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7/121)

46화

“루크 오델리?”

“루크 오델리라면, 오델리 백작의 둘째 아들을 말하는 건가요?”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었다. 오델리 가문과 시무스 가문은 그리 친하지 않았다. 평민 출신의 시무스 가문을 오델리 가문이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파티에서 오델리 백작이 엘리아나의 편을 들어 준 것은 아마도 그녀가 헌터 남작의 부인이었기 때문도 한몫했을 것이었다.

그런 오델리 백작의 둘째 아들과 잭슨 시무스라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어디서도 들은 적 없기도 했다.

“굳이 한 명을 꼽으라면요. 어렸을 때 아주 친했다고 들었어요. 나를 만나고도 종종 얘기하곤 했어요, 그 사람은 오델리 백작 가문 사람답지 않게 인간성이 있다고요. 사실 그 사람 말고는 내가 다 찾아가 물어보기도 했고요. 물론 거짓말을 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복잡한 사정을 전부 말할 수 있는 친구는 그에게 몇 없어요.”

“루크 오델리는 지금 이 도시에 살지 않을 텐데요. 시골에 있는 귀족 가문의 영애와 결혼했잖아요.”

그것도 굉장한 부를 가지고 있는 가문이었다.

영지가 넓고, 자식이라곤 외동딸밖에 없어서 재산에 눈독을 들이고 혼처를 노리는 자가 많았는데, 웃기게도 그런 사실을 하나도 몰랐던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졌고, 연애 결혼을 하게 되었다.

양쪽 가문의 부모 모두 서로의 집안을 마음에 들어 했고, 무엇보다도 두 사람이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서 일찍 혼례를 올렸다. 그 이후로 루크 오델리는 부인의 본가가 있는 시골로 내려가 살고 있었다.

그곳까지 잭슨이 무사히 갈 수 있었을까? 엘리아나는 자문했다. 아니, 그럴 수 없다. 너무 멀었다.

더불어 루크 오델리와의 우정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여기서 거리가 너무 멀어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위기 상황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는 없어요. 지난번 파티에서 오델리 백작에게 미움을 받는 바람에 연락해 보진 못했지만……. 오해 말아요. 엘리아나를 탓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스스로 초래한 결과니까.”

그녀는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자신의 실수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엘리아나는 그에 대해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바로 주제를 옮겼다.

“제가 며칠 내에 오델리 백작가에 방문해 볼 수 있어요.”

“어떻게요?”

“헬렌 허트 양이 레이 오델리 군에게 초대를 받았는데, 제게 함께 가자고 했어요. 백작께도 허락받았고요. 방문 일정이 곧 나올 거예요. 그때를 노려 볼게요. 부인은 이 근방에 루크 오델리 소유의 땅이나 별장이 있는지를 알아봐 주세요.”

“알겠어요. 그런데.”

시무스 부인은 진정하더니 엘리아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다.

“이제 와 묻기 우습지만……. 왜 나를 도와주는 거죠? 나는 당신을 곤란하게만 했는데요.”

“나를 모임에 끼워 주기로 했잖아요. 잊었어요?”

“하지만, 그깟 사교 모임 때문에 이렇게 위험한 상황까지 감수할 이유는 없어 보이는데요.”

“그깟이라뇨, 부인. 부인이 만들어 놓은 그 소중한 모임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건 누구보다 부인이 가장 잘 알 텐데요. 그 모임을 통해서 부군을 남작으로 만든 장본인이잖아요.”

“……!!”

데이지 시무스는 사교의 힘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만큼이나 그 힘을 잘 알고 있는 엘리아나를 다시 보았다. 여자들끼리 모여서 수다나 떠는 자리라면서 하찮게 치부하는 사람만 여럿 만나 왔던 터였다.

그러나 엘리아나는 달랐다. 소문과도 한참 다른, 지혜로운 여자였다. 자신이 최근에 만난 어떤 영애보다 말이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군요. 엘리아나. 잘 부탁해요.”

시무스 부인은 눈물을 닦고선 손을 내밀었다. 엘리아나는 그 손을 잡고선 말했다.

“잭슨 남작님은 꼭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러길 바라요. 제발……. 난 그이 없이는 안 돼요.”

시무스 부인은 자신의 성격대로 당당해졌다가도 잭슨의 얘기가 나오면 다시 힘이 빠지곤 했다. 그녀의 중심이 마치 그에게 있는 것처럼 말이다. 엘리아나는 붙잡은 손에 지그시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현상금의 액수를 더 높이세요. 아주 간절하다는 듯이요.”

“그것보다 더 많은 금액의 현금은 없어요.”

“아니에요. 그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시무스 부인이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서에요. 노예 시장이나 현상금 사냥꾼들 사이에서는 위험한 일이라는 게 이미 소문이 나서 달려들 사람이 없을 거래요.”

“세상에나……. 그런 걸 어디서 안 거예요?”

“저도 저 나름 쌓아 온 인맥이 있거든요.”

엘리아나가 싱긋 웃으면서 말하자, 시무스 부인은 그녀의 손을 더 꽉 쥐었다.

“좋아요. 시키는 대로 할게요. 잭슨만 찾을 수 있다면 뭐든지요.”

“그래요. 우리 뭐든지 해 봐요. 꼭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엘리아나는 잭슨 시무스가 죽었든 살았든 무조건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데이지 시무스를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전략적인 계획과 별개로, 개인적인 감정으로도 그를 찾길 원했다. 자신은 갖지 못한 이 부부의 사랑을 지켜 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었다. 엘리아나는 그 마음이 나약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간절하고 강력한 힘. 샤르헨과 카르만의 겉모습뿐인 사랑과는 달랐다. 엘리아나는 그것을 진정으로 지켜 주고 싶었다. 그녀는 굳은 결심과 함께 시무스 가문을 벗어났다.

***

다행히도 오델리 백작가에 방문하기로 한 일정이 빨리 잡혔다. 엘리아나는 그때 입을 드레스를 골라 주겠다는 핑계로 허트 가문을 찾았다. 헬렌은 자신이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헬렌. 어떤 여자라도 멋진 청년 앞에서는 아름다워 보이고 싶은 거랍니다.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요. 나는 헬렌이 노란 드레스를 입었을 때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우아하고, 기품 있죠. 질리언 생각은 어때요?”

“노란색은 안 되오.”

“왜죠?”

“그건 헬렌에게 너무 잘 어울린단 말이오. 레이 오델리 놈, 보는 눈은 있어서. 끈질기긴.”

질리언은 화가 난다는 듯이 말했지만, 말투에는 애정이 듬뿍 묻어 있었다. 헬렌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면서 자신에게 있는 노란색 드레스들을 보여 주었다.

“엘리아나, 어떤 게 어울릴지 골라 봐 줄 수 있나요?”

“그럼요. 나 선물도 들고 왔다고요.”

엘리아나는 작은 상자를 꺼냈다. 자수로 만든 분홍색 단델리온 모양의 브로치였다. 꽃을 좋아하는 헬렌에게 딱 어울리는 장신구였다.

“세상에, 너무 아름다워요.”

“헌터 남작가에서 공방을 운영하기 시작했어요. 모자나 장신구를 만들거든요. 거기에 솜씨 좋은 하녀들이 많답니다. 특별히 부탁했더니 이렇게 예쁘게 만들어 줬어요.”

“이렇게 입체감 있는 자수는 어떻게 하는 걸까요? 너무 섬세하고 아름다워요.”

마치 솜털 하나하나가 움직일 듯이 봉긋하게 솟아오른 단델리온 브로치를 만지면서 헬렌은 행복하게 웃었다. 엘리아나는 그 브로치와 잘 어울릴 만한 드레스를 골라 주면서 말했다.

“이 드레스 어때요? 질리언?”

엘리아나는 장식이 적지만 단정해 보이는 드레스를 꺼냈다. 치마 겹이 풍성하고 원단이 고급스러웠다. 특히나 네크라인 주변으로 수놓아진 자수는 눈부실 정도였다.

“아름답군. 정말.”

질리언의 눈이 엘리아나의 녹색 눈동자를 향했다. 그 탓에 드레스를 보고 한 말인지, 엘리아나를 보고 한 말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드레스를 들고 자기 동생에게 이리저리 대 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엘리아나는 오늘 연한 남색 드레스를 입었다. 평소보다 연한 화장에 질리언이 선물한 목걸이를 하고 있으니, 파티에서보다 아름다웠다. 그때가 완전히 활짝 핀 담장 위의 붉은 장미 같았다면, 지금은 손에 닿을 수 있는 곳에 핀 분홍색 장미 같았다. 더 순결하고, 아름답고, 청초한 느낌이었다.

“오라버니, 제 드레스를 보고 하시는 말이 맞겠죠? 엘리아나가 아니라요.”

헬렌이 푸흐흐 웃자, 질리언은 그럴 리 없다는 듯이 잡아뗐다. 엘리아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질리언. 너무 부끄러워 말아요. 아름다운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다는 건 숨겨야 할 일이 아니랍니다.”

“엘리아나, 짓궂은 말 마시오!”

“아름다운 장미는 원래 조금 짓궂은 가시를 가지고 있어요.”

엘리아나의 말소리는 살랑살랑 부는 바람처럼 들려왔다. 질리언은 얼굴이 붉어져선 고개를 홱 돌렸다. 헬렌과 엘리아나는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하지만 사실 엘리아나의 마음속엔 약간의 조급함이 있었다. 헬렌과의 대화를 무사히 마치고, 질리언에가 부탁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엘리아나는 허트 가문을 떠나기 전, 질리언에게 단둘이 있을 시간을 요청했다. 질리언은 장난기가 사라진 엘리아나의 표정을 보고선 곧장 서재로 그녀를 안내했다.

그는 문을 닫기가 무섭게 돌아서서 물었다.

“무슨 일이요? 그 망할 카르만 헌터가 또 무슨 추악한 짓이라도 했소?”

질리언은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 카르만의 목을 벨 것처럼 말했다. 엘리아나는 고개를 빠르게 젓고선 말을 이었다.

“내 문제가 아니에요. 잭슨 시무스에 관련된 일이에요. 그가 위험해요.”

“시무스? 저번에 당신을 모욕줬던 가문 아니오? 그런 자라면 당해도 싸니 신경 쓰지 마시오.”

질리언은 괜한 오지랖을 부리지 말라는 듯이 말했다. 엘리아나는 질리언의 팔을 붙잡고선 말했다.

“단순히 시무스 가문의 문제가 아니에요.”

“시무스 가문의 문제가 아니라니?”

“잭슨 시무스가 민간 군수 물자를 유통하려고 했어요. 콘테르국으로요.”

“그건 불법이오.”

“조르디언 상단을 이용한다면 불법은 아니죠.”

“……!”

“그 일이 잘못 틀어져서 지금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어요.”

“그 말은…….”

“이게 잘못되면 콘테르국의 왕위 다툼에 콘티노국이 엮일지도 몰라요.”

“전쟁이 시작될 수도 있다는 말이군.”

엘리아나는 질리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최악의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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