어 볼 테지만, 율리시스도 나름대로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와 정보를 얻는 경로도 다르고 발도 빠르니까요.”

율리시스는 엘리아나가 파랗게 질린 입술로 또박또박 말하는 것을 듣다가 자기 외투를 벗어 그녀의 몸을 감쌌다.

“물론이죠. 고마워요. 내가 찾을 수 없는 정보였어요. 엘리아나 당신은 정말… 정말 대단하군요.”

“나 혼자 한 일이 아니에요. 질리언도 합류했어요. 콘티노국에서도 곧 이 정보를 알게 될 거예요. 나로선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란 걸 이해해 줘요. 난 콘테르국의 왕위 계승 싸움이 번져서 전쟁이 되길 원하진 않아요.”

율리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콘티노국에서 눈치를 채면 조르디언 상단 쪽에도 압박이 들어가게 된다. 자신의 두 형님도 태도를 조심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아직 국왕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들이었으니.

이번 조르디언 상단 건은 도미누스와 헨리우스가 던진 마지막 승부수였다. 둘의 영지에서 싸움이 일어나거나, 아니면 정말 콘티노국과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어쨌든 쐐기를 박고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되레 국왕을 격분하게 했다. 왕실 후계자로서 지켜야 할 선을 넘은 것이었다. 그것은 믿고 거래하고 있던 조르디언 상단 측도 마찬가지였다. 존 조르디언이 선택한 게 도미누스인지, 헨리우스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가 둘 중 누구 하나가 왕이 될 거라고 생각했고, 그쪽으로 등을 돌렸다는 것이었다.

국왕은 그것을 반역과 같다고 보았다. 잘못하다가 도미누스와 헨리우스 모두 처형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처럼 콘테르국의 상황이 급박하게 굴러가고 있는 만큼, 율리시스는 콘티노국을 신경 쓸 수 없었다. 그러나 엘리아나가 주요 인사인 질리언과 친분이 있는 덕택에 그 문제가 바로 해결된 것이다.

모든 잠긴 문의 열쇠 같았다. 그녀가 손을 대면 모든 비밀이 풀렸다. 그런데 정작 그런 그녀의 손에는 우산 하나가 없었다. 이렇게 쫄딱 젖어 버릴 만큼, 엘리아나에겐 아주 얇은 보호막조차 없었다. 남편이라는 작자는 이름뿐이었고, 엘리아나는 제대로 된 무기 하나 없이 맨몸으로 모든 일을 헤쳐 나갔다.

“엘리아나. 일이 어떻게 되건 당신은 이 저택에서 도망치는 게 좋겠어요. 로즈 가문과 당신의 사람들을 모두 내가 책임지겠으니.”

율리시스가 장난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진심이었다. 이 여자에게 아주 작은 보호막이라도 되어 주고 싶었다. 엘리아나는 그런 율리시스의 뺨을 살짝 매만지면서 말했다.

“드물게 진심이군요.”

“그대 앞에서 진심이 아니었던 적은 별로 없는데.”

“있긴 있었던 모양이에요?”

“아직은 비밀이 많아야 하는 남자라.”

“말만으로도 고마워요. 하지만 나는 아직 이 헌터 남작가에 있어야 해요. 해야 할 일이 많거든요. 당신과 함께 있었다면, 이런 정보도 얻지 못했을 거예요.”

“…….”

“그리고 난 누가 뭐라고 해도 아직은 헌터 가문의 남작 부인이에요.”

엘리아나는 선을 그었다. 사랑이라는 것은 우습게도 약해 빠진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그 누구보다 율리시스에게 강한 끌림을 느꼈다. 그러나 그 끌림이 역으로 자신을 집어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샤르헨에 대한 카르만의 마음이 변했듯이, 마음이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율리시스는 왕자였다.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엘리아나는 다신 누군가의 덕을 통해서 가문을 지키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일으킨 로즈 가문만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율리시스는 자신에게서 떨어지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엘리아나.”

“네.”

“당신을 엘리아나 로즈 헌터가 아니라, 그냥 엘리아나 로즈로서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날 이혼시키고 싶다는 말인가요? 노골적인데요?”

율리시스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녀를 잡은 손을 놓지는 않았다. 엘리아나는 그 손을 마주 잡아 주면서 말했다.

“잭슨 시무스 남작을 살려 주세요.”

“…….”

“그래야 나는 한 걸음 더 이 저택의 바깥으로 이동할 수 있어요.”

“스스로 빠져나오고 싶다는 것이군요.”

“그게 아니면 의미도, 매력도 없겠죠.”

엘리아나는 그렇게 말하고선 마차에서 내렸다. 어깨에는 율리시스의 외투를 그대로 걸친 채였다.

“다음에 만날 때 돌려줄게요. 그때까지 몸조심해요. 율.”

엘리아나가 처음으로 ‘올리버’가 아닌 율리시스의 이름을 불렀다. 율리시스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다가 웃으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엘리아나는 검은 외투를 뒤집어쓰고선 저택의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장 베니와 경호병은 옆문을 탄탄하게 닫았다.

밖에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던 투리스는 빗방울을 우스스 쏟아 내면서 들어왔다.

“어떻게 수확이 좀 있으셨습니까?”

투리스는 마른 천으로 얼굴을 닦아 내면서 물었다. 그의 큰 얼굴에 비해서 천은 작아 보였다. 율리시스는 마차 등받이에 푹 기대면서 대답했다.

“말도 못 할 만큼 많은 것들을 얻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얻지 못했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투리스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율리시스는 그저 웃고선 말을 이었다.

“루크 오델리.”

“루크 오델리요?”

“우리가 잭슨을 놓쳤던 곳에서 가장 가까운 그자의 은신처를 찾아내야 해. 거기에 잭슨이 있을 거야.”

“멜번과 나눠서 수색하겠습니다. 비가 오니 적들도 이동이 조금은 느려졌을 겁니다.”

“과연 그럴까?”

소리 없이 출발한 마차가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율리시스는 고민이 가득한 표정으로 창밖을 보았다. 빗줄기가 더 굵어지고 있었다.

***

“세상에. 엘리! 무턱대고 뛰어나가 버리면 어떡해?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쫄딱 젖었잖아!”

베니는 진심으로 화가 나서 말했다.

그녀는 엘리아나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뜨거운 물을 채운 욕조로 그녀를 빠뜨렸다. 그러고선 부드럽게 머리를 감겨 주었다.

그러면서 쉴 새 없이 잔소리를 퍼부었다. 감기로 사람이 죽는 것을 모르냐는 둥, 시녀랑 경호병은 뒀다가 어디다 쓸 거냐는 둥. 베니는 엘리아나가 어떻게 될까 봐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른 모양이었다.

엘리아나의 파랗게 질린 입술이 제 색깔을 되찾을 때까지 베니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엘리아나는 따뜻한 차를 양손으로 들고 마시면서 베니를 사랑스럽게 보았다.

“그래도 네가 있으니까 맘껏 달렸던 거야.”

“세상에. 돌아와서 이렇게 나를 고생시키려고?”

“푸흐흐, 응.”

“정말 못 말려. 말 한 마디를 안 진다니까.”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그나저나 저 옷.”

“몰래 세탁해 둘게. 또 카르만 그 녀석이 알면 얼마나 난리를 쳐 대겠어?”

“응. 부탁할게.”

율리시스의 외투는 크고 따뜻했다. 마치 그가 자신을 안아 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좋은 동료였다. 같은 목적지로 향하는 게 아니더라도, 가는 동안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협력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상이 될 수 있을까. 아니, 될 수 없을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차를 후후 물어서 한 모금 마시고선 다시 한번 다짐했다. 설렘, 사랑, 연정, 연애, 이런 것들은 모두 사치였다.

지금 집중해야 할 것은 오로지 잭슨 시무스의 생존,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질 최악의 사태들을 막는 것이었다. 그것이 앞으로 로즈 가문의 존폐를 결정하는 키가 될지도 몰랐다. 엘리아나는 자꾸 떠오르는 율리시스의 황금빛 눈동자를 지워 내려고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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