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8/121)

47화

민간 군수 물자 유통. 이것은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영지가 있는 귀족들은 모두 위병이라는 이름의 근위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유사시엔 자신의 나라를 위해 싸웠다.

민간 군수 물자는 그런 각 영지의 위병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었기에, 철저하게 양이 통제되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것을 불법적으로 더 많이 확보하려 했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전쟁을 준비한다는 뜻이었다.

콘테르국은 왕위 계승 경쟁이 이어지면서 주변국과 전쟁을 자주 치렀지만, 이웃한 콘티노국은 제외였다. 하지만 잭슨 시무스가 연관되면서 오해라도 생기는 날엔 그동안 쌓아온 외교 관계가 무너지게 될 수도 있었다.

그 뒤에 자리한 게 도미누스 밀과 헨리우스 밀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엘리아나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 위험성이 크게 다가왔다.

왕위 계승 싸움에 본격적으로 연루되기 시작하면 콘티노국은 위험했다. 단순히 국가의 안전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헌터 남작가는 지금 위병 체계가 엉망이었고, 엘리아나는 군인으로 징병될 나이의 동생이 있었다. 하물며, 이제 기틀 잡기에 들어간 율리시스는 아무리 명석하다고 한들 고래 등 사이에 낀 새우가 되고 말 것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엘리아나에게 전쟁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군인인 질리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잭슨 시무스와 접촉한 자가 콘테르국의 사람인 것은 확실하오? 그것도 왕가의?”

“테르어를 사용했어요.”

“테르어? 젠장. 확실하군.”

엘리아나는 시무스 부인에게 받아 온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가장 처음 도착했던 편지였다.

“난 테르어를 읽을 줄 알아요. 누군가가 시무스 남작에게 군수 물자를 받기로 약속했고, 그는 조르디언 상단에서 그것을 약속된 가격에 사들이기로 했죠. 중간에 무슨 문제가 일어났고 그것이 불가능하게 됐지만, 남작과 거래하기로 한 쪽에서는 무조건 물건을 달라고 하고 있었어요.”

“그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요?”

“억지죠. 그러나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했어요.”

질리언은 자신의 서재 책상에 있는 지도를 폈다. 콘테르국과 콘티노국의 각 영지가 자세히 나와 있는 지도였다. 그가 개인적으로 군사력을 체크해 놓은 표시도 있었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보여 주는 게 아니었지만, 엘리아나에게만큼은 괜찮을 것 같았다.

“누구지? 도미누스? 헨리우스? 그 두 사람 중 하나일 거요. 그들은 전쟁에 미친 사람들이니까. 시무스 남작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들과 거래를 하려고 한 것인지!”

“어떤 지위를 약속받은 모양이에요. 잭슨 시무스는 요근래에 은밀히 귀족 부인들을 만나러 다녔어요. 그것 때문에 문란하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죠.”

“확실히 그렇소. 그자의 아랫도리가 값싼 모슬린보다 가볍다는 이야기가 모든 귀족 가문에 돌고 있었으니까.”

“돈이 필요했던 거예요. 경제력을 가진 부인들에게서 몇백에서 몇천 디온을 빌려서 최악의 상황을 막으려고 했던 거겠죠.”

“그러나 조르디언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엘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을 불렀을 것이었다. 아무리 메워도 메울 수 없는.

“부르는 게 값이었겠죠. 하물며 그 군수 물자가 의식주에 연관된 게 아니라 의약품이나 무기 같은 것이었다면요?”

“대안이 없었겠지.”

“네, 맞아요. 노예 시장이나 현금 사냥꾼들 사이에선 이미 잭슨 시무스가 죽었을 거란 소문도 있어요.”

“그들이 알고 있다면 정말로 위험한 것일 거요. 요즘 들어 해로로 군수 물자가 이동된 적은 없었소. 그런 게 있었다면 내가 눈치를 챘겠지. 무언가로 위장했을 거요. 잭슨 시무스… 잭슨 시무스라.”

질리언은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꽉 잡고 있는 해군이었다. 그는 잽싸게 몇 군데를 체크했다. 그러고선 산처럼 쌓여있던 서류들을 빠르게 검토했다.

“어쩌면 이번에 소탕한 해적들이 가지고 있었던 마약들도 의약품에서 추출한 것일지 모르오. 그 양이 어마어마했거든.”

“만약 시무스 남작이 어렵게 구한 물자까지 해적에게 빼앗긴 상황이라면…….”

“정말 죽음뿐이었겠군.”

질리언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고선 다시 빠르게 서류들을 훑었다. 그러다가 잠시 손을 멈추고선 엘리아나를 보았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군사술에 관한 지식은 대단했다. 통찰력도, 추리력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지금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장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방금까지 브로치가 어떻고 드레스의 프릴이 어떻다고 하면서 헬렌과 웃고 있던 그녀는 사라진 것만 같았다.

‘이 여자는 너무 대단한 여자야.’

질리언은 자신이 그녀에게 끌림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듣자 하니 엉성한 카르만 헌터의 저택도 싹 뜯어고치는 것 같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카르만 헌터가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카르만 헌터도 설득했다. 엘리아나는 생각할수록 대단한 여자였다. 하지만 그런 본인의 진가를 화려한 모습과 화장 뒤로 숨기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눈을 깜빡거리기만 했다.

“왜 그렇게 빤히 봐요?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당신이 새삼 대단해 보여서.”

엘리아나는 ‘풋’ 하고 웃더니 말을 이었다.

“이제야 알아보다니 실망인걸요? 얼굴만 예쁜 줄 알았나요?”

“대체 그런 정보는 어디서 얻어오는 거요? 특히 현금 사냥꾼들의 정보 같은 건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게 아니오. 돈을 다발로 갖다 바친다고 해도 절대 귀족 부인을 상대해 주지 않을 텐데.”

“난 그냥 귀족 부인이 아니니까요.”

“엘리아나. 이건 장난으로 넘기지 마시오. 중요한 문제요.”

엘리아나가 혹시나 다른 정보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질리언은 군인으로서 그녀를 경계해야 했다. 엘리아나는 그런 질리언의 조심스러움을 충분히 이해했다.

“나를 의심하는 건 이해하지만, 난 정말 일반 귀족 부인이 아니에요. 내가 살았던 동네는 옆집에 현금 사냥꾼이 살고, 앞집엔 범죄자가 사는 동네였다고요. 그리고 우리 집은 그들의 터진 바지나 셔츠를 꿰매 주고 돈을 받는 귀족 가문이었고요.”

“…….”

“이제 알겠어요? 난 그들과 친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어요.”

질리언은 아직 어린 그녀에게 닥쳤었던 숱한 시련을 잠시 엿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생각만 해도 슬프다는 듯이 울지도 않았고, 분노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이 가진 하나의 기억을 얘기하듯 담담했다.

엘리아나는 질리언을 또렷하게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살아 있는 잭슨 시무스를 원해요. 도와줘요, 질리언.”

“난 도울 수밖에 없소. 전쟁은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니까. 그러나 당신까지 위험해질 필요가 있소? 정치적인 이유라면 내가 다른 것으로 대신해 주겠소.”

“아뇨, 전혀 정치적이지 않아요. 이건 여자들의 의리 문제예요. 난 데이지 시무스가 미망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아요. 그들의 가정을 지켜 주고 싶어요. 그렇게 약속했고요.”

“…….”

“질리언.”

“알겠소. 당신은 정말, 못 말리는 여인이군. 한 가지만 잘해도 좋을 텐데……. 욕심이 너무 많은 건 좋지 않소.”

“욕심이 아니라 작은 관심이라고 해 둬요. 그리고 난 그런 나와 같은 편이 되기로 한 것을 후회하지 않게 해 줄 자신이 있어요.”

엘리아나 로즈는 작은 가방에서 동전을 꺼냈다. 질리언이 자신에게 주었던, 양면이 앞면인 동전이었다. 책상 위에 올려진 그것을 보고 질리언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하면 되겠소?”

“잭슨 시무스가 보내려고 했던 물건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해 주세요. 조르디언 상단에게 이 정보를 콘티노국에서 눈치챘고, 더 이상 움직였다간 콘티노가 먼저 움직일 거란 압박을 줘야 해요. 섣불리 시무스 남작을 죽이지 못하도록요.”

“그대가 생각하기에 남작을 죽이려는 자가 조르디언 상단 사람 같소?”

엘리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를 죽이려는 사람은 많아요. 이유도 각양각색이죠. 모든 걸 막을 수 없어요. 하지만 그 중간에 끼어 있는 조르디언을 압박하는 게 가장 효과가 좋을 거예요.”

“좋소. 그대 말대로 하지. 하지만 난 콘티노국에 충성을 맹세한 군인이요. 이 부분은 그저 흉내가 아니라 진짜로 왕실에 보고가 들어갈 거요.”

“물론이에요.”

엘리아나의 똑 부러진 대답에 질리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아나는 나갈 채비를 하면서 말을 이었다.

“루크 오델리가 잭슨 시무스를 숨겨 줬을지도 모른다는 소리가 있어요.”

“그자는 시골에 있소. 여기까지 오기엔 너무 멀 텐데.”

“하지만 그에겐 많은 별장이 있잖아요? 게다가 여기 오델리 가문에 자기 형제들도 있고요. 시무스 부인에게서 나온 정보이니, 확인해 볼 필요가 있어요.”

“설마 오델리 백작 가문을 방문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헬렌과의 약속이 우선이라고요. 하지만 남녀의 데이트에 나 같은 유부녀가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잠시 빠져나와 주는 게 예의죠.”

“그건 안 되오! 우리 헬렌은 아직 순수하단 말이오!”

질리언은 꽥 하고 소리를 질렀다. 어느새 군인 질리언에서 헬렌 허트의 오빠인 질리언으로 변한 그를 보며, 엘리아나는 못 말린다는 듯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 제발. 질리언.”

“정말 안 되오. 혹시라도 그 개자식이 헬렌의 손이라도 잡으려고 하면 어떡하오?”

“입맞춤이라도 하는 날엔 주먹을 날리겠군요?”

“목을 베어 버릴 거요.”

엘리아나는 그런 질리언의 손을 잡아서 손등 위에 가볍게 키스했다.

“뭐, 뭐 하는 거요!”

“이런 건 인사라고 해요, 인사.”

“……!!”

“제발 동생을 싸고돌지 말아요. 이제 헬렌도 행복해져야 한다고요. 그런 보수적인 부분은 고쳐야 해요. 질리언도 연애해야죠. 결혼도 해야 하고요.”

엘리아나는 그의 손을 툭 떨궜다. 그러고선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원하는 건 헬렌이 외톨이로 남는 게 아니라, 행복해지는 거잖아요.”

“…….”

“레이 오델리를 조금만 믿어 봐요. 헬렌에게 반해서 끈질기게 순정을 바치고 있는 녀석을요.”

엘리아나는 환하게 웃으면서 그의 서재를 나갔다. 질리언의 눈은 옅은 립스틱 자국이 남은 자신의 손등을 향했다. 얼굴이 새빨개진 그는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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