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부인, 헌터 남작 부인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침대에 앓아누워 있던 시무스 부인은 ‘헌터 남작 부인’이라는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엘리아나 로즈?”
“네.”
“어서, 어서 모셔라!”
잭슨 시무스가 행방불명이 된 지 벌써 3일째였다. 그전에도 집에 잠시 들렀다 사라지기 일쑤였기에 거의 보름 동안 그가 어디로 가는지, 어디에서 있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데이지 시무스라고 엘리아나가 생각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요 며칠은 그가 누구와 바람이 났냐 보다는 어디로 갔는지, 살아는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그것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느라 헌터 남작가로 갈 생각까진 하지 못했다.
“날 부축해줘. 이 꼴로 손님맞이를 할 순 없지.”
“네, 부인.”
시무스 부인은 재빨리 가벼운 홈드레스로 갈아입고선 나타났다. 응접실에 앉아 있던 엘리아나는 그녀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선 정중하게 인사했다.
“데이지 부인, 얼굴이 말이 아니시군요.”
“집안에 일이 다사다난하여…….”
시무스 부인은 평소처럼 화끈하게 말을 내뱉지 못했다. 아무리 성격이 대범하다 한들 상황은 사람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곤 했으니 말이다.
엘리아나는 먼저 입을 뗐다.
“부인. 시녀와 하녀들을 물려 주세요. 은밀히 해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죠. 그쪽 시녀도 나가 있는 건가요?”
“네. 베니, 밖에서 잠깐만 기다려 줘.”
“네, 부인.”
베니가 먼저 걸음을 떼자, 시무스 남작 가문의 다른 시녀들도 하나둘 눈치를 보며 응접실을 나섰다.
엘리아나는 문이 닫히자마자 시무스 부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녀는 눈썹을 팔자로 내리고선 시무스 부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부인, 마음고생이 많았군요. 잭슨 남작님은 언제부터 연락이 되지 않고 있죠?”
시무스 남작 부인은 그 말 한마디에 눈물을 내비쳤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으니,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됐다. 그러니 마음속에 있는 고통도 그대로 보일 수 있는 것이었다.
“보름 전부터 이상했어요. 사람이 마치 어디에 쫓기는 것 같고, 집에 와도 서재에만 파묻혀 있다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가 버렸어요. 일주일 전부터는 집에서 잠도 자지 않았고, 삼 일 전부터는 어디 있는지 알 수도 없어요.”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려 가면서 말을 이었다. 엘리아나는 그녀가 거짓 없이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녀는 지금 절박했다. 누구에게든 이 이야기를 털어놓고 잭슨을 찾는 것에만 집중하고 싶을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귀족 부인들이 그렇듯이 그녀들이 닿을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나 뒷세계의 정보는 더더욱 그랬다. 남자들의 영역으로 분리되기 때문이었다.
엘리아나도 집안이 어려워 가장 노릇을 하며 살지 않았다면 연이 닿지 않았을 인맥들이었다.
엘리아나는 시무스 부인의 손을 꽉 잡고선 말을 이었다.
“마음 단단히 먹고 들어요. 시무스 부인. 남작님을 쫓는 무리가 있어요. 무기를 숙련되게 쓸 수 있는 자들이에요.”
“뭐라고요? 어째서 우리 잭슨에게? 그이는 싸움도 잘 못한다고요!”
“부군께선 민간 군수 물자를 유통하려고 했어요.”
“…그런 위험한 짓을 할 리가 없어요.”
시무스 부인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선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잭슨은 간이 아주 작아요. 소인배라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통 큰 사람이 아니에요. 작은 단도만 봐도 무서워서 손을 안 댄다고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군수 물자에 손댈 수가 있겠어요.”
“돈.”
“…….”
“큰돈이 되거든요. 민간 군수 물자는. 짚이는 곳이 전혀 없어요? 부군께서 무리해서라도 그 일을 할 만한 이유 말이에요.”
“…….”
“부인. 지금 조개껍데기처럼 입을 다물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어쩌면 이 순간에도 남작님은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른다고요. 험한 짓을 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들은 정보예요.”
엘리아나는 거리의 사내와 율리시스에게 얻은 정보를 토대로 시무스 부인을 압박했다. 시무스 부인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에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얼굴이었다.
“작위 때문일 거예요. 아버님께서 남작의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가문을 당신의 동생에게 물려주시겠다고 선언했거든요. 잭슨은 싸움도 못 하고, 지략에도 뛰어나지 못해요. 남작까지가 한계라고요. 하지만 어떻게든, 어떻게든 시무스 가문의 가주가 되고 싶어 했어요.”
그녀의 말에 엘리아나는 곧장 이해했다. 시무스 가문의 가주라면 그런 말로 잭슨 시무스를 압박할 만도 했다. 남작의 지위도 아내의 역할로 얻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압박을 넣고 싶었을 것이었다.
시무스 가문은 대대로 작위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가문이 자리 잡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평민 출신의 귀족이기 때문이었다. 선대 시무스 가주는 유언으로 ‘더 높은 곳으로’라는 명언을 남겼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뭐라고 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치만 너무 화가 나잖아요. 겨우 남작의 지위까지 얻었는데도! 가주가 되지 못하다니!”
잭슨 시무스는 더 높은 곳으로 향하지 못하면 가문을 물려받지 못하게 될 위기에 처했다. 게다가 드센 아내가 압박까지 하기 시작했을 때, 옆 나라 콘테르국에서 달콤한 제안을 받았던 것이었다.
도미누스 밀. 콘테르의 첫 번째 왕자인 그는 잭슨 시무스를 통해서 군수 물자를 몰래 늘리려고 시도했음이 틀림없었다. 본국인 콘테르국에서 거래하면 경쟁자인 헨리우스와 국왕의 눈치가 보이니, 조르디언 상단에 접근이 가능한 다른 귀족을 알아본 것일지도 몰랐다.
엘리아나가 말이 없자, 시무스 부인은 조급해져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어쩌면 콘테르국과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요. 남편 서재에 테르어로 적힌 문서가 있었어요. 난 읽지 못하지만, 어쨌든…….”
“부인.”
“네?”
“나를 믿으신다면, 내게 그 문서를 보여 주세요.”
“엘리아나.”
“전 테르어를 할 줄 알아요.”
“뭐라고요? 어, 어떻게?”
“결혼 전에 과외를 했었어요. 테르어는 상대적으로 수요가 적긴 하지만, 가격이 비싸서 열심히 공부했었어요.”
테르어는 콘테르국의 왕실 언어였다. 왕족이 아니더라도 아는 사람이 있었지만, 문법이 복잡하고 글자도 쓰기가 어려워 높고 고귀한 가문 말고는 그다지 쓰지 않는 언어였다.
엘리아나는 쉽사리 믿지 못하는 시무스 부인에게 곧장 자신의 이름을 테르어로 적어 보였다.
「엘리아나 로즈」
그러자 시무스 부인은 아주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재는 이쪽이에요.”
그녀는 성격이 급하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 덕분에 결단이 빨랐다. 엘리아나는 호방한 그녀의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시무스 부인은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이 어지럽게 뒤져 놓은 책상에서 테르어로 된 편지 몇 개를 보여 주었다. 엘리아나는 곧장 그것을 읽어 내려갔다.
「약속된 물자를 시간 안에 내놓지 않으면, 계약금의 두 배를 물어야 한다. 돈이 없다면 다른 것으로 값을 치르겠다. 예를 들면 꺾인 데이지 꽃.」
데이지는 시무스 부인의 이름이었다. 그러니까 거래량을 지키지 못하면 시무스 부인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내용이었다.
다음 편지는 잭슨이 보냈던 답장에 대한 회신 같았다.
「J가 H에게 협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계약에 변하는 것은 없다. 당신은 J에게서 무조건 우리에게 약속된 물자를 얻어 내야 한다. 협상은 없다.」
편지를 보낸 자는 아마도 도미누스 밀일 것이었다. 협상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도 없고 막무가내로 밀고 나가는 투는 책에서 묘사되었던 그의 모습과 똑같았다.
「잭슨 시무스, H에게 돌아선다면 너뿐만 아니라 시무스 가문은 모두 피로 물들 것이다.」
마지막 편지는 조금 찢어지고 구겨져 있었지만, 메시지 자체는 읽을 수 있었다. 시무스 부인은 궁금하다는 눈길로 엘리아나를 독촉했다.
“무슨 내용이에요? 남편이 테르어를 할 줄 안다는 건 처음 알았어요. 도대체 무슨 내용인가요?”
“부군께선 협박받고 있어요. 아마 누군가에게 계약금을 받고 군수 물자를 제공하기로 한 모양인데, 중간에 상황이 어려워졌나 봐요. 그런데 계약 상대는 상황이 변한 건 상관없고 무조건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있네요.”
“그런……. 그이는 대체 그런 녀석들과 왜 거래했죠?”
“그들에게 힘이 있으니까요. 아마도 상대는 콘테르국의 왕족이거나 상층 귀족일 가능성이 커요. 테르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들에게서 힘을 얻어서 가문을 지키려고 했는데, 문제가 악화된 모양이에요.”
엘리아나는 굳이 도미누스 밀이라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J라고 표시된 조르디언 상단도, H라고 표현된 헨리우스 밀도 말이다.
“이런 미친 인간. 어쩌자고 그렇게 대책 없는 일을 벌인 거야. 나에게 상의라도 했어야지. 바보 같으니라고… 그런 건 함께했으면 덜 힘들었을 텐데… 이 바보 같은 인간……!”
데이지 시무스는 또다시 눈물을 쏟아냈다. 강한 여인처럼 보였지만, 데이지 시무스는 잭슨에 관해서만은 한없이 여려졌다.
저런 게 부부간의 사랑인가. 엘리아나는 느껴 본 적 없고, 앞으로도 느낄 일이 없을 것 같은 감정이었다.
그녀는 시무스 부인에게서 시선을 떼고선 냉정한 눈으로 다시 편지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맥락상 자신이 해석한 게 맞는 것 같았다.
‘율리시스를 만나서 이 문제를 얘기해야 해.’
엘리아나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은 율리시스였다. 엘리아나는 차가웠던 표정을 지우고, 시무스 부인을 위로하는 척 그녀를 안아 주며 말을 이었다.
“울지 마요, 부인. 우리 같이 꼭 찾아봐요.”
“어흑… 어떻게 하면 좋아요, 정말. 이 미친 바보 인간… 어휴, 속 터져…….”
“협박의 강도가 점점 높아지는 걸 보니, 집 안에 있으면 다른 사람들도 위험해질 거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부군께서 숨을 만한 별장이나, 은밀한 장소가 없을까요?”
엘리아나가 묻자, 시무스 부인은 눈물을 멈추고선 한 명의 이름을 말했다.